어른들이 만든 생각 없는 세상
중고등학교 시절 "아무 생각 없다"라는 평가를 자주 받았다. 부모님에게서는 물론이고 담임교사들에게서도. 특히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내가 의외로 성적이 좋아서 신기하다고 하셨다.
나도 신기했다. 그런데 나의 생각 없음이 문제시된 것도 신기하다.
중학교 시절 쉰 명 가까운 아이들이 똑같은 복장으로 한 교실에서 반나절 넘게 복닥거리는 것이 신기했다.
보충수업 신청서를 나누어 주고 무조건 '신청'에 동그라미하라고 지시하는 담임 선생님이 신기했다.
그랬더니 정말로 학급 전원이 '신청'에 동그라미해 와서 신기했다.
교실에서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학생의 양쪽 겨드랑이를 꼬집어 위로 잡아 올리는 학생주임 선생님이 신기했다.
나는 시험을 잘 본 것 같은데 자꾸 못 봤다고 타박하는 부모님과 선생님이 신기했다.
누구누구만 제치면 네가 1등이라며 질시를 조장하는 담임 선생님이 신기했다.
고등학교에 가니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열두 시간 넘게 학교에 있어야 하는 것이 신기했다.
애들을 공부만 시킬 작정이냐며 학부모들의 원성이 자자하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그 와중에 자정까지 심화 자율학습이 시행되는 것이 신기했다.
그 심화 자율학습에 참여하는 아이들이 많은 것이 신기했다.
너도 심화 자율학습을 하라고 강요하는 담임 선생님이 신기했다.
기본 자율학습 시간에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는 내게 책을 압수하겠다고 다그친 국어 선생님이 신기했다.
네모진 감옥 같이 생긴 학교에서 하루에 열두 시간 넘도록 생활하면서 친구들이 제정신인 것이 신기했다.
하도 신기하고 희한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서,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해 봤자 이해시켜 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서 생각을 비웠을 뿐인데 뭐가 그리 대수람? 내가 생각을 멈추지 않고 계속 따지고 들면 당신들도 피곤했을걸?
공부하기 싫다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말한다. 고등학교 과정까지는 살면서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내용이라고. 맞는 말이다.
김유정의 소설,
확률과 통계,
뉴튼의 법칙,
교감신경과 부교감 신경,
세계 4대 종교,
시장의 수요와 공급의 원리까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내용이 맞다. 그런데 그걸 하루에 열두 시간 넘도록 들여다보라고? 누가누가 문제를 더 많이 맞추나, 누가누가 함정을 더 많이 피하나 내기를 하라고? 그 내기에 이기기 위해서 자정까지 문제집을 풀고 테크닉을 연마하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인생의 낭비인데, 그것을 추구하는 학교에 붙잡혀 있으니, 그렇다고 학교를 때려치운다면 어른들의 반대 속에 더욱 피곤해질 테니, 그냥 붙잡혀 있을 수밖에. 붙잡혀 있다고 생각하면 화가 나니까 그냥 생각을 버릴 수밖에.
그래서 생각이 없었을 뿐인데 뭐가 그리 신기하시담?
당신들에게 내가 신기했듯이 내게도 당신들이 신기했고, 당신들에게 내가 생각 없어 보였듯이 내게도 당신들이 생각 없어 보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