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치 혀로 공부시키려는 어른들
중학교 2학년 첫 중간고사에서 난생 처음 전교 1등을 해 보았다. 운도 좋았지만 노력이 태반이었다. 2학년에 진급하고 새벽까지 공부를 하곤 했는데 그건 어떤 욕심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수업만 듣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예습도 하고 복습도 하면 머릿속에 남는 지식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얻은 전교 1등이란 성적은 몇 가지 이상한 일들의 도화선이 되어 내게 찬물을 끼얹었다.
전교 1등을 하고 겪은 이상한 일 첫 번째. 다짜고짜 과학 경시반에 투입되었다. "내일부터 아침 8시까지 과학실에 가 있으라"는 담임 선생님의 지시대로 과학실에 가 보았더니 과학 경시반 아이들이 둘러 앉아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당시 나로서는 전혀 모르던 '시그마,' '탄젠트' 같은 용어를 사용하며 문제를 논의했고, 나는 그 말들이 무슨 뜻인지 물어가며 (그리고 그 아이들이 그 말들을 어디에서 배워 오는지 궁금해 하며) 문제 해설을 들여다 보았다.
과학에 별다른 재주가 없는 내가 그저 중간고사 성적만으로 경시반이 되었다는 사실이 괴이했다. 과연 경시반을 하고 싶은지 나의 의향을 아무도 파악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괴이했고. 부모님께 말씀 드리니 부모님은 "열심히 해 보라"고 하셨다. 하나 같이 괴이한 어른들이었다. 전교 1등을 하면 없는 재능도 생겨나는 줄 알았나? 얼마 후 치러진 강원도 C시 과학 경시 대회에서 나는 역시나 몇 문제 제대로 풀지도 못하고 탈락하였다.
전교 1등을 하고 겪은 이상한 일 두 번째는 다음 시험인 기말고사 성적이 발표된 후였다. 나의 기말고사 전교 석차는 8등이었다. 의외로 괜찮은 성적에 나는 내심 기뻤다. 1등을 한 이후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동기(motive)에는 내적 동기(inner motive)와 외적 동기(outer motive, 또는 도구적 동기 instrumental motive)가 있다. 내적 동기는 일 자체에 대한 흥미로 발생하는 자발적인 동기이고, 외적 동기는 칭찬이나 처벌과 같은 외부 자극에 의한 비자발적인 동기이다. 어떤 동기가 우세하게 작용하는지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라고 하나, 심리학에서는 외적 동기가 내적 동기를 약화시킨다는 사실이 증명된 바 있다.
예일대의 에이미 프제스니에프스키(Amy Wrzesniewski) 교수가 웨스트포인트(West Point, 미국의 육군사관학교라 할 수 있다) 사관생도 1만여 명을 14년 동안 조사한 결과 내적 동기가 강한 학생일수록 졸업에 성공할 확률이 높고 장교로 임관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내적 동기와 외적 동기가 공존하는 경우, 외적 동기가 많을수록 눈에 띄게 성과가 하락했다. 이에 대해 프제스니에프스키 교수는 "외적 동기가 내적 동기를 몰아냈다(Instrumental motives crowded out internal motives)"고 설명했다.
유치원생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도 있다. 연구자는 미술 활동을 즐기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세 그룹으로 나누었다. 첫 번째 그룹에게는 그림을 잘 그리면 상장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두 번째 그룹에게는 상장에 대한 언급 없이 미술 활동 후 상장을 수여했고, 마지막 그룹에게는 상장에 대한 언급도, 상장 수여도 하지 않았다.
두어 주가 지난 뒤 자유 시간이 주어졌을 때 첫 번째 그룹의 아이들은 그림 그리는 시간이 다른 두 그룹의 아이들보다 절반 가까이 줄어 있었다. 상장을 받기 위해 당장은 그림을 열심히 그리는 듯 보였지만 장기적으로는 그림에 흥미를 잃고 만 것이다.
나 역시 1등을 한 후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 1등 성적표에 어머니가 과도하게 기뻐하시고, 타의로 경시반 공부를 하게 되고, 얼굴도 모르는 다른 반 아이들이 내 이름을 알고 있는 등, 일련의 소소한 변화는 그동안의 재미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래서 공부를 게을리 하였는데 그럼에도 다음 시험에서 전교 8등을 하였으니 꽤 괜찮은 성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담임 선생님은 나를 교무실로 호출하시어 이렇게 물으셨다.
"왜 이렇게 못 봤냐?"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선생님께 이렇게 여쭤 보고 싶다.
“선생님은 전국의 도덕 교사(담임 선생님의 담당 과목은 도덕이었다) 326명을 무작위로 추출하여 점수를 매기면 8등이나 하실 수 있을 것 같으세요?”
그날 귀가하여 부모님께 성적을 말씀드리자 어머니는 창피해 죽겠다며 신경질을 내셨다. 8등이라면 전년도 평균 성적에 가까웠는데, 마치 자식이 만년 1등이었던 듯이 구는 어머니의 행동이 우스꽝스러웠다. 이후로 공부는 더욱 재미없어졌다. 얼마나 재미없었느냐면 내게는 공부하라고 재촉하면서 당신들은 TV를 보며 박장대소하는 부모님께 화가 치밀 정도였다. 한 번은 영어 학원에서 요즘의 고민이나 불만을 쪽지에 영어로 적어서 다른 학생과 교환하곤 서로에게 해결책을 제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나는 공부를 시켜 놓고 TV만 보는 부모님이 싫다고 적은 뒤 맞은편의 남학생에게 건네었다. 그 애는 내 쪽지를 읽고 피식 웃더니 대략 아래와 같은 내용을 적어 내게 돌려주었다.
'너는 학생이므로 공부를 해야 하고, 부모님은 이미 그 과정을 마치셨으니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
얼핏 그럴 듯했다. 그래도 공부는 여전히 재미없었고 성적은 나날이 떨어졌다. 성적을 놓고 욕설도 불사하시는 어머니께 연신 추락하는 석차를 선사하는 일은 통쾌하기도 하였으나, 어쩌다 노력한 과목에서 오답이 많아지면 눈물이 나기도 하였다. 어느 쪽이든 이제 공부는 '결과(외적 동기)와 상관 없이 최선을 다하는 일'이 아니게 되었다. 주위 모든 사람이 결과로 나를 평가하는 가운데 '결과와 상관 없이 최선을 다한다'는 순진한 원칙을 지키는 바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영어는 여전히 재미있었는데 중학교 3학년 때 토익 시험을 처음 치르고는 너무 어려워서 곧바로 문제집을 구입한 적이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왜 그런 시험엔 자극을 받으면서 학교 시험에는 자극을 받지 않느냐"고 핀잔을 주셨는데 그 덕분인지 학교 시험은 계속 재미없고 토익 시험은 계속 재미있었다.
후에 통번역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친척들은 내게 평생 공부해야 하는 직업을 과연 잘해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이렇게 물으셨다.
"대학원이 어렵냐? 원래 대학원 공부가 제일 쉬운 거 아니냐?"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이신 할아버지께서는 고등학교 공부가 제일 어렵고 대학부터는 점점 쉬운 공부인 줄 알았다고 하셨다. 평생 신문과 뉴스로 공부를 이어오신 할아버지가 자식들의 대학과 대학원 뒷바라지를 통해 관찰한 결과가 그것이었다고. 지방대 대학원을 다니신 아버지도 공부를 대충 하시긴 마찬가지셨다. 그런 아버지께선 언젠가 유명인의 논문 표절이 사회적인 논란이 되었을 때 아주 기가 막혀 하셨다. 석사 논문은 원래 그렇게 다 짜깁기하는 거라고, 원래 다 그런 건데 기자들이 뭣도 모르면서 논란만 키운다고. 내가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할 때에도 아버지께서는 원래 대학원 졸업식은 별 의미도 없다면서 가 볼 필요도 없다고 하셨고, 실제로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 모두 불참하셨다. 대신 지금의 남편이 된 남자친구가 꽃다발을 들고 함께 가 주었는데, 아버지의 말씀과 달리 내게 대학원 졸업식은 생애 가장 특별한 졸업식이었다. 합격률이 40%에 불과했던 졸업시험을 통과한 나와 동기들은 식이 종료되자마자 단상 위로 다같이 올라가 단체로 학사모를 던지고 깔깔 웃어가며 수많은 사진을 찍었다.
졸업식이 지나고 다시 고향에서 만났을 때, 아버지는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시며 확인 질문을 하셨다. 대학원 졸업식, 그까짓 거 별 것도 없지 않았느냐고.
저 얘기를 왜 자꾸 하시나, 혹시 불참한 것이 미안해서 저러시나, 싶어서 나는 거짓말을 하였다. 맞다고, 별 것도 없었다고.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아버지에게 당부하고 싶다.
내 생애 제일 애써서 졸업한 곳을 그만 폄하해 달라고.
출산을 하고 번역을 직업으로 삼은 덕에 나는 아이 앞에서 TV 시청이 아닌 독해를 한다. 대학원을 졸업한 지 10년이나 흘렀는데도 번역을 하고 나면 무언가 부족한 느낌에 수차례 윤문을 반복한다. 10년을 공부해도 부족하므로, 공부와 일이란 불가분의 관계다. 학생 때 공부를 마쳤으니 어른은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런 어른은 내 주변에도 많이 계시기에, 그 분들의 직업 윤리가 어떤 수준인지 잘 알고 있기에, 나는 평생 공부를 놓지 않을 테다.
그럼에도 공부는 나를 꾸준히 배신한다. 분명히 외웠는데 기억나지 않고, 분명히 기억이 났는데 착각이었고, 분명히 열심히 했는데 결과는 별로고. 계속 배신만 하다가 어쩌다 한 번씩 옛다, 하고 떡 하나 던져 주는 게 공부다. 그러므로 결과(외적 동기)에 초월해야 하는 것도 공부다. 나와 같이 졸업 시험을 치르고도 낙방한 수많은 대학원 동기들은 공부를 하지 않아서, 실력이 모자라서 낙방했을까? 전혀 아니다. 그 날의 컨디션이나 출제운으로 생겨난 백짓장 같은 차이가 잠시 운명을 갈랐을 뿐, 이후 언젠가 재시험을 통해 학위를 수여 받았을 것이다.
넘어지고 일어서도 넘어지고 일어서는 것이 공부다. 아이가 넘어지면 일어설 때까지 토닥여 주기만 하면 된다. ‘넘어진 사람을 발로 차지 말라(Don’t kick a man when he’s down)’는 영어 속담이 있다. 뭐라 설명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말인데 세상엔 넘어진 아이를 발로 차는 어른이 너무 많다.
성적이 왜 이 모양이니?
창피해, 창피해 죽겠어.
다른 애들 보고 자극 좀 받으란 말이야.
진정한 공부를 스스로 겪어 보지 않은 어른들, 세치 혀로 아이를 닥달하면 성과가 있으리라 믿는 어른들(아이가 공부하길 원한다면 어른이 TV를 끄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왜냐하면 Action speaks louder than words, 말보다 행동이 영향력 있으니까), 세치 혀로 내뱉은 말들을 교육이라 믿는 어른들. 그런 어른들은 아이의 공부에 대해 일언반구도 않는 편이 차라리 이롭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데 가만히 있지 못해서 지금도 얼마나 많은 어른이 얼마나 많은 아이의 마음을 할퀴고 있을지. 아이의 성적에 비난을 쏟아내기 전에 어른으로서 자신의 성적은 어떨지 생각이나 해 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