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 권하는 어른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원격 수업 기간 동안 체육 시간도 원격으로 진행되었다. 아이들도 체육 선생님도 각자의 집에서 화상 채팅을 통해 만났다. 수업은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챌린지를 주시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 중 가장 자주 한 챌린지는 주방용 뒤지개에 작은 일회용/플라스틱 그릇을 붙인 뒤, 돌돌 말은 양말을 통통 튀기는 것이다.
마치 탁구채를 위로 향하게 하여 혼자서 탁구공을 튀기거나, 배드민턴 라켓으로 혼자서 셔틀콕을 튀기듯이. 주어진 시간이 종료되면 아이들은 자신의 기록을 채팅창에 자유롭게 적어 넣는다. 양말을 튀기고 받기를 다섯 번 연속 성공했으면 5, 서른 번 연속 성공했으면 30.
한 번은 박스나 바구니 안에 양말을 던져 넣는 챌린지를 하였다.
그런데 준비한 바구니가 작은 바람에 딸아이는 단 한 번도 골인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동안 아이는 기록이 좋든 나쁘든 항상 채팅창에 공유했다. 그런데 바구니에 양말을 한 번도 넣지 못한 날, 나는 괜히 조마조마했다. 기록이 0이라서 아이가 부끄러워할까 봐. 혼자만 0이라고 울상이 될까 봐. 나는 다른 아이 중에도 0이 있지 않을까 채팅창을 살펴 보았으나 빠르게 표시되는 숫자들의 물결 속에서 0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혼자만의 긴장은 잠시,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0을 적어 넣었고 여느 때처럼 선생님,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하며 수업을 마쳤다.
아유, 창피해.
오래 전 어른들은 자주 그렇게 말했다. 아이에게 옷을 갈아 입히면서도 "아이, 창피해." 아이가 용변을 볼 때에도 "아이, 창피해." 아이를 목욕시키면서도 "아이, 창피해." 아이가 받아쓰기를 틀리면 "으이구, 창피해." 아이가 중간고사를 망치면 "창피해, 창피해 죽겠어." 아이가 꼴찌라도 하면" 동네 창피해 죽겠어, 진짜!" 아이가 n수를 하거나 백수가 되면 "내가 못 살아, 너 땜에 쪽 팔려서!"
그렇게 아이들의 수치심을 부채질했다. 앞으로 잘해 보라는 의도였더라도 듣는 아이의 마음은 다르다. 안 그래도 부끄러운데 부모마저 창피해 하면 아이가 느끼는 수치심은 갑절이 된다. 과도한 수치심은 두려움이 되고, 실패가 두려우면 도전이 두려워진다. 실패할까 봐 도전조차 포기하고 만다.
반면 실패에 의연한 아이들은 수치심에 감정적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다. 그런 아이들은 실패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고 문제 해결에 집중함으로써 바닥을 치고 일어나 재도전을 시도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자질을 가리켜 회복 탄력성(resilience)이라 부른다.
딸아이가 0이라는 숫자를 무심하게 타이핑할 때, 나는 안도하면서도 부끄러웠다. 아이는 저렇게나 의연한데, 그깟 기록에 수치스러워하고 수치 당하던 사람은 아이가 아니라 나였는데, 어째서 아이의 반응을 지레짐작하고 걱정하였나. 조건 반사가 된 나의 수치심이 부끄러웠지만 그저 가만히 있었다. 0을 입력하는 아이에게 '그래, 잘했어, 숫자는 중요하지 않아, 잘했어!'하고 오버하지도 않았다. 그냥 가만히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