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밟는 어른들의 말, 말, 말
중학교 내내 가장 친하던 친구는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미국으로 떠났다. 교수인 아버지께서 안식년을 맞으셨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거주한 1년 동안 친구는 종종 편지를 보내왔는데 나는 첫 편지를 받고는 매우 부러워했다. 나도 미국에서 영어를 익히고 싶었기 때문에. 나도 미국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더니 부모님은 이렇게 나무라셨다.
"이민은 뭐 아무나 가는 줄 아니?"
"미국이 어떤 덴 줄 알아? 거기가 세상에서 인종차별이 제일 심한 데야."
"내 나라 놔두고 왜 남의 나라에 가서 사냐?"
사실 미국은 오랫동안 이민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한 곳으로서 외국인 신분으로 살기엔 그나마 인종차별이 덜한 곳이다. 하지만 어린 나는 그 사실을 몰랐기에 부모님께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어 교사인 담임 선생님께서 내 영어를 칭찬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Jin아, 너는 유학 가라. 너는 유학 가야 돼."
그날 저녁 식탁에서 부모님께 그 말씀을 전해 드렸는데, 부모님께서는 전과 달리 아무런 핀잔도 주지 못하셨다. 유학을 바라는 말의 출처가 단순히 나의 소망이 아닌, 교사의 의견이기 때문이었을까?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아무런 대꾸 없이 식사를 하셨고, 이윽고 아버지께서 이렇게 불평하셨다.
"그 선생은 왜 쓸데없는 말을 해서 부모를 능력 없어 보이게 만드냐?"
나의 원가정에서 유학이란 내가 원해서도, 남이 권해서도 갈 수 없는 것이었다. 경제적인 여유도 충분치 않았겠지만 무엇보다 부모님의 인식의 장벽이 컸다.
성공의 보장도 없이 거액의 돈을 퍼붓는 일,
내 나라를 버리고 굳이 남의 나라에서 고생하는 일,
안 그래도 적적한 부부 사이인데 하나뿐인 자식마저 떠나 보내는 일,
부모님의 머릿속에서 유학이란 그런 것이었다. 특히 세 번째 항목을 이유로, 나는 희망하던 타지의 특목고조차도 지원할 수 없었다. 이후 대학에 입학해서도 유학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부모님께서는 주변의 유학 사례를 이따금 전하시며 조소를 하셨다.
"한국에서 대학 못 가면 떠나는 게 유학이야. 도망 유학."
"1년에 1억씩 든댄다, 야. 그렇게 들여봤자 뭐 얼마나 성공한다고."
"학교도 뭐 좋은 데도 아니더만. 텍사스 촌구석에 있는 학교야." (사실 미국은 촌구석에도 좋은 학교가 많이 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 준비를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시어머니께서는 어머니와 전화 통화를 하시다가 "우리 애는 유학을 갈 수도 있으니 가구는 좋은 것이 필요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통화를 마치자 마자 어머니는 곧바로 내게 전화를 걸어 오셨다.
"걔 유학 가니? 아예 정해진 거야?"
아직 정해지진 않았고 앞으로 가고 싶어 한다고 하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치? 희망사항이지? 유학을 뭐 아무나 가니?"
그러다 남편이 본격적으로 유학을 준비하자 부모님께서는 남편의 면전에서는 남편을 격려하시면서도 등 뒤에선 내게 이런 말들을 흘리셨다.
"OO오빠도 몇 년씩 준비하고 실패했는데, 그게 어디 되겠니?"
"요새 MBA들은 돈도 많이 못 받는다던데."
"아니, 왜 내 나라를 두고 남의 나라에 가서 살려 하지?"
하지만 부모님의 예상과 달리 남편은 MBA 입학에 성공했고, 미국 취업에도 성공했다. 덕분에 나도 꿈꾸던 해외 생활을 마음껏 누렸다. 미국 대학 축제에도 참여해보고, 풋볼 경기장에서 응원가도 불러보고, 추수감사절에 가정집에서 칠면조도 먹어보고, 초등학교에서 봉사활동도 해 보고, 깜깜한 할로윈 밤에 사탕 얻으러도 다녀보고, 실리콘밸리의 유명 회사 안에도 들어가보고. 오로지 우리 세 식구뿐인 외국 생활인지라 결속력이 단단해졌고, 그 안에서 나의 정서가 치유되었다.
딸아이는 어른이 되면 미용사나 치과의사가 되고 싶다고 한다. 나도 국민학교 시절 잠시나마 의사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다. 그 소망을 말하면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의사가 되려면 머리 깨지게 공부해야 되는데?"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했을 땐 이렇게 답하셨다.
"엄마 친구 중에도 감독이 있는데 돈벌이가 안 돼서 이번에 성인영화를 찍었어."
간호사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코웃음을 치셨고, 유치원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을 땐 두 분이 입을 모아 "아이고 야, 아서라!"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딸아이가 장래희망을 말해 주었을 때, 그냥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미용사와 치과의사 그림을 그려 왔을 때에도 그림을 재미있게 구경하기만 했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든가, 그 일은 무척 힘든 일이라든가 하는 말들을 늘어놓지 않았다. 부모가 굳이 나서서 초를 치거나 바람을 넣지 않아도 아이들은 성장과 실패를 거치며 스스로 목표를 조정한다. 부모가 제 딴에는 중대한 조언이라 여겨도 아이에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테고. 왜냐하면,
우리 젊은이들은 나이 든 노인들로부터 소중한 조언을 기대하기 힘들다. 그들이 했던 경험이라는 것은 매우 지엽적이었고 그들이 영위한 삶 또한 처참한 실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중략) 연장자들이 시도해본 삶은 나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월든>
내가 보고 겪고 들은 일들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일반화하여 마치 진실이라도 되는 양 이러쿵 저러쿵 떠들어봤자 아이에겐 소음 공해일 뿐이다. 아이가 어떤 길을 가든 부모는 그 옆, 또는 그 뒤에서 함께 걷기만 하면 된다. 걷는 동안 재정적인 지원이 부족하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의 꿈을 공격하고 비하하며 정서적인 지원까지 앗아갈 필요가 있나?
중고등학교 시절 미국을 꿈꿀 때 "유학은 아무나 가니?"하고 빈정거리는 대신 "어른이 되면 기회를 한번 찾아 봐" 하셨더라면, 유학을 준비하는 사위의 등 뒤에서 "그게 어디 되겠냐?"라고 빈정거리는 대신 "큰 도전을 하는구나" 하셨더라면, 마흔이 다 되어 드디어 미국 생활을 하며 간혹 떠올리는 부모님의 얼굴이 조금은 편안하게 기억되었을 텐데.
오래 전, 통번역대학원 입시를 준비할 때 부모님께서는 재정적인 지원엔 너그러우면서도 빈정거리시긴 마찬가지였다.
"너 그거 가망은 있는 거냐?"
"그거 해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떨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떨어지면 취직하면 되지, 어떻게 하긴. 영어에 능통한 24세 대졸자가 취직이 안 된다면 과외라도 하면 되지. 사범대학 졸업 후 교사로 근무하신 스무여 해 동안 아무런 도전 없이 사신 부모님께서 도전과 실패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태도가 신경을 긁어 놓았다. 다행히도 입학 시험에 바로 합격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못했더라면 근심이나 걱정으로 미화될 부모님의 비아냥을 과연 견딜 수 있었을까? 당시의 경험 덕분에 나는 앞으로 아이가 어떤 도전과 실패와 포기를 하여도 아이 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어떤 실패를 했건, 아가, 괴로워 말아라. 네가 해내지 못한 일을 두고 누가 너를 질책할 수 있겠느냐?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월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