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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Sep 02. 2020

'하면 된다'니요?

노오력을 외치는 어른들

ㅣ'하면 된다'고?


학창 시절 시험을 앞두고 어머니께서 물으신 적이 있다. 이번 시험을 잘 볼 것 같으냐고. 나는 못 볼 것 같다고 답했다. 과정에 아무리 최선을 다했더라도 나는 결과를 낙관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과정에 최선을 다하지도 않았거니와 학교 공부란 최선을 다할 가치가 없다고 믿던 어린 시절이었으니(사실 한국 같은 입시 위주의 교육과정이라면 문제 풀이를 대단히 즐기지 않는 이상은 노오력을 들일 가치가 없다고 지금도 믿고 있다) 시험 결과에는 당연히 회의적이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긍정적으로. 너는 지금 부정적인 거야, 부정적. 잘 될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되는데 너는 부정적이라고."


집게손가락으로 내 두개골을 가리키시며 '긍정'과 '부정'에 굉장한 강세를 넣어 말씀하시는 모습이 마치 내가 '긍정'과 '부정'이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줄 착각하시는 듯했다. 그래서 황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스웠다. 퇴근하시고 나면 "집구석에만 들어오면 짜증이 난다"고 불평하시는 분께서 긍정을 설교하시다니. 어디 또 뉴스나 신문에서 '긍정적인 사람이 성공한다"는 기사를 보셨나 보군, 생각하였다.


공부, 공부거리는 어른들 사이에서 '공부가 그리 좋으면 당신들이 하시든가'라고 속으로만 구시렁거리던 고등학교 시절을 끝내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 나는 서울 외할머니댁에서 지냈다. 오래 전 막내 외삼촌이 쓰시던 작은 방에서. 방 안에는 삼촌의 모교이자 이제 나의 학교가 된 K대의 상징물 중 하나인 호상비문 액자가 걸려 있었고, 그 옆으로는 '하면 된다'라는 글귀가 적힌 액자가 함께 걸려 있었다.


K대의 호상비문은 1965년 학생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호상(호랑이상)에 적힌 비문으로서 당시 국어국문학과 교수였던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작품이다. "민족의 힘으로 민족의 꿈을 가꾸어 온 민족의 보람찬 대학이 있어..."하고 시작하는 비문을 방 안에서 가만히 읽고 있자면 마치 내가 호랑이가 된 양 호기로워지는 느낌이 있었다.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몇 번이고 반복 학습했던 조지훈의 <승무> 또는 <낙화>의 먹먹한 분위기와는 색다른 감정이었다. 


외삼촌의 오래된 방 벽에 걸린 호상비문. 그것을 읽고 뜨끈해진 가슴은 안타깝게도 그 옆에 걸린 '하면 된다' 액자 때문에 일순 차게 식곤 하였다.


하면 된다니. 얼마나 대단하신 분이길래 '하면 된다'고 확신하시는지? 외삼촌은 이 말을 믿으셔서 이렇게 걸어 놓으셨나? 많이 들어본 말이긴 한데 대체 누가 한 말이람?



ㅣ나는 해도 안 되던데?


고등학교 3년 내내 눈에 띄는 영어 경시대회에 모두 출전하였다. 필기 전형은 언제나 통과했지만 면접 전형은 전국 규모의 경우 언제나 낙방했고, 강원도 대회에 한정해서만 겨우 장려상 정도를 수상했다(상위 수상자는 모두 민사고 재학생이었다). 이미 우리 나라엔 영어 잘하는 아이가 너무 많았고, 오랜 해외 체류로 원어민인 아이도 너무 많았다. 그런데 해외라고는 제주도밖에 못 가본 일반고 학생인 내가 왜 그 틈바구니에서 영어에 매달리는지, 당시의 나도 내가 삽질을 하고 있음을 스스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삽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결국에는 삽질을 하도 오래 해서 지하수가 뿜어져 나와 삽을 타고 물바다를 정처 없이 둥둥 떠다니는 심정이 되었다.


'아, 몰라. 그냥 계속 둥둥 떠다녀.'


그것이 고딩 Jin의 결론이었다. 다른 것을 시도해봤자 아무것도 재미없었기 때문이다. 수능을 앞두고 여러 다른 전공을 잠시 탐색했으나 결국은 영문과로 결정하고 문과대에 입학하고 나서는 마치 인생을 물바다의 흐름에 맡긴 기분이었다.


그런데 '하면 된다'니. 이런 순진하고 오만한 발상을 봤나. 열아홉 생애 동안 실패의 삽질을 거듭하다 여전히 실패의 물바다 위를 헤매는 내게 인생이란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안 될 것 같지만 그냥 하는' 것이었다. 이후 통역사가 되고 프리랜서 번역사가 되긴 하였지만 '하면 되더라'고 거드름 피울 일이 아니다. 시험운이 따라주어 대학원에 합격/졸업했고, 뉴욕발 금융위기가 끝나고 경제가 호전되어 통역 시장에 무사히 진입했으며, 대학원 동기를 비롯한 주변인들이 일감을 물어다주어 번역일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 모든 일을 마치 나의 노오력과 능력만으로 달성한 듯이 '하면 되더라'고 추호도 말할 수 없다.



ㅣ해도 안 될 때가 더 많을걸?


'하면 된다'는 말, 누가 시작했담? 검색을 해 보니 어느 전(前) 대통령의 저서가 화면에 뜬다. <<하면 된다! 떨쳐 일어나자>>. 전쟁의 상처 속에서 굶주리던 나라가 당신의 진두지휘로 급성장하자 '하면 되는구나' 싶으셨나 보다. 그리고 그의 지휘를 따르던 사람들도 '하면 되는구나'하고 덩달아 신이 났겠지.


하지만 '하면 되더라'고 단언하기에 당시는 온 세계가 성장기이자 호황기였다. 그래서 정부 주도의 수출 전략이 효력을 발했고, 이후 베트남 전쟁으로도 특수를 누렸다. 이런 외부 조건이 없었더라면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시기가 오래 이어졌을지도 모르는 일. '하면 되더라'고 마냥 자신감을 내뿜기엔 타이밍이 너무 좋았다.


그렇게 '하면 된다' 정신으로 밀어붙인 경제 성장은 정경 유착,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 높은 대외 의존도, 성장 속도를 따라오지 못한 시민의식, 그로 인한 갑질과 착취, 무분별한 자산 축적으로 인한 집값 상승 등등 어마어마한 부작용을 양산했다. 이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과연 '하면 되더라'며 거드름 피울 수 있을까?


무언가 '되었다'고 여겨져도 무한한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진 않는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일이 잘 된다고? 일이 잘 되리란 기대, 결과가 좋으리란 기대가 클수록, 잘 되지 않을 때의 좌절도 함께 커진다. 직업에 대한 긍정적인 환상이 클수록, 결혼에 대한 긍정적인 환상이 클수록 이후 직장생활과 결혼생활에 빠르게 실망하듯이. 시험 결과를 낙관할수록, 사업 결과를 낙관할수록, 예기치 못한 위기와 난관에 당황하듯이. 일이든 공부든 결혼이든 육아든 장밋빛은 아무 곳에도 없다. 예기치 못하게 여기서 삐걱, 저기서 삐걱거리면서 언제나 문제와 실수와 실패가 뒤따른다.


애인이 결혼 상대로 적절한지 알아보기 위해선 등산을 함께 가 보라는 말이 있다. 등산로는 인생길의 축소판. 가라니까 가기는 하는데 계속 오르막이고, 그래서 힘들고 지겹고, 힘들고 지겨운데 이 짓을 왜 하는지 모르겠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겠고, 그 와중에 돌부리나 벌레 같은 장애물이 여기저기서 튀어 나오고, 넘어져서 상처가 났는데 피까지 흐르고. 그런 난관을 애인이 현명하게 견디며 지혜롭게 지나가면 인생의 동반자로서도 적절하다고 한다.


물론 나는 그런 테스트 없이 결혼했다(테스트를 했다면 오히려 내가 차였...). 대신 나도 모르는 사이 장래의 직업을 테스트해 버렸다. 수많은 경시대회에서 낙방하고, 영어 토론 수업 중에 벙어리가 되고, 나의 엉뚱한 단어 선택에 외국인이 폭소하고, 통역 연습 중에 머릿속이 하얘지고. '넌 해도 안 돼'라고 낙담시키는 여러 사건 속에서도 오로지 재미있는 건 영어뿐이었다. 


그래서 긍정감이 생겼다. 결과가 좋으리란 긍정감이 아닌, 과정을 견딜 수 있겠다는 긍정감. 영어를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직업을 갖는다면 넘어지고 뭉개지고 내던져져도 즐길 수는 있겠다는 긍정감.



ㅣ했는데 안 돼도 괜찮은


'하면 된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일이 잘 풀려.'

'나 때는 말이야...'

라고 말하는 베이비붐 세대의 처세술은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노오력을 하면 희망이 현실이 되던 성장기는 이제 끝났다. 헝그리 정신으로 노오력하여 내 집을 장만하고 자식에게 공부, 공부를 외치다 자식의 성공이 자신의 성공인 양 으쓱대는 성과 만능주의의 시대 역시 끝났다. 무언가가 '되었다'고 해서 영원히 지위를 인정 받으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태는 아직 끝나지는 않았지만 이젠 적폐다.


베이비붐 세대의 교육을 받으며 자란 나에게도 그들의 구닥다리 처세술이 손자국처럼 남아 있다. 스무여 해 전 계속된 삽질로 물바다 위를 떠다닌 덕에 그 손자국이 조금은 지워졌지만 남은 손자국이 혹여라도 진해지지 않도록 이따금 스스로에게 상기시킨다.


'했는데 안 돼도 괜찮아.'

'성공보다 실패하기 쉬운 법. 과정을 즐겼다면 그걸로 충분해.'

'나 때는 말이야, 앞날이 보장되는 직업이 인기였어. 그런데 그런 직업을 가진 친구들에게도 인생은 첩첩산중이더라. 그러니까 첩첩산중을 즐길 수 있는 일, 실패하고 실수해도 재미있을 일, 뒤로 넘어져서 코가 깨져도 재미있을 일, 그런 일을 택해야 해. 인생은 장기전인데 재미있지 않으면 어찌 롱런하겠어?"


그래서 말인데 그렇게 재미있는 일, 어디 또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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