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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Jul 12. 2020

아이에게 고생길을 주었습니다

고생길을 막지 못하는 실패

남편의 회사는 코로나 사태로 매출이 80% 급감했다. 1차 정리해고에서는 3,700명이, 2차에서는 2,000명이 회사를 떠났다. 순수 국내파인 남편이 부족한 영어로 어렵게 취직한 미국 회사인데 입사한 지 겨우 일 년만에 회사의 존폐 자체가 우려되고 있다. 나는 남편을 도닥이며 말했다.


"고생이 많아."


그러나 남편이 답했다.


"인생은 원래 고(苦)야."


맞다. 인생은 고통이라고, 아주 오래 전 석가모니도 말씀하셨고, 내가 좋아하는 유발 노아 하라리도 말했고, 내가 평생 사랑할 남편도 말한다. 수십 장의 이력서를 제출하고 십수 번의 면접 전형에서 탈락하는 역경 끝에 취직을 하여 말 그대로 근, 로, 열심히 일해서 상사의 신임까지 얻었는데 그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르는 위기가 닥쳤다.


이 상황은 남편의 능력 때문도, 남편의 노력 때문도, 남편 고용주의 방만하거나 탐욕스러운 경영 때문도 아니다. 남편도, 남편의 고용주도 미래를 설계하던 시점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어떤 바이러스 때문이다. 


인생은 이런 식이다. 계획대로 흘러간다 싶으면 어떤 뚱딴지 같은 것이 튀어 나와 판을 엉망진창으로 헤집어 놓는다.


그런 인생인데, 그런 인생의 판에 우리는 굳이 아이들을 낳아 살게 한다. 아이들은 변변찮은 유전자로 낳음을 당하여 난 누구? 여긴 어디? 하며 살아간다. 혼란스러운 아이들에게 부모는 넌 누구를 닮아 그 모양이냐고 다그친다. 그러면 아이들은 고개를 조아린다. 겨우 그런 유전자로 태어난 것이 자기 잘못도 아닌데 희한하게 미안해 한다.


내가 출생한 80년대에만 해도 남아 선호 사상이 대놓고 뚜렷했다. 어릴 적 내 별명은 '샌내'였는데, 나의 성씨와 연결하면 '김샌내'가 된다. 김샌내. 김샜네. 아들이 아니라서 김 샜네. 부모들이 아들을 원한 이유는 자신들의 족보를 잇고 부양을 책임질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들이 아닌 아이들은 일찍이 복중(腹中)에서 살해를 당하거나 태어나서 무시를 당했다. 한참을 그러더니 요즘은 또 딸이 대세란다. 딸들이 살갑고 애교를 떨어 줘서 좋단다. 과거엔 자녀로부터 경제적 노동을 기대했다면 이제는 감정 노동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전엔 딸만 있는 집에 "아들이 있어야 하는데"하면서 딸들을 기죽이더니, 요즘엔 아들만 있는 집에 "딸이 있어야 하는데"하면서 아들들을 기죽인다. 탄생도 성별도 자기 선택이 아니었는데 기죽고 마는 순하디 순한 아이들.


출산의 의도는 '낳아 주신 은혜'를 부르짖을 만큼 숭고하거나 이타적이지 않다.

노년이 쓸쓸하거나 가난할까 봐. 
둘이서만 살기에는 적적해서. 
양가 부모가 원해서. 
그냥 애를 한 번 키워 보고 싶어서. 
남들도 다 낳으니까

간혹은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 해결을 위해 아이를 가지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진심인지는 모르겠으나 진심이더라도 자신이 속한 사회의 존속을 위해 다음 세대의 노동력을 써먹겠다는 의도이므로 이기적이긴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이렇게 온전히 부모의 필요와 욕구 충족을 위해 태어난다. 나의 경우엔 신사임당 같은 현모양처가 되고 싶어서 아이를 원했다. 그 역시 나의 욕심이었을 뿐, 결과적으로 아직 현모양처가 되지도 못했고 앞으로도 전망이 그다지 밝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둘째를 생각한다. 아이가 나처럼 외로운 외동으로 자라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그 역시도 나의 개인적인 견해와 결핍에서 비롯된 욕심이다. 그 욕심이 가족에게 득이 될지 독이 될지는 전혀 모른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데 부모가 되었다. 내 아이의 인생도 여느 사람처럼 고생길이 훤하다. 세상이 아무리 좋아졌다 한들 몇 년 후에 또 어떤 바이러스 같은 일이 발생하여 지구인의 삶을 뒤흔들지, 부모들은 일절 모른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을 낳고 기른다. 그리고 그 아이들로부터 위안을 얻는다.


그러므로 은혜를 베푸는 쪽은 아이들이다. 따라서 보답은 부모가 해야 하는데 전지전능한 능력이 없으니 고생길을 막아 줄 수도 없고, 작은 문제조차도 부모는 뒤로 물러서 있는 편이 이로울 때가 많다. 


따라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그저 한 발 뒤로 물러서 있는 것. 엄마가 옳다고, 엄마 말을 들으라고, 넌 어찌 그 모양이냐며 나의 자뻑과 자기애로 아이를 짓누르지 않는 것. 뒤에서 지켜 보다가 작고 즐거운 추억을 하나씩 만들어 가는 것. 


고생길의 편안한 동반자가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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