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에게도 이롭지 않은 노래
부모가 되고 나서 '미국에 살아 다행이다' 싶은 날이 있다. 바로 어버이날. 물론 미국에도 어머니날(Mother's Day)과 아버지날(Father's Day)이 있다. 하지만 부모가 되고 나서 한국의 어버이날에 대하여 뒷목의 솜털이 쭈뼛쭈뼛 설 정도로 싫어하게 된 '그것'이 미국에는 없다.
'그것'은 <어머님 은혜>라는 노래인데, 심지어 버전도 두 가지나 있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고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이런 버전도 있고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하늘 그보다도 높은 것 같애
이런 버전도 있다.
나의 딸은 두 가지 버전을 모두 모른다. 한국에 있는 동안에는 기관에서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고, 미국에 있는 동안에는 우리 부부가 저 노래들을 가르친 적이 없으므로 당연히 모른다. 앞으로도 나는 아이에게 저 노래들을 가르칠 계획이 없다. 하지만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 아이가 학교에서 배운 <어머님 은혜>를 내 앞에서 부르려고 한다면 나는 손사래를 치며 이렇게 외칠 것만 같다.
"그 노랜 가사가 틀렸어!"
가사가 틀렸다. 적어도 내 귀에는.
첫 번째,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다 잊긴 뭘 다 잊나? 여섯 시간 진통하고 분만실에 들어가자마자 딱 세 번 힘 주고 순풍 출산한 나도 그 때의 고통을 생생히 기억하는데. 한 번은 아이가 문득 물은 적이 있다. 자기를 낳을 때 아팠느냐고. 아팠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아이는 이렇게 물었다.
"그래서 싫었어?"
너를 만나기 위해서였으므로 조금도 싫지 않았다고 답했다. 아마도 '나실 제 괴로움을 잊었다'는 가사는 낳을 때 괴롭긴 하였으나 그 고통을 별로 개의치 않았다는 속뜻으로 해석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엄마들이 나실 제 괴로움을 잊지는 못하지만 그 고통을 별로 개의치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엄마라 하더라도 사람은 무한히 다양한 법. 자식을 면전에 두고 네가 태아 적에 머리가 얼마나 커다랬는지, 몹집이 얼마나 커다랬는지, 그래서 너를 낳는 과정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하마터면 내가 죽을 뻔했다고 갖은 생색을 내는 엄마들도 있다.
마음이 여린 아이들은 그런 생색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건 마치 "그래서 (아파서) 싫었어?" 라고 묻는 아이에게 "당연히 싫었지. 내가 죽을 뻔했다니까!" 하고 대답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 대답엔 암묵적인 요구가 뒤따른다.
"그러니까 엄마한테 잘해"와 같은 요구.
이에 대하여 "그러게 누가 낳아 달랬어?"라고 아이가 되묻는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그러지 못하고 엄마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아이들은 마음 가득 부채감을 뭉게뭉게 피워 낸다. 자신의 존재가 태생부터 무언가 잘못되어 태생부터 엄마를 괴롭혔으므로 엄마에게 아주 커다란 빚을 졌고 그 빚을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공식이 머릿속에 단단히 자리잡아 성인이 되어서도 효자병, 효녀병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어쩌다 벗어나게 된다면 그 환멸감이란 온몸으로 진저리가 쳐질 정도다. 나실 제 괴로움을 무기로 그토록 보답을 바랐으면서,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었다는 노래를 잠자코 들었던 엄마의 이중성에 소름이 끼친다.
두 번째,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고.'
당연히 갈아 눕혀야지 안 갈아 눕히면 아동 학대다. 보송보송하게 마른 자리와, 축축하게 젖은 자리가 있다면 부모보다 아이가 마른 자리에 누워야 한다. 어린 아이는 젖은 자리에 방치되면 저체온증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므로 아이를 마른 자리에 눕히는 행위는 정상적인 돌봄 행위일 뿐이고, 젖은 자리에 눕히는 행위는 그냥 미친 짓인 거다.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눕히지 않는 사람을 규탄해야지, 갈아 눕힌 사람을 찬양할 일이 아니다. 아마도 이 노래의 화자는 바닥 시공이 제대로 되지 않아 마른 자리가 별로 존재하지 않는, 흙바닥의 습기 탓에 온 바닥이 진 자리인, 정상적인 돌봄 행위가 거의 불가능한 그런 환경 속에서도 정상적인 돌봄 행위를 제공해 준 어머니에게 감사를 전하는 듯하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 난방비를 절약하고자 차갑게 방치된 바닥은 있어도 젖은 흙바닥은 좀처럼 없는 요즘의 가정에서, 아이가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고"하며 노래를 부르면 아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것만 같다.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눕히는 게 마땅하다고, 너도 엄마가 되면 당연히 갈아 눕혀야 한다고, 이렇게 찬양 받을 일이 아니라고, 구시렁대면서.
세 번째, '푸른 하늘 그보다도 높은 것 같애.'
얼어 죽을 하늘은 무슨, 은혜는 무슨... 나는 양육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을 뿐이다. 아이는 내게 '저 좀 태어나게 해 주세요' 하고 부탁한 적이 없다. 임신과 출산은 나의 소망에서 말미암았고, 육아의 고충은 나의 선택으로 수반된 책임일 뿐이다. 그리고 양육의 의무를 이행하는 과정은 그다지 신성하지 않다.
아이가 늦장을 부릴 때 가슴 속에서 스물스물 올라오는 짜증으로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아이의 체온이 40도를 육박하는 한밤에도 졸음이 쏟아지며 수면욕이 거대하게 드러나고,
아이가 배우고 싶다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지 못함으로써 지식과 경제력의 한계가 드러난다.
양육은 나를 하늘로 높여주지 않는다. 나를 땅으로 꽂아내려 내가 얼마나 작디 작은 미물인지, 얼마나 결함이 허다한지, 얼마나 능력이 모자란지 매 순간 적나라하게 확인시켜 준다. 내 생애 이토록 겸허하게 세상을 마주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한참 더 겸허해질 예정이다.
몇 년 전 <힐링캠프>라는 프로그램에 배우 김희선이 출연하여 <어머님 은혜>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전한 적이 있다. 딸의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어머님 은혜>를 합창하여 모든 부모가 대성통곡하였다는 거다. 당시 나는 임신 중이었기에 그 에피소드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감흥이 오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들이 무슨 마음으로 대성통곡하였는지 알 것도 같다. 아마도 대부분은 자신의 노력이 하늘에 미치지 못하였음에도 자신을 하늘에 빗대어 노래해 주는 아이에게 감사하고도 미안한 마음이었을 테다. 하지만 부모라 하더라도 사람은 무한히 다양한 법. 어떤 부모는 자신이 베푼 하늘 같은 은혜가 이제서야 이렇게라도 인정을 받는구나, 하고 여겼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인정과 승인을 갈구하는 부모는 자녀에게 이런 말을 하곤 한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한때 국민적 사랑을 받은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1화에서 덕선이와 정환이와 선우는 모두 부모님과 갈등을 빚는다. 덕선이의 부모는 첫째 보라와 막내 노을이에겐 계란 부침과 닭다리를 먹이면서 둘째 덕선이에겐 콩자반과 닭날개만 건네어 덕선이의 불만을 키운다. 정환이는 집 안에서 도통 말이 없어 부모가 서운해 하고, 반면 선우는 가족과의 소통은 원활하지만 방 안에서 담배갑이 발견된다. 담배갑을 주워 들고 선우 엄마는 이렇게 야단을 친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그러더니 선우의 턱에 붙은 반창고를 가리키며 나쁜 애들과 싸움이나 하고 다닌다고 몰아세운다. 선우는 담배는 자기 것이 아니며 턱의 상처는 면도를 하다가 베였다고 해명한다. 그러자 선우 엄마가 갑자기 소리 높여 엉엉 운다. 선우는 "우리 엄마 또 왜 이럴까"하고 미소 지으며 엄마를 안아 준다. 그런 아들에게 안겨 선우 엄마는 계속 엉엉 운다.
그 장면에 무언가 기가 막혀서 마음을 표현할 길을 찾고 있는데 옆에서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
"저 아줌마는 자기가 잘못해 놓고 왜 저래?"
선우 엄마가 남편과 사별하고 힘겹게 아이들을 키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운명을 오롯이 홀로 겪지는 않았다. 아이들도 함께 겪었다. 그렇다고 그 아이들이 "내가 어떻게 컸는데!"하며 내세우나? 선우는 엄마의 맛없는 요리도 게눈 감추듯 먹어 치우고, 학교에서 일어난 일들도 투명하게 공유하며, 어린 동생을 성심성의껏 돌본다. 후엔 엄마가 원하는 대학, 원하는 전공을 선택하고 엄마가 원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살아간다. 그런 선우는 엄마의 모함 앞에서도 다정하게 웃으며 엄마를 안아 줄 뿐이다. 마음 그릇이 손바닥만한 엄마가 줄줄 흘리는 온갖 불신과 불안과 원망과 욕망을 자기 그릇에 기꺼이 대신 담아 준다. 선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여느 아이들은 뒷걸음질치다가 자기 마음 그릇을 원천 봉쇄해 버리기 십상이다. 부모로 인해 자기 마음까지 오염되지 않도록.
1화 말미에서 선우 엄마는 선우 아빠의 제사를 지내며 또 연신 엉엉 운다. 그런 엄마를 등지고 선우는 동생이 술잔을 채우도록 돕고 제사상에 절을 올린다. 전면으로는 아빠의 영정 사진, 측면으로는 어린 동생, 후면으로는 엄마의 눈물에 둘러싸인 채로 제를 올리는 동안 선우의 가슴 속에서는 책임감과 부채감이 켜켜이 쌓여 갔으리라.
한편 부모님의 차별에 불만을 쏟아낸 덕선이는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라 그래. 미안하다"는 아빠의 사과를 받고 용서의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얼마 후, 취침 중에 연탄 가스가 누출되는 사고가 덕선이네 집에 일어나는데, 부모님은 보라와 노을이만 구출하고는 덕선이를 깜빡 잊는다. 하지만 우리의 덕선이는 스스로 밖으로 기어나와 동치미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정신을 가다듬는다.
부모는 성자(聖者)가 아니다. 부정적인 자기 감정을 혼자서 감당하지 못해 자식에게 흘리기도 하고, 차별을 인지하면서 계속 차별하기도 한다. 그래 놓고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라며 어물쩍 넘어가기도 하고, 방귀 뀐 놈이 성 내듯이 엉엉 울며 자기 울분만 토하기도 한다. 어떤 때는 인격의 문제이지만 어떤 때는 부모도 겨우 인간인지라 어쩔 수 없다. 겨우 인간인 우리 부모들을 하늘에 빗대며 신격화하는 문화는 모두에게 해롭다.
착한 부모는 하늘에 미치지 못하여 미안해 하고,
착한 아이는 무거운 부채감에 시달리게 하면서,
못된 부모는 마음껏 유세 떨며 군림하게 해 주고,
못되지도 착하지도 않은 부모는 갈팡질팡 헷갈리게 만드는
그런 문화이니까.
<어머님 은혜>는 그런 문화의 집약본이다. 그래서 별로 듣고 싶지 않고 아직 듣지 않아 다행이다.
(주의: <응답하라 1988>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덧1. 둘째라는 설움 속에서 사랑에 목이 마른 덕선이는 아무에게나 금방 사랑에 빠지고 마는 '금사빠'가 된다. 금사빠 덕선이는 친구들의 부추김에 선우를 좋아하다가 또 역시 친구들의 부추김에 정환이를 좋아한다. 하지만 결국은 택이와 결혼한다. 각종 신파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응팔을 좋아하는 이유는 덕선이가 택이와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먹는 것을 좋아하는 자신에게 "또 먹냐"고 구박하는 정환이가 아니라, "많이 먹어, 덕선아"하고 웃어 주는 택이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그 누구의 부추김도 없이, 스스로 택이를 선택하여 사랑했기 때문에.
덧2. 담배갑의 주인은 라미란 여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