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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Sep 12. 2020

은혜는 무슨, 그냥 일이죠

셀프라이선싱에 빠져 대상항상성을 망치는 어른들

아이들은 모든 것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므로 잘못된 대우를 받으면 자신이 '충분히 좋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 믿는다. 반면 부당하게도 어른은 좋은 일을 하면 인생에 통제권이 생긴다고 믿는다. 선행에 대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며 그로 인해 해악으로부터 보호 받으리라 여긴다.
—마르시아 시로타(Marcia Sirota)


l 셀프라이선싱에 대하여


방금 운동을 했으니 햄버거 하나쯤은 먹어도 되겠지.
에코백은 '에코'백이니까 여러 개 사도 되겠지.
연예인은 우리 관심으로 떼돈을 버니까 악플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나?
나 정도 직위면 법인카드 좀 써도 되지, 뭐.

좋은 일을 한 후 자아상에 자신감이 생겨 이후로는 잘못된 선택을 하는 셀프라이선싱(self-licensing: 부도덕한 행동을 하도록 스스로에게 자체적으로 자격을 부여한다는 의미) 효과다. 우리말로는 '자기합리화'로 번역되기도 한다.


어릴 적 학교에서 열이 오른 적이 있다. 당시 타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나를 데리러 와 조퇴를 시키고 집까지 태워다주셨다. 아버지는 곧 학교로 돌아가야 했기에 역시 타학교 교사였던 어머니가 일찍 귀가하여 아버지와 바톤터치를 하셨다. 현관문을 들어선 어머니는 곧바로 내게 욕설부터 하셨다.

"꼴 보기 싫은 년."

그 말에 아버지는 어머니께 "못돼 쳐먹었다"며 화를 벌컥 내시곤 쌩하니 나가셨다. 훗날 어른이 되고 아이를 낳아 아이의 병치레를 여러 번 겪은 후에야 어머니께 물었다. 어떻게 아픈 나를 보자 마자 욕부터 할 수 있었느냐고. 어머니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도 이렇게 답하셨다.

"내가 힘드니까 그랬겠지."

목소리에선 미안함이 아닌 당당함이 흘러 넘쳤다. 순간 어머니께서 당당하게 하고 계실 생각들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너를 먹여주고 키워준 사람이니까.
그래서 힘이 들었으니까.
안 그래도 힘든데 네가 아파 직장에서 조퇴를 해야 했으니까.
조퇴를 하기 위해 거쳐야 했던 일련의 과정이 번거롭고 힘들었으니까.
그 모든 힘듦이 너 때문이었으니까.
게다가 네 병간호까지 해야 했으니까.


그러니까 고마운 줄 알아야지, 욕 먹은 게 무슨 대수라고.


어릴 적 부모님의 욕설과 체벌에 드물게나마 이의를 제기했었다. 그러면 부모님은 이렇게 되물으셨다.

"부모가 자식을 때리지도 못하니?"

"부모가 자식한테 욕도 못하냐?"

부모님은 셀프라이선싱을 하고 계셨다. 부모라는 어려운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므로 힘이 들어지면 욕을 해도 되고 화가 나면 폭력을 써도 되는 절대자로서의 자격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있었다. 게다가 우리말엔 부모의 셀프라이선싱을 뒷받침할 표현이 무궁무진했다. '신체발부는 수지부모'이므로 자녀의 육체는 부모의 소유로서 마음대로 때려도 되었고, 그것은 '사랑의 매'로 미화되었으며,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하늘 그보다도 높은 것'이므로 쉬이 비판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부모를 욕하는 것은 하늘을 욕하는 것, 즉 신성모독과도 같았다.


오랜 시간이 흘러 부모가 되고 보니 부모는 하늘도 아니고 신도 아니고 그저 '인간'일 뿐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꽤 괜찮은 인간도 있는 반면 영 별로인 인간도 있다. 별로인 부모들은 힘이 들고 화가 나면 만만한 자식에게 자기 감정을 쓰레기처럼 투척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부모가 투척한 쓰레기를 받아들면서 그것이 쓰레기인 줄을 모른다. 사랑하는 부모이니까. 삶의 모델인 부모이니까. 게다가 어떤 문화권에선 부모가 하늘보다 높다고 가르치니까. 하늘 같은 권위를 부모가 스스로 내세우니까.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가 설마 쓰레기를 주었으리라곤 상상조차 못한다.


나는 그 쓰레기들을 여태껏 간직했으나 쓰레기를 버린 이들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어쩌면 기억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건 쓰레기였고 그들은 그걸 이미 내다버렸으니까.


by Jin


ㅣ은혜가 아니라 일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만난 한국인 중에 개구쟁이 4세 아들을 둔 엄마가 있었다. 한 번은 그녀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는 어린이집이 끝날 때마다 선생님께서 우리 아이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며 하루간 곤란했던 일들을 어찌나 늘어놓으시던지. 그런데 이곳 선생님들은 그런 말씀을 안 하세요. 힘들었든 어땠든 자기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나봐요."


당시 내 아이는 세 돌이 갓 지나 있었는데 한국에서도 전혀 해본 적 없는 기관 생활을 난생 처음 시작한 데다 영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하여 매일이 눈물바람이었다. 그런 아이를 적응시키기 위해 세 명의 담임 선생님께서 세심한 노력을 하셨다. 여러 가지 그림을 미리 인쇄해 놓곤 아이에게 보여주며 대화를 시도하셨고, 아이가 좋아하는 활동이 무엇인지 내게 확인한 후 그 활동으로 수업을 꾸미셨다. 아이가 영어에 적응한 후에는 모국어인 한국어 또한 중요하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교실 안 물건들에 한글과 영어를 병기하여 이름표를 붙여 놓으셨다. 그럴 때마다 내가 감사를 전하면 이렇게 답하셨다.

"That's our job(그게 우리 일인 걸요)."


by Jin


그들이 '일'을 하는 방식을 보며 나는 역시 교사였던 내 부모님을 떠올렸다.

"애들한테 잘해줄 필요 없어. 고마운 줄도 모르는데."

"요즘 애들이 얼마나 모자라고 싸가지 없는 줄 아니?"

"애들 이름? 애들 이름을 뭐하러 외워, 번호 부르면 되지."

그때는 부모님의 말씀이 맞는 줄 알았다. 스승의 은혜 역시 부모의 은혜와 마찬가지로 하늘보다 높으므로 이를 마땅히 존경하지 않는 학생들에 대해 교사들은 잘해주지 않을 '자격'이 있다고 여겼다. 학생들이 모자라면 모자라다고 흉을 보고 이름을 외우기 싫으면 번호를 부를 '자격' 또한 있다고 여겼다. 그렇게 셀프라이선싱을 해도 되는 줄로만 알았다.


이제 엄마가 된 지금, 내게 자격이란 어른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있다. 아이들은 똑똑하든 모자라든, 싸가지가 있든 없든 어른에게서 이름을 불리우고 사랑과 배려를 받을 자격과 권리가 있다. 아이들의 권리를 충족하는 것은 어른의 의무이고 '일'이다. 애시당초 교사란 직업은 학생에게 고마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학생'을' 위하여 존재한다. 그런데 교사가 아이들을 배려하기 싫고 이름도 외우기 싫다면 그건 그냥 일을 하기 싫다는 뜻이다. 나의 부모님은 일을 하기 싫어 내키는 만큼만 하셨다. 아이들을 인내하기 싫으니 내키는 대로 욕설을 내뱉으셨고, 이름을 외우기 귀찮으니 내키는 대로 번호를 부르셨으며, 모자란 아이가 답답하여 내키는 대로 흉을 보셨다. 그렇게 내키는 만큼 미니멈으로 일하면서 보상은 '월급 + 감사와 존경'이라는 맥시멈의 형태로 받고자 하셨다.


부모로서의 일도 마찬가지셨다. 내키면 "딸이 최고"라고 추켜세우셨으나 내키지 않으면 "역시 딸년은 필요가 없다"고 비하하셨고, 병치레에 때로는 극진히 간호하셨으나 때로는 욕설을 해가며 역정을 내셨다. 학교 성적이 좋으면 칭찬을 하시다가도 성적이 하락하면 "병신"이라 다그치셨다. 식사를 차릴 때엔 "집구석에만 오면 짜증이 난다"고 신경질을 내셨으며, 그렇게 차려준 밥을 맛있게 먹지 못하면 "밥맛 떨어지게 한다"고 눈을 흘기셨다.


정신분석가 마가렛 말러(Margaret Mahler)의 분리개별화 이론에 따르면 아이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엄마의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을 연합시켜 하나의 온전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엄마의 나쁜 측면보다 좋은 측면을 상대적으로 많이 경험하여 엄마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한 아이들은 엄마에게 간헐적인 불만족을 느끼더라도 엄마에 대한 애착을 놓지 못한다. 이렇게 부모에 대한 사랑을 유지하는 능력을 '대상항상성'이라고 한다. 반면 그런 능력을 기르지 못한 아이들은 좋은 기억이 있더라도 나쁜 기억 밑으로 자꾸만 매립된다. 


어느 밤 침대에서 나의 토사물을 세숫대야로 받아내던 어머니의 안타까운 표정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 기억은 구토감에 저녁을 제대로 먹지 못하자 "밥맛 떨어지게 한다"며 쏘아보던 어머니의 날카로운 눈빛, 두통을 호소하자 "머리 아플 일을 네가 만들었기 때문"이라며 돌아서던 싸늘한 뒷모습, 당신의 체벌로 생긴 멍자욱 위에 연고를 발라주며 "넌 더 맞아야 한다"고 말하던 스산한 목소리에, 아무리 좋은 기억일지라도 영 맥을 못 춘 채로 온기를 잃고 만다. 내킬 때에만 준 사랑, 셀프라이선싱 늪에 빠진 사랑은 이렇게나 힘이 없다.


부모님은 나의 이런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신다. 당신들의 사랑은 하늘보다도 높은 '은혜'였으므로 내킬 때에만 은혜를 베풀었던들 은혜에 감사 받고 보답 받을 '자격'이 있었고, 나는 당신들의 시혜를 받은 존재로서 조건부 사랑에 불평할 자격이 없었다. 아마도 부모님은 나와의 대화가 끝나고 이런 말을 나누셨는지도 모르겠다.

"자식한테 잘해줘봐야 소용 없네."


소용을 바라는 사랑을 거래다. 조건을 제시하고 이행을 요구하고 보상을 바라면서 종국에는 쌍방을 옭아매다 셀프라이선싱의 늪에서 익사한다. 나는 아이에게 잘해주는 것이 그저 나의 '일'이라 믿는다. 물론 나는 미니멈으로 일하면서 맥시멈으로 보상 받을 만큼 뛰어난 능력이 없으므로 어제보다 나은 엄마로 성장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한 보상이다. 매일 아침 나는 비몽사몽 간에 아이의 온라인 수업을 도와주고, 아이가 수학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설명을 한다. 아이가 아프면 밤잠을 설치며 간호하고, 아이가 투정을 부리면 투정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아이가 기쁘면 함께 기뻐하고, 아이가 슬프면 함께 슬퍼한다. 아이에게 꾸중을 하면서도 자꾸만 안아주고, 그러면서 아이를 조금씩 알아간다.


소용도 감사도 보답도 없어도 된다. 나는 시혜라든가 희생이 아니라 맡은 바 을 하고 있을 뿐이다. 어떤 때는 즐겁고 어떤 때는 힘들다. 힘들어도 아이 탓이 아니다. 힘든 것은 본디 모든 '일'의 속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일이란 내키지 않아도 노력해야 하고, 원치 않아도 문제가 생기며, 해결되지 않아도 견뎌야 한다. 행복은 그 과정의 순간 순간에서 반짝인다. 나는 찰나에서 반짝임을 찾고 이내 행복해진다. 충분히 행복해진다.


덧.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업고 범람하는 강을 건너고 있었다. "내가 자라면요," 아이가 말했다. "아빠가 제게 해주시듯 아빠를 업고 이 강을 건널 거예요." "아니," 아버지가 덤덤하게 답했다. "어른이 되면 너만의 책임이 생긴단다. 아빠는 훗날 네가 아빠처럼 네 아이를 업고 강을 건너길 바랄 뿐이야."
― 그렉 엡스타인(Greg Epstein), <신이 없는 선(Good Without God: What a Billion Nonreligious People Do Beli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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