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잊지 않으려는 이유(1)
옛날 일을 떠올려서 무엇하느냐고 사람들이 내게 말한다. 나쁜 기억은 깨끗이 잊어 버리라고. 하지만,
"부모는 누구나 자식에게 상처를 준다. 어쩔 수가 없다. 어린 시절에는 어떤 아이든 깨끗한 유리 같아서 보살피는 사람의 손자국을 흡수하게 마련이다. 어떤 부모는 유년기의 유리에 손자국을 내고, 어떤 부모는 금이 가게 만든다. 그중 몇몇은 유년기를 완전히 산산조각 내어 되맞출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 미치 앨봄(Mitch Albom),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The Five People You Meet in Heaven)>
나쁜 기억을 잊는대도 내겐 내 부모님의 손자국이 남아 있다. 그 손자국을 기억하고 주의하지 않으면 나는 손자국대로 말하고 행동한다.
아이가 학교에 지각했을 때, 내 머릿속에서는 부모님께서 손자국으로 남기신 말들이 휘몰아쳤다.
그러게 서둘렀어야지!
네가 늦장 부려 놓고 울긴 왜 울어!
앞으로 엄마 말 들을 거야, 안 들을 거야!
아이가 질문이 많을 때에도, 내 머릿속에서는 부모님께서 손자국으로 남기신 말들이 휘몰아쳤다.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거 참, 꽤 못 알아 먹네.
이러니 제 자식은 제가 못 가르친다지.
머릿속에 휘몰아치는 말들을 결국 내뱉지 않은 이유는 나쁜 기억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날선 언어를 듣고 자라며 유년의 내가 느낀 감정, 그 감정에도 불구하고 그 언어를 내면에 흡수했다는 사실, 그렇게 흡수된 언어가 오랫동안 내게 해로웠다는 사실, 그러므로 타인에게, 자식에게 그런 언어를 함부로 쏟아부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 그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잊든, 잊지 않든 부모님의 손자국은 언제나 내 안에 있다. 미국에 이사 와 짐 정리를 하느라 피곤했던 날엔 나도 모르게 아이의 어깨를 밀었고, 다음날 아이가 당연한 질문을 거푸 반복했을 땐 손바닥으로 아이의 뺨을 툭 때렸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부모님의 손자국대로 행동해 놓고 뒤늦은 후회를 한다.
그러므로 옛 기억을 잊지 않으련다. 마음 편히 잊거나, 잊지 않더라도 잠시 방심하는 순간, 나는 내가 아니라 부모님의 손자국이 되어 버리니까.
"네 기억은 틀렸어. 난 네게 그런 적이 없다."
"그런 적이 있다 해도 이제 와서 어쩌자는 거니?"
"사소한 옛날 기억에 집착이 심하구나."
라고 부모님께서 말씀하셔도 나는 손자국을 잊지 않으련다.
어젯밤 아이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책을 읽고는 울었다. 천천히 읽고 싶었는데 시간이 늦어 빨리 읽고 말았다고.
빨리 읽으라고 누가 시키기라도 했니? 네가 빨리 읽어 놓고 어쩌자는 거야!
그게 무슨 대수라고 질질 짜고 난리야!
시끄러워, 얼른 잠이나 자!
라고 손자국대로 다그치지 않았다.
"너도 책을 천천히 읽는 게 좋아? 엄마도 천천히 읽는 게 좋아. 앞으로 자기 전에도 천천히 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그러다 시간이 더 늦어진 건 안 비밀).
사소한 기억이 차곡차곡 쌓여 관계의 주춧돌이 된다. 이번에도 손자국대로 행동하지 않은 나를 칭찬하며 마음의 크기를 일 센치 늘린다.
과거를 잊지 않으려는 이유(2): https://brunch.co.kr/@jin84/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