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아싸, 오늘은 대리님이 삼계탕을 사주신단다. 우리 회사의 점심시간은 12시 20분부터, 하지만 12시 15분부터 이미 마음이 붕떠있었다. 19분. 슬슬 회사용 슬리퍼를 갈아 신는다. 20분. 땡! 대리님들과 함께 회사 엘리베이터로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 꾸물거렸다간 여러 번의 엘리베이터를 보내야 할 수도 있다. 다행히 우리는 첫 번째로 엘리베이터를 탔고 회사 옆 옆 건물의 삼계탕집으로 향했다.
오후 2시, 본부장님의 호출이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들을 돌려서 말했지만 결론은 꾸중이었다. 어쩐지 점심시간부터 운수가 좋더니만.. 회사에서 상사에게 꾸중을 듣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었지만 그날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지지가 않았다. 착잡한 마음에 회사 야외정원으로 향했다. 10분만 바람 쐬고 가야지.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는 걸까', '내가 이렇게나 초라한 사람이었나' 본부장님의 꾸중으로 나는 작아질 대로 작아져있었다. 날씨는 또 왜 이렇게 좋은 거야. 내 기분과는 반대로 날씨는 좋다 못해 반짝거렸다. 우울한 기분을 잊으려 괜히 핸드폰으로 카톡도 확인하고 이것저것 가십뉴스들을 보다가 이번 주 주말 날씨를 검색했다. 주말 날씨 매우 좋음. 주말 날씨를 확인하고 불현듯 여행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의 기분이 꿀꿀하고 알 수 없는 화가 내 안에 있는데 여행을 가면 이 화가 풀어질 것 같았다. 아니 당장 내일모레 여행을 간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은 기분으로 내 자리에 복귀해 업무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딜 갈까 고민하다 문득 파란 바다가 보고 싶었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이면서도 맑고 파란 바다를 볼 수 있는 곳... 강원도! 그렇게 주말 여행지를 강원도로 정하고 평소에 너무 방문해보고 싶었던 게스트하우스에 연락을 했다. 사실 이 게스트하우스 예약을 실패한 경험이 매우 많았다. 심지어 여행일 2주 전에 연락했음에도 예약실패를 한 경험이 있었다. 내 눈에 근사해 보이면 남의 눈에도 근사해 보이나 보다. 이 게스트하우스는 그 지역에서 나름 핫플레이스였다. 오늘은 목요일. 당장 내일모레 일자로 예약을 하는 것인데.. 당연히 없겠지? 이미 반 포기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초조한 마음 반, 기대감 반으로 전화를 걸었다. 조심스레 이번 주 토요일 여자 한 명 예약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당연히 예약이 불가하겠지란 예상과 다르게 딱 여자 한 명 예약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혹시 알고 전화 주셨냐고 물으셨다. 좀 전에 어떤 여성분이 이번 주 토요일 예약을 취소했는데 그분이 취소한 다음 바로 내 전화를 받으신 거라고 했다. 이런 신기한 우연이! 나는 행여나 자리를 놓칠세라 서둘러 예약을 했다.
드디어 토요일 아침이 밝았다. 주말이었지만 여행을 위해 평소 기상시간에 일어났다. 눈이 떠지지 않았다. 전날 회식 때 마신 술이 아직 덜 깬 것 같기도 했다. 대충 여행 짐을 꾸리고 '오전 9시에 버스 예약한 과거의 나, 스튜핏'을 외치며 동서울버스터미널로 향했다. 그렇게 부족한 잠을 버스에서 채우고 마침내 강원도에 도착했다. 내리자마자 곧바로 바다로 향했고 내 눈 앞의 바다는 푸르다 못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혼자 여행을 마치고 꼭 방문해보고 싶었던 그 게하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게하에서의 아침이 밝았고 조식으로 토스트를 먹으며 게스트하우스 사장님과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사장님의 현실적이면서도 따뜻한 화법 덕분이었을까, 내 속에 미처 내가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까지 사장님 앞에 허심탄회하게 쏟아내었고 내가 오랜 시간 고민해오던 퇴사문제 역시 함께 고민해주시고 촌철살인의 조언도 해주셨다. 그리고 대화가 마무리될 때쯤, 만약 퇴사를 하게 된다면 퇴사 후 잠깐 게스트하우스 스텝으로 일해보는 건 어떻겠는지 제안도 해주셨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기에 일단은 생각해보겠노라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한 달 후, 나는 그 게스트하우스에 다시 방문을 하게 되었다.
이번엔 게스트가 아닌 스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