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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디락스 May 05. 2021

말하는 사자가 나타났다.


하루에 두 번 자퇴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침 6시 반쯤 일어나서 7시 10분까지 엄마 차를 타고 등교를 했는데 자퇴하고 싶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이내 삼켰다. 정규 수업이 끝나면 저녁밥을 먹고 야간 자율학습을 했다. 매에 매에 양 떼를 몰듯이 우리를 큰 도서관으로 몰아넣었다. 이때 한번 더 자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3년을 꾹 참고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냈다. 매점에서 파는 치즈 라면이 맛있었던 이유가 가장 컸다. 그리고 양떼몰이를 하는 길목에 조그마한 도서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2학년 후배가 도서관을 지키고 있었는데, 숏커트 머리에 두꺼운 안경은 쓰고 항상 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도 나와도 아는 채를 안 하는 게 가장 좋았다. 

모두가 양떼몰이를 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은 '심화반'이라는 명목으로 따로 수업을 했다. 모의고사를 보고 나면 분기별로 심화반 명단을 복도에 붙였다. 심화반 명단이 복도에 붙는 날이면 아이들이 모두 달려 나와 누구누구 이름이 올랐나 확인했다. 우는 친구도 있었고 웃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어차피 이름이 없을 것이니 확인하지도 않았다. 포기하면 편하다. 

나를 제외한 친한 친구 4명은 모두 심화반이었다. 친구들이 모두 심화반 수업을 가고 나면 나는 몰래 도서관으로 가곤 했다. 공부를 잘하지도 않았지만 말썽을 부리지도 않았기 때문에 선생님 관심 밖에 학생이었다. 다섯 명이 걸어가고 있으면 선생님은 내 이름만 기억하지 못했다.

무려 재수까지 하고 지방대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했다. 자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에 17번 정도 했다. 학생회도 들어보고 학과 생활도 해보려고 했지만 항상 겉돈다는 느낌이었다. 고등학생 때는 학교 교육방식이 나와 안 맞는다고 생각하고 버텼지만 대학도 적응을 못하자 스스로가 사회 부적응자가 아닌가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래도 꾸역꾸역 4년제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교수식당에 어마어마하게 크고 맛있는 왕돈가스를 팔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4층짜리 어마어마하게 큰 도서관이 있어서 버텼다. 

2층 중앙에는 큰 테이블이 있었는데 진한 갈색의 원목 책상과 의자였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도 좋았다. 지붕이 반투명으로 되어있어서 볕이 잘 들어왔다. 비 오는 날은 빗방울이 천장에 부딪치면서 커다란 도서관에 타타타타 울렸다. 그 소리가 참 좋아서 비가 오는 날이면 수업이 없어도 도서관으로 향했다. 100번대 철학 책이 있는 제일 구석자리와  400번대 원예, 육아, 인테리어 책이 있는 장소가 제일 좋았다. 반나절을 있어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김점선의 <점선뎐>은 '괜찮아 너만 그런 게 아니야."라고 말해주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다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해주었다. 백과사전처럼 두껍고 새까만 책이 나에게는 가장 따뜻하고 다정하게 느껴졌다. 장영희 <내 생에 단 한번>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을 읽으면서 나도 살아갈 이유를 찾았다.

책 자체가 좋았다기보다는 초라해지지 않으려고 어쩔 수 없이 책을 읽었다. 친한 친구들을 모두 심화반으로 보내고 덩그러니 남은 나는 책이라도 읽어야만 했다. 교수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느니 '책 읽느라 식사 시간을 깜빡 놓친 셈' 치는 것이 더 나았다.




"사자가 말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비트켄슈타인 <철학적 탐구>




사자가 '언어'를 배워서 말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사자와 대화를 나눌 수는 없다. 의사소통을 할 수는 없다. 사자와 나의 '머릿속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언어는 머릿속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말하는 사자를 만났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말하는 사자였을 것이다.

6세 아들에게 중국어도 영어도 가르치지 않는다.
그저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사람과 사람 사이 이해와 소통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언어가 아닌 '공통점'이라는 것을 안다. 초라해지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시작한 독서였지만, 책을 읽고 다양한 생각을 알게 되고, 다양한 사람을 이해하게 되었다. 세상 모든 일은 잘 알고 나면 모두 이해하게 된다.

아들이 심화반에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다. 명문대학에 보내고 싶은 욕심도 없다. 다만 친구들을 모두 심화반에 보내고 덩그러니 남겨져서 도서관으로 숨는 친구를 보면, 같이 밥 먹을 친구가 없어서 두리번거리는 친구를 보면 먼저 다정하게 말을 거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더는 바랄 게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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