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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디락스 Mar 22. 2022

신내림

동네 예쁜 아줌마가 지하철역 중심가에 미용실을 소개해 주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직원들이 일제히 큰소리로 인사했다. 예약하면서 내 전화번호를 남기지만 않았다면 다시 돌아나가고 싶었다. 가운을 입고 거울 앞에 앉았는데 내 신발이 너무 더러워 보였다. 나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 것 같았다. 남자 선생님이 머리를 만지면서 자꾸 말을 걸었다. 말 안 하면 아이 둘 엄마 같아 보이지 않는다고까지는 좋았는데 20대 같다는 무리수를 던지셨다. 평소에는 파 하하하 하고 아줌마처럼 웃는데, 그때는 호호호 하고 수줍게 웃었다. 머리는 마음에 들었다. 40만 원짜리 파마하면 머리에 향수를 뿌려주나 보다. 며칠 동안 머리에서 꽃향기가 난다.


결국은 또 엣지헤어에 가게 된다. 자주 가는 동네 미용실이다. 원장님이 세련되지도 않았고, 인테리어가 화려하지도 않다. 그래도 매번 그곳에 가는 이유는 사장님이 말을 걸지 않기 때문이다. 에센스나 샴푸를 사라고 권하지도 않는다. 뿌리염색을 하러 갔다. 사장님은 찡긋 웃더니 염색약을 섞어오셨다.


염색하는 동안 티브이를 봤다. 거울에 비친 티브이를 옆눈으로 보고 있으니 원장님이 의자를 살짝 옆으로 비틀어 주셨다. 티브이에 신내림을 받은 젊은 여자 보살이 나왔다.


30살이 될까 말까 한 예쁜 여자는 피겨스케이팅 선수였다고 한다. 보살의 엄마는 음식을 하고 있었다. 피겨스케이팅 하는 딸을 뒷바라지하던 엄마는 이제 사당에 음식을 놓으며 딸을 돕고 있었다. 엄마는 울면서 음식을 하고 있었다. 원래는 자신이 신내림을 받아야 하는데 누름굿을 하며 운명에 거슬러 살다 보니 딸이 이렇게 되었다며 울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신만의 숙제를 가지고 태어나나 보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경험해 내야 할 과제가 있나 보다. 신부님의 말씀처럼 모두 ‘자신만의 십자가’가 있나 보다. 그리고 내가 오롯이 경험해 내야 할 과제들을 미루면 다른 누군가가 나의 숙제를 대신해주어야 하나 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의 누군가가 나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나 보다.


부모님을 원망했던 적도 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면 가시로 콕콕 찌르듯 마음이 아팠다. 나에게 이런 상처를 준 것이 부모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상처가 부모님이 나에게 준 것이 아닌 그저 나의 몫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오명자 강익선과 부모·자식의 인연을 맺게 된 것도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재미난 생각도 하게 되었다. 나는 부모의 싸움을 보며 그 경험을 오롯이 해냈다. 많은 상처를 받았지만 그래도 절름발이가 되지는 않았다. 힘들었던 적도 있지만, 그런대로 내 몫을 하면서 잘 살아간다.


나는 부모의 싸움을 경험해 냈다. 그리고 아이들 앞에서 결코 부부가 싸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신내림을 받았으니, 우리 아이들은 더 이상 고통받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괜찮다. 다 괜찮다. 아이들 대신 내가 경험한 것으로 생각하면 다 괜찮다. 오히려 감사하다.


샴푸를 하는데 눈물이 주룩주룩 났다. 원장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샴푸 하다가 튀긴 물기를 닦는 척하면서 눈물도 닦아주셨다. 두 달 뒤에 뿌리염색 할 때도 또 여기 올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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