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는 8남매다. 시모고가 세분 있으시고, 큰 아버님, 셋 아버님, 그리고 작은 아버님이 두 분 계신다. 처음 결혼하고 1년이 되도록 나는 작은아버님 두 분의 얼굴을 구별하지 못했다. 설날에 뵙고 인사를 드리고 추석에 뵐 때쯤이면 까맣게 얼굴이 기억나지 안 났다. 큰 아버님과 큰 어머님, 셋 어머님과 셋 아버님, 작은 아버님과 작은 어머님을 짝꿍으로 매칭하는데도 꽤 애를 먹었다.
결혼하고 일 년. 매번 물어보는 것도 실례가 될 때쯤 나는 종이를 펼쳐놓고 가족 관계도를 그려서 냉장고에 붙였다. 큰아버님 ♥ 큰어머님 사이에 줄을 쭉 그려 넣어 사촌 아주버님 두 분의 이름을 적고, 셋 아버님 셋 어머님 사이에 아가씨와 아주버님의 이름을, 작은아버님 작은어머님 사이에도 같은 방법으로 관계도를 완성했다. 돌림자를 써서 듣고 들어도 헷갈리던 사촌 아주머님들의 이름도 완벽하게 정리되었다. 작은 아버님(1) 얼굴에는 큰 점을 그리고, 작은 아버님(2)는 안경 낀 얼굴을 그려 넣어 관계도를 완성했다. 집안 행사가 있는 날이면 냉장고 앞에 서서 가족 관계도를 한참 중얼중얼 되뇌고 출발했다.
8남매 중에 가장 큰 어른은 큰고모다. 어린 시절 엄마를 도와 어린 동생들을 돌보던 이야기를 자주 했다. 문제는 나머지 두 분의 고모다. 두 고모가 8남매 중 몇 번째인지 남편도 모른다. 어머님께 넌지시 물어봐도 어머님도 이랬다저랬다 잘 모르시는 것 같다. 완벽한 관계도를 만들고 싶었지만 결국 * 표시와 함께 고모 세 분을 따로 정리해 두었다.
큰고모, 작은고모(1), 작은고모(2)로 정리해 두었다. 작은 고모(1)를 모두가 김포 고모라고 부르는 사실을 알고 검은 볼펜으로 직직 그어서 김포 고모라고 다시 적어 넣었다. 김포 고모는 결혼을 하고 김포에서 사는 고모다. 8남매 중에 몇 번째인지는 모르지만 정확한 사실은 우리 아버님보다 동생이라는 것이다. 김포 고모가 시아버지에게 ’오빠’라고 부른다.
김포 고모와 아버님은 유독 사이가 좋다. 고모와 아버님은 어린 시절 기억을 많이 공유하고 있다. 김포 고모는 돈이 필요할 때면 셋째 오빠에게 자주 용돈을 타다 썼다. 셋째 오빠는 여동생이 만든 무침 요리와 전 요리가 유독 입맛에 잘 맞았다고 했다. 김포 고모는 자신의 조카, 나의 남편도 아꼈다. “아이고 우리 조카. 팔뚝만 해 나신디이.” 하며 볼 때마다 활짝 웃었다. 팔뚝만 하던 조카가 어느새 커서 결혼을 한다고 데리고 온 조카며느리도 다정하게 대해 주셨다.
김포 고모가 집을 샀다. 집들이 겸 어머님과 아버님은 비행기를 타고 고모네 집에 왔다. 경기도에 사는 우리도 같이 모이게 되었다. 고모 댁에 현관을 열기도 전에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 하루 전부터 준비하신 게 틀림없었다. 고모는 맛있는 음식을 한 상 차려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아파트 복도에서부터 맛난 냄새를 풍기던 음식은 갈비탕이었다. 좋은 갈비를 사서 어제저녁부터 찬물에 피를 뺐을 것이다. 핏물을 여러 번 갈고, 뜨거운 물에 갈비를 데쳐서 손으로 기름을 하나하나 제거해서 몇 시간은 푹 끓였을 것이다. 갈비는 젓가락을 갖다 대기만 해도 살이 부스스 떨어질 만큼 잘 고아졌다.
빨갛게 무쳐진 냉이 무침이 환상적이었다. 첫맛은 달달한데 입에 들어가면 매콤한 맛이 났다. 기름진 음식을 한입 먹고 냉이 무침을 한입 먹으면 음식이 계속 들어갔다. 손이 많이 가는 잡채에, 불고기까지 있었다. 음식은 하나같이 다 맛있었다. 고급스러운 음식들 사이에 덩그러니 놓인 냉동 동그랑땡이 이 식탁에서 조금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이내 이해하게 되었다. 남편이 동그랑땡 한 접시를 다 먹었다. 사랑하는 조카가 좋아하는 음식을 김포 고모는 잘 알고 있었다.음식을 먹고, 깔깔깔 이야기도 나누고, 모두 배를 두드리고 있는데 어머님이 내 옆구리를 찔렀다.
“이제 치워 불게.” (이제 설거지하자)
냉이 무침 접시가 빌 때마다 부엌 식탁에서 리필을 해서 실어 나른 건 나였다. 내 밥이 1/3공기나 남았었다. 나는 잡채를 좋아하는데 잡채가 너무 멀리 있어서 맛도 못 봤다. 빈 그릇들을 모았다. 남은 내 밥 1/3공기는 음식물 쓰레기가 되었다. 그릇이 산더미다. 갈비탕을 담았던 그릇들은 미끌미끌해서 잘 씻기지도 않았다. 30분 동안 밥을 먹고 한 시간 동안 설거지했다.
거실에서 가족들이 과거에 즐거운 기억을 회상하며 깔깔 웃는다. 나는 이내 외로워지고 말았다. 문득 오늘 이 많은 반찬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반찬‘은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내가 좋아하는 반찬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나도 좋아하는 반찬‘만 가득한 진수성찬을 먹었다.
상처를 준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내가 상처를 받는 꼴이 웃겨서 괜찮은 척 씩씩하게 설거지를 끝냈다. “요즘 나온 싱크대라 크고 설거지하기도 편하네요.” 이 말을 하며 웃은 점은 집에 오며 후회했다. 종일 온몸에서 자몽 향 퐁퐁 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