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 나이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를 마주치면 나는 습관적으로 신발을 본다. 스케쳐스 고워크 신발을 신은 할머니들은 대부분 딸이 있다. 딸이 선물해준 편하고 가벼운 신발을 신고 사뿐사뿐 걸어 다닌다. 스케쳐스 고워크 신발은 편하고 가볍다. 디자인도 무난해서 30대 임산부도, 40대 직장인도, 60대 할머니도 좋아한다. 우리 엄마는 홈쇼핑에 홀려서 이름 모를 누구누구 디자이너의 운동화를 주문한다. 특가로 사서 좋다고 팔짝 뛰다가 며칠 뒤면 발이 불편하다느니, 조금만 걸어도 발이 무겁다느니 징징거린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엄마한테 스케쳐스 신발을 사주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엄마도 나에게 금반지를 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정말 심심했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동생 방 오래된 책꽂이에 제일 위에 놓은 옛날 앨범을 모두 꺼냈다. 먼지가 가득 쌓여있었다. 어떤 앨범은 너무 낡아서 사진 낱장이 좌르르 떨어져 버렸다. 첫 번째 앨범은 아빠 군대에 있을 때 사진이었다. 이 사진첩은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아빠의 앨범이 재미없는 이유는 아빠가 싫어서가 아니다. 아빠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운전도 못 하면서 군대 탱크 위에 앉아서 폼을 잡은 모습이나. 쏘지도 못할 장총을 들고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은 모습이 그렇다. 게다가 앨범을 펼치자마자 커다랗고 다리가 긴 거미 한 마리가 나와서 앨범 위를 기어 다녔다. 그대로 덮어버렸다.
두 번째 앨범은 엄마 젊은 시절 사진이었다. 엄마는 예쁘긴 한데 독이 오른 얼굴이다. 누군가 그랬다. 관상은 과학이라고. 우리 엄마가 지금 태어났으면 아마 대단한 래퍼나 힙합퍼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치타가 아무리 아이라이너를 두 세줄 그리고 체킷업 해봐도 우리 엄마 앞에서는 깨갱 기가 죽을 것이다. 우리 엄마 앞에선 윤미래도 가사를 절다가 울면서 무대에서 내려오겠지. MC명자는 음악을 잘하는 건 아니지만 그냥 인상이 랩을 하는 여자처럼 보였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엄마가 네잎크로버를 코팅해서 앨범 사이에 꽂아 놓았다는 점이다. 우리 엄마가 풀밭에서 작은 네잎크로버를 찾는 모습이나. 찾아서 수줍게 좋아하는 모습이나, 작은 네잎크로바를 소중하게 들고 코팅하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20대 소녀 오명자를 상상하는 일은 언제나 재미있다.
세 번째 앨범부터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오늘 꼭 찾아야 할 사진이 있었다. 반드시 나의 돌잔치 사진을 찾을 것이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집을 짓기 전에 우리 가족은 흙집에 살았다. 벌레가 유난히 많았던 집이었다. 닭백숙을 먹은 날이면 엄마는 서둘러서 닭 뼈를 모아 버렸다. 닭 뼈를 그냥 두면 어디선가 지네가 기어들어 왔다. 지네, 개미, 장수풍뎅이. 매미까지. 집에 곤충이 많아서 좋았다. 다만 우리 삼 남매는 어릴 적에 피부병을 달고 살았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그 흙집 거실에 언니 돌상이 차려져 있었다. 언니의 돌잔치 상은 조촐했다. 나는 수첩을 꺼내서 언니 돌잔치 상에 올려진 음식들을 적어 내려갔다. 무지개떡, 바나나, 귤, 미역국, 쌀밥. 그리고 고기반찬이 큰 그릇이 담아져 있었는데 돼지갈비인지 소갈비인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기볶음 (소고기 or 돼지고기)라고 메모해 두었다.
남동생 돌잔치 사진을 보자마자 나는 탄성을 질렀다.
“얼씨구”
일단 음식을 올린 돌상부터가 언니와 달랐다. 자개 무늬가 가득 수놓아진 나전칠기 상이었다. 압권은 돼지머리였다. 돼지머리가 놓여 있고 돼지 콧구멍과 귓구멍과 입에 만 원짜리 지폐가 가득 꽂혀있었다. 이제 막 한 살이 된 동생은 하얀 셔츠에 멜빵바지를 입고 있었다. 눈물 콧물이 범벅 돼서 울고 있었는데 마치 이웃에 사는 부잣집 아이를 납치해서 앉혀놓은 것 같았다. 집은 흙집인데 아이만 깨끗하게 씻기고 입혀 놓으니 합성한 사진 같았다.
메모장을 꺼내서 한 장 넘겼다. <강동휘 돌잔치 상 음식 리스트>를 적었다. 소고기미역국, 쌀밥, 무지개떡, 사과, 배, 바나나, 포도, 생선튀김, 고기 산적, 돼지머리까지 빠짐없이 적었다. 비고: 나전칠기 상 위에 차려줬음. 손님들 초대한 흔적이 있음.이라고 메모했다.
아무리 뒤져봐도 내 돌잔치 사진이 없다. 내 어릴 적 사진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은 동생이 주인공이었다. 아이스크림 입에 마구 묻히며 먹는 동생 뒤로 내가 언뜻 나온 사진이나. 언니가 목욕하고 있으면 아웃포커싱 된 내가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혹시 나는 어릴 때 입양한 아이는 아닐까? 하는 의문이 잠깐 들었지만, 언니와 내가 얼굴이 닮았기에 곧 의심을 거두었다. 그냥 나는 이 집의 엑스트라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날 나는 엄마에게 울며 따졌다.
“왜 나만 돌잔치 안 해줬냐고!!!”
이때 내 나이가 24살이었다.
엄마는 황당해하며 웃었다. 나는 28이 될 때까지도 돌잔치를 안 해준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엄마가 나 어릴 때 귀찮아했잖아.” “아빠가 둘째도 딸 낳았다고 실망했잖아.”라고 말해봐도 엄마 아빠의 대답은 한결같았는데 “기억이 안 난다.” 혹은 “너는 왜 그런 것만 기억하냐”이라는 대답이었다. 그래서 나는 증거가 확실한 돌잔치에 집착했다.나는 지랄병이 도져서 끝까지 따지고 들었다. 엄마는 내 말에 발뺌해보았다가, 나중에는 짜증도 내보았다가 성질도 내보았다가 결국 인정했다.
“어게. 니는 돈어성 못해주고 그냥 지나갔져. 되시냐? 다 지나가분거 어떵헐꺼니?”
(응. 너 어릴 때는 돈 없어서 돌잔치 못 해주고 그냥 지나갔어. 됐니? 다 지나가 버린 거 어쩔 건데?)
“지금이라도 차려줘. 돌잔칫상.”
결국은 엄마는 상을 차렸다. 미역국과 소불고기를 올려서 돌잔칫상을 차려줬다. 나는 미역국을 두 그릇 먹었다. 쩝쩝대며 국물을 들이켰다.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내 돌 반지는?”
엄마는 밥을 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미친년”
지난주에 스케쳐스에 운동화를 사러 갔다. 전 품목 10% 할인이라고 했다. 엄마와 딸이 같이 와서는 240 크기 고워크 5를 사고 나갔다. 나는 내 것만 사서 나왔다. 왜냐면 나는 미친년이기 때문이다. 발걸음이 가볍다. 룰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