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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디락스 May 10. 2021

넌 그냥 시집이나 가라



아빠는 내가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어영부영 지내다가 늙기 전에 결혼하기를 바랐다. 내가 대학원을 가겠다는 말에 아빠는 반대했다.


알았어. 아빠,
 이젠 내가 알아서 할게.




돈을 빌려 입학금을 내고 바로 휴학 신청을 했다. 그리고 1년 동안 돈을 벌었다. 첫 아르바이트 장소는 오설록 카페였다. 매일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어서 참 좋았다. 그만둘 때쯤에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주문을 받으면서 손의 감각만으로 아이스크림 200그램을 맞추는 능력이 생겼다. 점장님은 직원으로 일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으셨다.

한 달 월급 20만 원을 더 준다는 말에 새로 오픈한 박물관으로 이직했다. 박물관 구경을 한 시간 하고 나서 볼 게 없다며 환불해 달라는 손님이 있었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박물관이 이제야 오픈해서 사정이 어렵다며 주말에는 무급으로 일을 해달라는 말에 그만뒀다. 엄숙한 표정으로 '당분간만 박물관의 발전을 위해서 봉사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대표보다 그 말에 "네, 알겠습니다. 힙써봅시다."라고 대답하던 남자 직원이 더 신기했다.

중국어 과외를 하다가 중국어 학원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카페와 박물관의 "아가씨" 보다  '선생님'이 편했다. 그렇게 1년 동안 1500만 원을 모아서 대학원에 복학했다. 3년간 학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원을 졸업했다. 아빠의 도움 없이.




어떤 큰 사건을 마주하게 되면  '이 일이 나에게 1년 뒤, 10년 뒤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본다.


대학원을 포기하고 남편감을 찾으러 다닌다면 10년 뒤 나는 '그냥 아줌마'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무급근무를 해달라는 말에 그 길로 짐을 싸서 나왔던 이유는 '1년 뒤의 나'에게 무급 근무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박물관 표를 환불해 달라는 말에 규정대로 안된다고 말하고 30분 동안  욕을 들었다. 30분 동안 머릿속으로 '오늘 저녁에 뭐 먹지 '생각했다. 집에 가는 길에 이마트에서 순대나 사가야겠다 생각했다. 10년 뒤에 이 일을 생각하면  웃긴 에피소드일 뿐이었다.

대학원과 남편 찾기 갈림길에서 10년 뒤의 내 모습을 생각하며 대학원으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올해가 10년이 되는 해이다. 지금쯤 내가 멋진 정장을 입고 유명한 통역사가 되어 있을 줄 알았지만, 난 지금 무릎 나온 바지를 입고 있고 머리를 질끈 묶고 아이 기저귀를 갈고 있는 '그냥 아줌마'다. 니하오밖에 기억나는 게 없다. 그래도 좋다. 내가 선택한 길이다. 가끔 대학원 동기들이 멋진 정장을 입고 통역을 하고 있는 모습을 인스타에 올리면 묘한 이질감을 느끼긴 하지만.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 동성동본이라는 이유로 어른들이 결혼을 반대했지만, 10년 뒤 나의 모습을 생각하며 밀어붙였다. 아이를 낳고 10년 뒤 모습을 생각하며 아무런 고민 없이 육아를 택했다. 이것 역시 내가 선택한 길이다. 어쩌면 좋은 선택, 나쁜 선택은 없는 것 같다.  빠르고 단호한 선택이 더 의미가 있다. 나의 선택이 나쁜 선택이어도 괜찮다. 내가 선택한 길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러면 비록 나쁜 선택 속에서도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나쁜 선택은 좋은 선택이 된다.

라면을 끓일까 말까 고민하다가 1년 뒤 살이 쏙 빠진 내 모습을 생각하면서 밥과 국 간단한 반찬을 꺼내 한 끼를 먹는다. 설거지하면서 생각했다.

오늘도 나이스 초이스



그리고 가장 소중한 것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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