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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디락스 May 12. 2021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쓴 두번째 소개팅남



지혜언니가 두 번째로 소개해준 소개팅남은 민트색 레이를 몰고 나왔다. 새 차 냄새가 났다. 얼마 전에 일시불로 샀다면서 허허 웃었다. 대학원 수업이 끝나면 17나 9076 민트색 레이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아르바이트 장소까지 데려다주고 떠났다. 민트색 레이를 타고 바다를 보러 가고, 숲을 걸으러 가고, 맛집을 찾아다니고, 뷰가 좋은 카페를 갔다.

레이를 타고 결혼식장을 알아봤다. 3.04킬로의 첫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올 때도 이 차를 타고 왔다. 열이 펄펄 끊는 아이를 안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엄마를 태우고 응급실에 데려다주었다. 카시트에 첫아이를 태우고  숲을 걷고, 바다를 보러 가고, 맛집을 찾아다니고, 뷰가 좋은 카페를 갔다. 4살 된 첫아이를 처음 어린이 집으로 보내던 날, 괜찮은 척 보내고 나서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한 주책바가지 엄마를 숨겨준 고마운 차다. 3.02킬로의 둘째를 데리고 집으로 데려다준 것이 17나 9076 민트색 레이의 마지막 임무였다.

500만 원을 받고 새 주인을 찾아 주었다. 중고로 차를 팔던 날, 남편은 떠나는 우리의 지난 7년을 돌아보듯 한참을 바라보았다. 나는 베란다에서 갓난쟁이 둘째를 품에 안고 떠나는 레이 차와 그 레이 차를 바라보는 남편을 봤다.

새 차를 샀다. 지난 세월 동안 커진 우리의 사랑만 틈 더 크고, 단단하고, 믿음직한 차를 샀다. 어라운드 뷰를 제공하고, 도로의 라인을 인식해서 라인을 벗어나면 삑삑 소리가 난다. 전방 후방 센서가 있어서 차간 거리를 유지하게 도와준다. 지난 7년 동안 싸우고 화해하고  또 싸우고 화해하면서 서로의 선을 넘지 않고, 서로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하게 되었다. 항상 함께하지만 항상 같지는 않고, 가장 의지하지만 너는 내가 아니다.

20대 초반, 지독한 우울증에 몸이 늪에 빠진 것 같았다. 정신과 선생님이 "오랫동안 여행을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누가 제일 먼저 공항에 마중 나와 있을 것 같아요?"라는 질문에 한참을 울었다. 20대 초반 나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부모님께 전화를 하면 분명 나오실 테지만 묘하게 망설여졌다. 좋은 친구들이 있었지만 항상 혼자가 더 편했다. 내가 먼저 마음을 열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구원해 줄 수 없음을 이제는 안다.

아무리 길고 먼 여행을 떠난다 하더라도 이제는 두렵지 않다. 크고, 단단하고 믿음직한 차를 타고 나를 기다리면서 허허 웃고 있을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참 고마운 일이다. 고마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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