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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디락스 May 20. 2021

친구가 서울에 집을 샀다

누군가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주는 것


예은이는 자리에 앉으면 먼저 정관장 홍삼엑기스를 따뜻한 물에 타서 한잔 마셨다. 그렇게 공부를 시작하면 몇 시간이고 앉아 있었다. 독서실 옆자리였던 예은이는 공부를 잘했다. 내가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하면 언제나 예은이는 마시던 홍삼차를 내려놓고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비슷한 시간을 공부했지만 예은이는 항상 전교 1등이었고, 나는 그저 그랬다.

고등학교 3년을 보내고 나는 그저 그런 대학교를 갔고, 예은이는 서울대에 들어갔다. 부러웠던 거 같다. 그래서 예은이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지 못했다. 입으로는 '예은아'축하해라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나'는 왜 서울대에 못 가는지만 생각했다. "서울대 졸업해도 요즘에는 공무원 시험 준비한데."라는 말을 찾아다니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를 위로하기도 했다. 그렇게 예은이와 연락이 끊겼다.

고3 담임선생님은 '지금 공부하면 미래의 너의 남편감이 바뀐다'라고 말했다. 공부를 잘하면 미래의 완전한 행복으로 가는 티켓을 손에 쥔 것처럼 추켜세웠다. 하지만 '공부를 잘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라고 말하는 고려대를 졸업한 선생님은 항상 피곤해 보였다. 한숨을 자주 쉬었고, 수돗가 뒤편에 몰래 숨어서 담배를 폈다.

그저 그런 대학교에 들어간 나는 선생님의 바람대로 행복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가치가 돈, 유명해지는 것, 권력, 명예라고 믿었을 때는 행복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남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 줄 수 없었다. 돈과 권력, 명예라는 것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서울대를 가면 누군가는 지방대를 가야 한다. 누군가가 서울에 집을 사면 누군가는 변두리로 가야 한다. 남이 잘되면 나는 필연적으로 불행해 지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가치에 사랑과 평화를 놓고 나니 비로소 타인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줄 수 있게 되었다. 사랑과 평화는 유한하지 않다. 나눌수록 더 커진다.  돈과 명예, 권력의 가치를 반 계단만 내렸을 뿐이다. 한 계단도 아니고 반계단.

대학교에 들어가서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우울증의 늪에 빠졌다. 수녀님은 "너를 위해서 기도할게."라고 말했다. 감사합니다라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성당에 다니지 않았다. 지금은 안다. 결국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우울의 터널을 통과한 것은 하루에 두 번 먹던 알약이 아니라 수녀님의 기도였음을 지금은 안다.

전세를 돌던 친구가 새 집을 마련했다. 이제 태어난 지 200일 된 시호와 좋은 일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제주 언니가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 대구 친구가 야심 차게 시작한 스마트 스토어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 부산 친구가 오늘 밤은 푹 잠들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52회 졸업생 사법고시 통과'라는 현수막으로 근황을 알린, 지금은 판사가 된 예은이도 조금 덜 바쁘고 조금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 따뜻한 홍삼차를 마시면서 건강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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