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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디락스 May 29. 2021

네가 너이기 때문에



아삭아삭하고 달콤한 수박이 좋다. 더운 여름날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하고 시원한 수박을 먹는다. 언제부터일까 수박을 먹으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첫아이 첫돌이 지난여름이었으니 5년 전이다. 아이를 데리고 친정집에 갔다. 친정엄마는 오랜만에 만난 둘째 딸과 사위와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위해서 맛난 음식을 잔뜩 준비해 두셨다. 음식을 배불리 먹고 수박을 먹을 때였다.

"범준이는 아무거나 먹이지 않고 가려 먹이니까 이렇게 말랐지, 너네 때는 아무거나 막 먹여도 다 건강했다."   친정엄마의 이 한마디에 나는 폭발했다. 섭섭한 걸 넘어서 화가 난 걸 넘어서 분노를 넘어서 경멸하는 감정까지 올라왔다.

엄마는 내가 아이를 낳고 나서 한 시간도 아이들 돌봐주지 않았다. 엄마도 엄마 인생이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첫아이는 모유수유를 오래 했고 돌이 넘도록 밤에 통잠을 잔적이 없었다. 1년 만에 23kg이 빠질 만큼 힘들 때였다.

단 한 시간도 아이를 봐주지 않는 엄마가 내심 섭섭했다. 하지만 섭섭했던 진짜 이유를 생각해보면 내 아이를 봐주지 않아서가 아니다. 어린 시절 나를 귀찮아하던 그 엄마 모습이 다시 보였기 때문이다. 엄마는 항상 육아가 버거워 보였다. '너 낳고 둘째도 딸인 거 알고 아빠는 집에 그냥 갔다.'라는 말은 나에게 못이 되어 박혔다. 나에게 한 번도 소리를 지르거나 때린 적도 없지만 나는 엄마가 예전이나 지금이나 불편하다.

결국 폭발한 나는 "애 봐줄 거 아니면 신경 꺼."로 시작해서 30년이 넘은 마음 깊은 곳 분노를 모두 쏟아냈다. 결국 내 마음에 박혀있던 못을 뽑아 엄마 가슴에 꽂고는 싸움이 끝났다.
"앞으로 친정집 절대 안와, 너무 싫어"

엄마는 적잖이 놀랐다. 주변에 '애는 가만히 둬도 잘 큰다'라고 자랑하던 둘째 딸이 난생처음으로 지랄발광을 하자 엄마는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6살 3살 된 두 아들에게 수박을 잘라준다. 6살이나 된 다 큰 아이에게 수박씨를  발라서 잘게 잘라 그릇에 넣어준다. 오물오물 수박을 먹는 아이들을 보며 나는 왜 이아이들을 사랑하지? 생각해본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유가 없다. 귀엽게 생겨서가 아니다. 나중에 나를 돌봐줄 것이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유가 없다. 그냥 '너이기 때문에' 사랑한다. 너이기 때문에 항상 보고 싶고, 사랑하고, 그리고 안쓰러운 마음에 수박씨를 발라준다. 그리고 너이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에 못을 박는 것이다.

친정에서 싸우고 그 길로 짐을 싸서 시댁으로 가버렸다. 며칠 뒤 엄마가 문자를 보냈다. '강서방 진아가 많이 섭섭한가 보네, 잘 다독여줘. 내가 부족한 거 같기도 하고" 나도 지랄이 처음이었지만 엄마도 사과가 처음이었다. 엄마는 내가 아닌 사위에게 문자를 보냈다.

원래 연락을 자주 하는 모녀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 후로 더 연락을 안 하게 되었다. 친정집에서 지랄을 하고 와서 사실 후회하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엄마는 주로 사위를 통해서 나에게 연락했다.
"장모님이 한우 보냈데."

   
'전해 듣기로' 엄마가 왼쪽 눈 백내장 수술을 한다고 한다. 정관장 홍삼원액을 사서 우편으로 보낸다. 서로 가슴이 대못을 박아도 결국 네가 너이기 때문에 다시 전화기를 든다. 네가 너이기 때문에 결국엔 한우를 보내고 홍삼을 보낸다. 그리고 수박을 먹다가 마음이 불편해져서 다시 또 전화기를 든다.

언제쯤이면 마음 편하게

수박을 먹을 수 있을까.



네가 너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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