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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님이반짝 Oct 24. 2024

엄마 노릇할 기회가 사라졌다


'오늘 저녁 뭐 먹지?' 저녁 담당인 남편이 늦는다. 집에 고구마가 많아서 달걀이랑 삶아 먹을 생각이었다. 내일은 큰딸 생일이다. 딱히 준비된 건 없다. 할머니 오시면 같이 저녁이나 한 끼 먹으려고 했다. 요리할 엄두도 안 나고 시켜 먹을 요량이었다. 명색이 어미인데 아침에 미역국은 먹이고 학교에 보내려 했다. 퇴근 후 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국거리 만원 어치를 사고 집으로 왔다. 싱크대에 고기를 얹는 순간, 넓은 냄비에 국이 있다. 미역국이다. '어머니 왔다 가셨나 보네' 평소 같으면 음식을 보자마자 반가워했을 텐데 오늘은 달랐다. 왠지 모르게 어깨가 처졌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앗아간 것 같았다. 이 조차도 기회를 주지 않나 싶었다. 엄마 노릇할 기회가 사라졌다.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받는다. 바쁘신가 보다.

큰아이에게 어머니가 미역국을 끓여주려고 소고기도 사 왔다며 일부러 더 크게 말했다. 그 와중에 미역국은 안 먹겠다는 중2. 불난 집에 기름을 붓고 있다. 어디로 전개될지 예상이 안된다.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미역국 끓이려고 소고기를 사 왔다고 했다.

"어머니가 미리 해놓으시니까 제가 요리를 더 안 하게 되잖아요."라는 투정을 부렸다.

"낮에 아들한테 미역국 끓여놓고 간다고 했는데 좀 전에 알겠다고 카톡 왔더라. 맞다. 우리 며느리 미역국 맛있게 잘 끓이는데"

그렇다.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것이 미역국이다. 오래도록 뭉근하게 끓여내야 깊은 맛이 난다.




스치듯 드는 생각을 파고들었더니 진짜 서운했나?라는 의문이 든다. 어머니는 낮에 바쁘신데도 늦게 퇴근하는 며느리 생각해서 끓여놓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음식을 하려고 마음먹었다는 것을 생색내고 싶었던 거다. 행여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진짜 안 하실까 봐 마무리는 늘 잘 먹겠다는 인사는 놓치지 않았다. 설거지까지 해놓으셨다. 이번주 일, 화, 수요일을 우리 집에 들렀다. 자주 오시니 며느리의 민낯이 점점 드러나고 있다.



음식은 사랑이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먼저다. 하고 싶다고 금방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요리를 못하니 시간도 많이 걸려 점점 하기가 싫다. 그래서 마음먹었을 때 하려고 했는데 그 기회마저 주지 않아 괜히 시어머니에게 불똥이 갔다. 바로 데워서 먹기만 하면 된다. 좋으면서 심통다. 이중적인 마음이 혼란스럽다. 해주면 감사히 먹으면 되는데 어느 순간 당연하게 받아들인 건 아닌가 싶다.

평소에 엄마 노릇을 못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아침을 챙겨준다. 내가 해놓은 걸 잘 안 먹으려고 해서 그렇지. 뭐라도 챙겨주려고 한다. 주면 주는 대로 먹었던 시절이 불과 1년 전이다. 어느 순간 달걀밥도 안 먹는단다. 난감하다.



다음 날 아침 큰아이가 씻고 머리를 말린다. 겨우 무거운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갔다. 저 뒤에서 메아리가 울린다.

"미역 적게, 밥 조금, 국물 많이!"

그렇다면 티 나지 않게 미역 조금 더, 밥은 한 숟가락만 더, 국물은 적당히 던다. 깨끗하게 비운 그릇을 보면 오늘 내가 할 엄마 노릇을 다 한 거 같아 마음이 놓인다. 


나는 매일 엄마노릇을 하고 있었다. 시어머니가 주신 음식으로.

거의 다 먹었다♡


또 하나 남았다. 둘째의 메아리가 들린다.



"난 완전 작게 진짜 작게 밥 조금 조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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