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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나 Apr 30. 2016

'차별'과 '편견'에 희생된
메이콤의 앵무새들

04.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는 연령과 성별에 관계없이 수많은 독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 이유는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하퍼 리로부터 일생동안 기억할 만한 소중한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할 만큼 이 작품이 그들의 삶의 방식에 깊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이정희, <세계화와 상호공존의 시민정신: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



누구나 꼭 읽어야지 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룬 책들이 있다. <앵무새 죽이기>는 그런 책 중에 하나다. 첫 번째 이유는 어마어마한 분량 때문이다. 500쪽을 거뜬히 넘긴 두께는 쉽게 짚어들 마음을 막는다. 또 하나의 이유는, ‘흑인에 대한 백인의 인종차별을 다루고 있다는데, 너무 뻔하고 무거운 주제를 500쪽 넘게 읽어야 하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나의 모든 우려가 기우였음을 단박에 깨달았다. 인종차별을 다루고는 있지만, 소설의 주제는 그것을 훌쩍 뛰어넘고 있으며, 다루고 있는 문제들이 결코 쉽지 않은 주제들이지만, 사건은 흥미진진했다. 더군다나 그 모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가 여섯 살 꼬마 아이의 것이라 손톱만큼도 지루하지 않았다. 소설에 등장하는 크고 작은 모든 이야기 속에 내포되어 있는 갈등은 사실 수많은 편견으로 인한 것인데도, 갈등을 일으키는 이쪽 편과 저쪽 편의 입장에 모두 공감이 가는 것이 아닌가. 물론 이러한 수준 높은 공감을 제공한 당사자는 젬과 스카웃의 아버지인 애티커스 변호사였다. 아이들을 양육하는 부모로서, 또한 한 사회의 책임 있는 구성원으로서 애티커스가 보여준 태도는 책을 덮고 나서도 여러 번 곱씹게 만든다. 


1960년대 출간돼 다음 해 퓰리처상을 수상한 <앵무새 죽이기>는 대공황기였던 1930년대 미국 남부 앨리배마 주의 작은 마을 메이콤에서 벌어진 일을 다루고 있다. 여섯 살 꼬마 스카웃과 그의 오빠 젬, 그리고 자유분방한 소년 ‘딜'. 소설은 진 루이스 핀치(스카웃)가  이들 셋과 보낸 3년 동안의 일을 회상하며 진행된다. 스카웃의 시선으로 본 마을의 크고 작은 일상은 천진한 아이의 것인데도 그 안에 날카로운 함의가 숨어 있다. 일상에 숨겨진 왜곡된 편견의 골. 결국 이 편견의 골은 두 개의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서 극명하게 표출된다. 하나는 마을 사람들이 ‘부 래들리’라는 존재를 보는 시각이고, 나머지 하나는 무고한 흑인 톰 로빈슨을 죽음으로 이끈 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다. 

스카웃을 포함한 세 아이의 시선이 매우 순진무구해서 역으로 더 날카로롭다. 톰 로빈슨의 재판을 지켜보던 딜이 울음을 터뜨리며 재판정 밖으로 나오자, 레이먼드 아저씨가 말한다. “아직 저 애의 양심은 세상 물정에 물들어 있지 않았어. 하지만 조금만 나이를 먹어봐, 그러면 저 앤 구역질을 느끼며 울지 않을 거야.” 


시공간적 배경_1960년에 씌어진 1930년 대공황기의 미국 남부

<앵무새 죽이기>는 상당 부분을, 백인 여자를 성폭행한 혐의로 억울하게 구속된 흑인 톰 로빈슨의 재판을 둘러싼 갈등과 에피소드에 할애하고 있으니 인종차별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흑인 톰 로빈슨은 변호사 애티커스가 법정에서 무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를 제시했는데도 인종에 대한 편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배심원의 만장일치로 유죄 평결을 받고, 결국에는 감옥으로 이송돼 그곳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사살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이 일련의 과정은 젬과 스카웃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순수한 눈에 투사된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 문제는 그래서 더 통렬하게 드러난다.  <앵무새 죽이기>에 나타난 미국의 인종 문제를 이해하려면 작품이 쓰여진 1960년대의 앨리배마 주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1890년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짐 크로우 법’은 온갖 방법으로 흑인의 권리를 제한하고 있었는데, 불과 1960년까지도 미국 사회의 백인과 흑인 사회는 철저히 분리돼 있었다. 공공건물의 경우 흑인과 백인이 사용하는 문이 달랐고, 식당에서도 같은 방에서 흑인과 백인이 식사할 수 없었으며, 물을 마시는 음료대, 화장실도 백인용과 흑인용으로 나뉘어 있었다. 버스나 기차를 탈 때도 흑인은 맨 뒷자리를 이용해야 했고, 그마저 백인이 타면 양보해야 했다. 1955년 로스 팍스라는 흑인 여성은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운전기사의 말을 거부, 자리를 내주지 않았고, 그 이유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앨리배마 주 먼트가머리에서 일어났고, 이 일을 계기로 1년 여 동안 버스 보이콧 운동이 벌어져 마침내 공중 교통에서 인종 차별을 없애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하퍼 리가 선택한 공간적 배경인 앨리배마 주는 흑인 민권 운동이 왕성한 곳으로, 흑인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처음으로 이름을 떨친 곳도 이곳이었으며, 19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의 불을 지핀 곳도 이곳이었다. 

하퍼 리는 이와 같은 사회의식에 기반해 1930년의 미국 남부의 작은 마을 메이콤을 통해 미국이 앓고 있는 보편적인 사회문제를 그려보였다. <앵무새 죽이기>는 1960년에 처음 출간되었지만, 1930년의 경제 대공황을 시대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가 그려낸 미국 남부의 작은 마을 메이콤은 그야말로 남부의 특성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는 사회였다. 

특히 대공황이라는 악재는 같은 일자리를 두고 백인과 흑인이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인종 차별의 골이 더 깊을 수밖에 없었다. 작가는 대공황기 미국에서 가난한 남부의 작은 마을 메이콤을 배경으로 설정함으로써 미국 남부의 특성을 뚜렷하게 부각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인이 보는 남부의 특성은 무엇일까? 그 특성은 바로 농본주의 사회, 시골, 가난, 인종차별, 폭력, 증오 같은 것이었다.  


메이콤은 어떤 곳인가

아주 오래된 마을 메이콤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괴팍한 뷰보스 할머니는 스카웃에게 멜빵바지 차림으로는 커서 식당 웨이트리스가 될 거라고 악담을 퍼붓는가 하면, 애티커스가 흑인 톰 로빈슨을 변호한다는 소식에 대놓고 “네 아빠는 네 아빠가 도와주는 쓰레기 같은 깜둥이들보다 나을 게 없다!”고 소리를 지른다. 

아이들의 진실한 벗, 모디 아줌마, 엄마 없는 남매를 돌봐주는 흑인 보모 갤퍼니아 아줌마. 이들은 스카웃의 집에 있을 때와 흑인 거주지에 있을 때 전혀 다른 이중적인 삶을 살아간다. 보수적인 고모 알렉산드라는 언제나 남매에게 가문의 명예를 지킬 것과 신사와 숙녀로 살아갈 것을 강요한다. 여기에 메이콤 사회로부터 철저히 격리된 래들 리가(家,) 독자적인 삶을 살아가는 커닝햄 가, 막무가내로 쓰레기처럼 살아가는 이웰 가가 있었다.  

소설 전반부에서는 이 모든 차이들이 그저 개인의 특성이나 오래된 전통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여섯 살의 스카웃이 아홉 살이 되고, 열 살 소년 젬이 열세 살이 되면서 아이들은 그들이 사는 사회가 그들의 생각과는 다른 이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메이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왔던 젬은 부 래들리에 대한, 톰 로빈슨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이 얼마나 뒤틀린 것인지 알게 되면서 메이콤 사회의 문제를 꿰뚫게 된다. 


“스카웃, 너 이거 알아? 이제 모두 알겠어. 최근에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서 알아낸 거야. 이 세상에는 네 부류의 인간이 있어. 우리나 이웃 사람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있고, 숲속에 사는 커닝햄 집안 사람들이 있고, 쓰레기장에 사는 이웰 집안 사람 같은 사람들이 있고, 흑인이 있어.”


메이콤의 평온한 외면 아래에 얼마나 엄격하게 계층이 나뉘어져 있는지 알게 된 것이다. 그 계층의 맨 아래에는 흑인이 있었다. 백인과 흑인은 일종의 카스트제도처럼 구분이 엄격했다. 흑인 목사가 캘퍼니아의 교회 예배에 참석한 스카웃과 젬에게 존경의 표시로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 흑인은 언제나 백인에게 존경을 표해야 했고, 백인과 동등한 보호나 정당한 권리를 받기는커녕 인간다운 대접조차 받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또한 메이콤 사회는 귀족 가문의 보존을 위해 상류층의 친분관계를 매우 중시하였다. 옛 남부 귀족주의 전형인 알렉산드라 고모에게서 명백하게 나타나는 상류층 의식은 ‘가문’에 대한 그녀의 존경심에서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같은 백인들 사이에도 명백한 계층 구분이 있는데, 알렉산드라 고모, 선교회, 전문직 종사자인 애티너스나 레이놀드 의사, 테일러 판사가 상류층을 형성하였고, <메이컴 트리뷴>의 편집장 언더우드를 비롯한 일반인들은 중간 계층에 속했으며, 커닝햄 집안처럼 가난한 백인노동자 계층이 그 아래에, 그리고 맨 마지막 계층에는 가장 게으른 흑인보다 훨씬 더 게으르지만 흰 피부 덕분에 흑인보다 더 나은 계급을 갖게 된 이웰 집안처럼 쓰레기 집단이 있었던 것이다.

젬과 스카웃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하고 평온해 보였던 메이콤 사회는 이처럼 인종차별, 상류층 의식, 백인들 간의 계층 구분에 지배돼 있었고, 이것에 의해 형성된 사회규범은 사람들의 행동방식을 규정하는 잣대가 되었던 것이다. 


두 마리의 앵무새, 부 래들리와 톰 로빈슨

메이콤 사회의 규범은 결국 애꿎은 두 마리의 앵무새를 희생시킨다. 

우리들에게 공기총을 사주셨을 때 아빠는 총을 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으려고 하셨다.(…) 어느 날 아빠가 오빠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난 네가 뒤뜰에 나가 깡통이나 쏘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새들도 쏘게 될 거야. 맞출 수만 있다면 어치새를 모두 쏘아도 된다. 하지만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애티커스의 말에 모디 아줌마가 덧붙인다.

“앵무새들은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줄 뿐이지.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무엇을 따먹지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지.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 거야.”

애티커스는 두 아이들에게 상대방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약자인 앵무새를 죽이는 것은 죄악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하지만 메이콤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규범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는 선량한 두 앵무새를 희생시키려 한다. 메이콤의 두 앵무새는 ‘부 래들리’와 ‘톰 로빈슨’이다.  

부 래들리는 사춘기 때 친구를 잘못 사귄 탓에 물의를 일으키고, 그 사건 때문에 평생 집안에 갇혀 사는 신세가 된다. 어른들에게는 따돌림 당하고 스카웃, 잼, 딜과 같은 어린아이들에게는 마치 유령이나 흡혈귀인 양 호기심과 놀이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젬과 스카웃과 딜은 그런 부 래들리를 집밖으로 끌어내기 놀이를 감행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이들은 부 래들 리가 선량한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이들의 짐작처럼 부 래들리는 젬과 스카웃을 위해 나무 둥지에 인형과 고장난 시계, 행운을 가져다 주는 동전을 몰래 갖다 놓고, 모디 아줌마네 집의 화재로 추위에 떨던 스카웃의 몸에 모포를 덮어주고, 결정적으로 애티커스 변호사에게 앙심을 품고 그의 아이들인 젬과 스카웃을 살해하려던 밥 이웰로부터 아이들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그는 평범하고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메이콤 사람들은 부 래들리를 은둔자로 만들어버린 것일까? 그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래들리 집이 “메이컴의 생활방식과 달라서” 교회에 나가지 않고 래들리 부인도 선교모임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메이컴의 사회규범에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은둔하는 것이다. 

또 한 명의 앵무새는 톰 로빈슨이었다. 사실 톰은 존경할 만한 겸손한 인간이었다. 세 자녀를 둔 가족의 가장이며 건실하게 일하는 흑인으로, 그녀는 백인 사회에도 흑인 사회에도 낄 수 없었던 백인 처녀 메이엘라를 동정하였고, 백인에 대한 흑인의 동정심은 종국에는 그를 죽음으로 이끌고 말았다. 

톰 로빈슨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그를 고용한 백인 링크 디스 아저씨는 방청석에서 일어나 이렇게 소리쳤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지금 당장 이것 한 가지를 알았으면 합니다. 저 청년은 지난 8년 동안 나를 위해 일해줬지만 손톱만큼도 말썽을 일으킨 적이 없어요. 정말 손톱만큼도 없었어요.”

하지만 톰의 유죄판결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고, 그의 변론을 맡은 애티커스에게 메이콤 사람들은 ‘깜둥이 애인’이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는다. 지만, 한편에서는 애티커스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모디 아줌마는 말한다. 


“애티커스 핀치는 이길 수 없어. 그럴 수 없을 거야, 하지만 그는 그런 사건에서 배심원들을 그렇게 오랫동안 고민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변호사야. 그러면서 나는 또 이렇게 생각했단다. 우리는 지금 한 걸음을 내딛고 있는 거야. 아기 걸음마 같은 것이지만 역시 걸음임에는 틀림없어.”


결국 톰은 백인들의 편견에 희생되고 만다. 아이들은 톰의 재판과 그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그 모든 책임이 편견을 가진 백인들에게 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소설의 후반부에서 공명정대한 애티커스는 이례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부 래들리와 관련된 것이다. 이웰이 애티커스에게 앙심을 품고 그들의 아이들을 공격했을 때 아이들을 지켜주기 위해 이웰을 살해한 사람은 부 래들리였다. 하지만 경찰관 헥은 이웰이 자신의 칼에 스스로 찔려 죽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처음에 그를 죽게 한 사람이 자신의 아들 젬이라고 판단한 애티커스는 헥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다. 만일 그가 거짓을 묵인한다면 자신은 자신의 아들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웰을 죽인 사람이 래들리임을 알고 헥의 거짓말에 동조한다. 불구자인 톰을 쏘는 것이 죄악이듯 사회의 아웃사이더인 무력한 존재인 래들리를 막다른 파국으로 몰고 갈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애티커스는 톰의 재판에서 진실을 주장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었음을 알지만 래들리의 경우에는 원칙보다 정황에 맞추어 결정한다. 애티커스가 헥의 말이 래들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임을 알고 헥의 거짓말에 동조한 이유는 그것이 ‘앵무새를 죽이지 않기’ 위한 결정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애티커스의 가르침_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부 래들리와 톰 로빈슨만큼은 아니지만 메이콤 사회가 정한 규범에서 벗어나 있는 또 한 명의 인물이 있는데, 돌퍼스 레이먼드다. 그는 자신의 가치관과 생활방식이 메이콤 사회가 요구하는 사회규범과 다르자 스스로를 술의 노예가 된 사람으로 치부하게 만든다. 자신의 다른 생활방식이 모두 술 때문으로 보이게 한 것이다. 재판정을 뛰쳐나온 딜과 스카웃과 레이먼드가 나눈 대화를 읽으면 그 역시 아이들만큼 순수한 마음으로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 인물임을 눈치 채게 만든다.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는 연령과 성별에 관계없이 수많은 독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 이유는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하퍼 리로부터 일생동안 기억할 만한 소중한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할 만큼 이 작품이 그들의 삶의 방식에 깊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이정희, <세계화와 상호공존의 시민정신: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


책을 덮고 나서도 오랜 동안 긴 여운이 남는 이유는 스카웃과 젬의 아버지 애티커스가 보여준 ‘태도와 방식’ 때문이었다. 그는 톰 로빈슨 변호를 맡은 자신에게 ‘껌둥이보다 나을 게 없다’고 폭언을 퍼붓는 뷰보스 할머니가 얼마나 용기 있는 사람인지 아이들에게 배우게 하는가 하면, 아이들에게 이 일로 이웃 사람들과 친구들이 어떠한 행동을 해도 “너희들은 이 문제 가지고 원한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폭도로 변해 자신에게 린치를 가하려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태도를 보여주고, 히틀러를 증오해도 되지 않냐는 스카웃의 물음에 대해서도 “어느 누구도 증오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애티커스가 시종일관 보여주는 태도는 바로 ‘관용’과 ‘배려’인데, 그의 관용과 배려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에 기반해 있다. 애티너스는 과거의 전통, 기존 체계, 사회규범을 존중하면서도 어떻게 변화를 지향하는지, 어떻게 타협해야 하는지 유연하게 가르친다. 올바른 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사회의 규범을 지키며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을 아이들에게 순간순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스카웃과 젬은 메이콤 사회를 통해 세상이 가진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모순을 깨닫지만 아버지 애티너스의 가르침 덕에 결코 편향되지 않은, 올곧은 삶의 방식을 취득하게 된다. 

스카웃은 고통과 좌절을 겪으며 중요한 삶의 교훈을 얻는다. 한마디로 그것은 남에 대한 배려와 관용 그리고 사랑이며, 타자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스카웃은 그토록 무서워하던 래들리 집 현관에 서서 자신의 집과 이웃을 바라본다. 스카웃은 “아빠가 정말 옳았다. 언젠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참말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신 적이 있다. 래들리 아저씨네 집 현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고 말한다. 늘 자신의 집 현관에서 래들리 집을 바라보던 태도에서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래들리 집 현관에서 자신의 집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스카웃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참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아버지의 말의 참다운 의미를 깨닫는다.  


차별과 편견을 넘어 평화로운 공존을 위하여

<앵무새 죽이기>는 메이콤이라는 작은 마을에 현미경을 들이대 그 사회를 해부하고 그 사회가 가진 문제점을 포착해냈다. 이 작품은 과연 지역주의 소설일까? 물론 아니다. 하퍼 리는 미국 남부의 특성을 드러내기 위한 장소로 메이콤이라는 작은 마을을 표본으로 삼았다. 

우리는 왜 1960년대의 문제의식으로 1930년의 대공황기의 미국을 다룬 이 소설을 여전히 감명깊게 읽고 있는 걸까? 도대체 이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공감은 무엇일까? 왜 우리는 여전히 애티커스의 태도와 삶의 방식으로부터 무엇을 배우려고 하는 것일까?

하퍼 리가 메이콤을 통해 드러내려고 했던 것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편견의 문제다. 이 사소하고도 중대한 편견이 어떻게 죄없는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있는지 역설하고 있다. 더불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배려심과 관용의 정신으로 상호 이해하고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포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잠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둘러보면, 이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공감이 무엇인지 금세 수긍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이곳에 사는 우리들이 가진 ‘편견’이 그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좁은 땅덩어리에서 지역주의가 활개치고, 남과 북은 갈라져 있다. 뿐만 아니라 나와 다른 피부색의 사람들이 이 땅에서 일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들의 시선은 냉담하다. 흑인을 평등한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은 백인을 비난하기 부끄러울 정도다. 결국 지역주의, 인종차별, 계층간의 골 등이 이 땅에 활개치고 있으니 우리 역시 자각하지 못하는 동안 애꿎게도 우리에게 전혀 해를 입히지 않는 약한 앵무새를 죽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우리는 이 편견의 문제에 있어서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기 일쑤다. 마치 게이츠 선생님처럼. 게이츠 선생은 미국은 유태인을 학살한 독일과 다르게 독재 국가가 아닌 민주 국가이므로 모두 평등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미국은 독일과 다른 거예요.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이고, 독일은 독재 국가이지요. 독재국가 말이에요. 여기 우리 나라에서는 어느 누구도 박해하는 것을 믿지 않아요. 박해는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한테 나오는 겁니다. 펴-언-겨-언 말이에요.”


하지만 이렇게 아이들에게 가르친 게이츠 선생님은 톰 로빈슨의 재판장을 나오면서 인종 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이중성을 스카웃은 이해할 수 없어 한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편견’에 대해 이와 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나와 무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관용의 정신을 내비치지만 나와 결부된 문제에 관한한 자유로울 수 없는.

그래서 책을 덮고 나서도 오랫동안 우리는 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애티커스의 태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되는 것이다. 차별과 편견을 넘어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보게 하는 좋은 책이다.  (끝)





>>> 넬 하퍼 리

1926년 미국 남부 앨리배마에서 태어난 하퍼 리는 헌팅턴 여자 대학과 앨리배마대학에서 공부했으며 교환 학생 자격으로 옥스퍼드에서 1년간 공부하기도 했다. 학생시절부터 짤막한 글을 발표하던 그녀는 항공사에서 일하면서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이후 친구들의 재정적 도움으로 글쓰기에 전념하게 된 하퍼 리는 <앵무새 죽이기>를 발표하면서 대중적인 성공과 문학적인 성과를 한꺼번에 얻었으며, 평생 이 작품 하나만 쓰고 은둔한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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