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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나 Apr 20. 2016

과학적 추구가 창조한 괴물,
인간사회를 조롱하다

03. 셸리, <프랑켄슈타인>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이름이 아니라, 금지된 지식에 대한 과학적 도전에 열광한 청년 과학자의 이름이다. 

자신이 창조한 괴물의 존재에 역겨움과 혐오감을 느끼는 프랑켄슈타인, 인간이 자신에게 저지른 악행을 보면서 인간 존재에 역겨움을 느끼는 '괴물'.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은 어쩌면 한몸에서 나온 두 존재일지 모른다. 메리 셸리가 창조한 당시의 정치적 파괴성을 철저히 삭제한 채 기담의 악의적 주인공으로 둔갑시킨 <프랑켄슈타인>은 꼭 다시 읽어야 할 걸작이다. 

 


 메리 셸리와 기이하고 섬뜩한 이야기의 탄생

 “우리 각자 괴담 한 편씩 씁시다.”

1816년, 영국의 대표적인 서정시인 퍼시 셸리와 아내 메리 셸리는 스위스를 방문했고, 그곳에서 바이런 경과 이웃하며 지내게 되었다. 과학소설의 한 획을 그은 <프랑켄슈타인>은 영국의 천재적인 낭만파 시인 바이런 경의 이 한 마디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네 명의 쟁쟁한 영국의 젊은 문필가들이 이 제안에 동의했고(퍼시 셸리, 메리 셸리, 바이런, 그리고 최초의 뱀파이어 소설 <뱀파이어>를 발표한 존 폴리도리), 그 가운데 메리 셸리가 이 과제를 가장 훌륭하게 수행해냈던 것이다.

메리 셸리는 퍼시 셸리와의 연애와 결혼으로도 유명세를 탔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당대 저명한 문필가였다. 인습적인 정치 체제하의 정부를 거부하고 공동 생산과 공동 분배의 소규모 자립 공동체를 주창한 혁신적인 사상가 윌리엄 고드윈을 아버지로, 여성의 교육적, 사회적 평등을 주창한 페미니즘의 선구자였던 메리 울스턴크레프트를 어머니를 두었으니, 그의 이 독특한 괴기소설(?)이 남성 중심의 문명사회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의 칼을 품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프랑켄슈타인>이 얼마나 통렬한 비판의식을 가진 지적인 소설인지 모른 채 이 작품을 패러디한 수많은 영상물이나 만화류를 통해 왜곡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어둡고 음울한 화면 속에서 추악한 얼굴을 한 거대한 괴물이 음습하게 움직인다.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 우리들은 끔찍한 외모와 엄청난 힘을 가진 괴물의 모습을 연상한다. 게다가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의 이름인지, 괴물을 창조한 사람의 이름인지 분간도 못한 채 ‘프랑켄슈타인’은 끔찍한 공포의 대상으로 유통되고 있다. ‘프랑켄슈타인’은 금세기 영화 중 가장 무서운 괴물이 등장한 영화로 첫손 꼽힌다.

메리 셸리는 당시 시대적인 통념과는 화해할 수 없는 혁신적인 사고를 가진 여성작가였다. 그가 창조해낸, 혹은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해낸 존재 ‘괴물’.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이 혹독한 고통과 고뇌 속에서 서로를 쫓고 쫓는 이 이야기를 통해 지금의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자.


프랑켄슈타인, 금지된 지식에 대한 그릇된 욕망이 빗어낸 파국

<프랑켄슈타인>은 복합적인 서술 방식을 쓰고 있다. 편지, 베껴 적은 이야기, 이야기 속의 이야기 등. 메리의 남편 퍼시 셸리는 아내를 대신해서 쓴 서문에서, “이 소설의 근간이 되는 사건은 다윈 박사와 독일의 생리학 저술가들에 따르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여겨지고 있다”고 밝혔고, “단순히 일련의 초자연적인 공포를 엮어내는 것에 그칠 생각은 없다”고 단언하였다. 즉, 만들어낸 기괴한 이야기가 아니며 “인간 본성의 기본적인 진리를 유지”하려 했다고 말했다.

소설의 구조는 이렇다. 탐험가 월튼이 영국에 있는 누이에게 보내는 일련의 편지가 나오는데, 편지 속에는 북극을 향한 자신의 원정과 모험심, 황량한 극지방에서 만난 동료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을 만났던 일이 기술돼 있다. 기진맥진한 프랑켄슈타인은 생명 없는 생물의 부산물로 살아 있는 생명체를 만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물론 소설의 중심에는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그가 만든 피조물, 창조하자마자 이름도 없이 내던져진 ‘괴물’ 이야기가 있다.

왜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을 파국으로 몰아간 피조물, ‘괴물’을 만든 것일까.

제네바 공화국의 명문가 자제인 프랑켄슈타인은 자연철학에 매료돼 있었고, 결국 신의 영역으로 간주된 인간 생명의 창조라는 광적인 실험에 몰입해 성공을 거둔다. 납골당에서 수집한 뼈와 해부실과 도살장에서 그러모은 것들로 240센티미터에 달하는 피조물을 만들어낸 것.

그는 지식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추구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생명이 없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광적인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간혹 인간적인 본능이 살아나 너무나 역겨운 나머지 자신의 작업을 외면하려 했던 적도 있었지만, 계속 커가는 열망에 사로잡혀 작업을 완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심혈을 기울인 작업이 성공하자마자 프랑켄슈타인에게는 숨 막히는 공포의 역겨움이 엄습해왔다.

 “이미 새벽 한 시였다. 빗줄기가 음산하게 창문을 두드렸고 초는 거의 타들어갔다. 그 순간 나는 반쯤 사그라진 촛불의 희미한 빛을 통해, 그 피조물이 흐리멍덩한 노란 눈을 뜨는 것을 보았다. 놈은 거칠게 숨을 쉬었고, 발작을 일으키며 사지를 꿈틀댔다. 이 참상을 보고 느낀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새 생명의 창조에 매달린 프랑켄슈타인의 광적인 열망과 비교해보면, 자신의 창조 작업이 완성되었을 때 느끼는 프랑켄슈타인의 참혹한 혐오감은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왜 그는 그렇게 애타게 바랐던 창조물을 두고 끔찍한 공포를 느끼게 된 것일까?

메리 셸리는 자신의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의 어떤 노력이든 결과적으로 이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의 거대한 메커니즘을 조롱하려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무서운 일일 것이다. 그 피조물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낸 일은 창조자 본인조차 경악케 할 것이다. 결국 그는 역겹고 소름끼치는 자신의 피조물에게서 도망치고 말 것이다.”

오로지 지식에 대한 광적인 추구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놓고 순식간에 혐오감에 휩싸여 그 창조물을 내팽개쳐 버린 프랑켄슈타인. 그의 오만하고 이기적인 행동은 결국 ‘괴물’의 무자비한 복수를 불러온다. 세상 모두로부터 거부당하고, 자신의 창조주로부터도 내버려진 ‘괴물’은 급기야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의 목숨을 내주어서라도 지키고 싶어했던 네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다. 어린 동생 윌리엄과 죄없이 죽어간 저스틴, 가족과 같았던 친구 앙리 클레르발과 평생을 사랑했던 연인 엘리자베스, 그리고 거듭된 불운에 그를 사랑과 헌신으로 지켜주었던 아버지마저 죽게 된다.

괴물이 불러온 이 파국의 책임은 오로지 ‘괴물’에게만 있을까?

메리 셸리는 이처럼 무책임한 프랑켄슈타인에게 일말의 자비도 허락하지 않았고, 프랑켄슈타인이 결국 황량한 북극에서 굴욕적인 죽음을 맞도록 방치하였다. 어느 누구도 프랑켄슈타인이 남겨놓은 파국을 복구할 수 없었다. 사실 소설 속 파국은 프랑켄슈타인의 그릇된 욕망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파국이 상징하는 의미는?

프랑켄슈타인은 18, 19세기 중산층 사회를 대표하는 지성인으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이성을 갖춘 인물이며, 중산층의 가치를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그럼 ‘괴물’이란 존재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괴물’을 통해 당시 사회의 이념 및 지배적인 가치의 왜곡성과 현대 문명의 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괴물’의 눈에 비친 인간사회의 모습을 잘 들여다보면, 왜 이 소설이 당대 사회 구조와 인간들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조롱하고 있다고 말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피조물 ‘괴물’_ 당시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조롱하다

음습한 영상물 속 ‘괴물’은 잊어야 한다.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이 피조물은, 프랑켄슈타인보다 더 상상력이 풍부하고 지적이다. ‘괴물’은 더 이상 수술대 위에 무기력하게 누워 통제당하는 존재가 아니며, 통제의 사슬을 끊고 호시탐탐 인간 사회를 위협하는 악마와 같은 존재가 아니다. 프랑켄슈타인이 두려움과 혐오감 속에서 버려둔 ‘괴물’은 수술대 위에서 일어나 세상 밖으로 나온 순간부터 스스로를 교육시키고 사회화시켰다. 수많은 버전의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은 메리 셸리가 창조할 당시의 정치적인 파괴성을 철저히 삭제한 채 기담(奇談)의 악의적 주인공으로 둔갑시켜 버렸다.

자연 속에서 생명의 신비를 하나씩 깨우쳐 나가던 프랑켄슈타인은 외딴 오두막집(눈먼 노인의 가족)에서 인간과 인간사회에 대해 지적인 깨달음을 얻는다. 오두막집 사람들이 서로에게 보여주는 따뜻한 인간애를 그리워하지만, 결코 그것은 자신이 손에 넣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자신을 창조한 창조자에게까지 버려진 존재. ‘괴물’은 절규한다. “사람들 누구나 추한 것들을 미워하지. 그러니 어떤 생명체보다 추한 내가 얼마나 혐오스러울까!”

‘괴물’의 절박함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추악한 존재라는 사실에서 오는 절대적인 외로움이다.

“저주받을 창조자! 왜 당신은 스스로도 역겨워 고개를 돌릴 만큼 소름끼치는 괴물을 만들었는가? 신은 가엾게 여겨,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본떠 아름답고 매혹적으로 만들었건만, 내 모습은 추악한 당신의 모습이구나. 그런 당신의 모습을 빼닮았기에 더욱 소름끼친다. 사탄에게는 칭찬해주고 용기를 줄 친구, 동료 악마들이라도 있지만, 나는 외톨이고 증오의 대상이로다!”

나아가 괴물은 팰릭스가 아라비아 여인 사피에게 가르쳐주는 내용을 들으면서 인간 사회의 이상한 구조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재산의 분배, 막대한 부와 비참한 가난, 그리고 계급과 혈통과 귀족에 관해서도 듣게 되었다.

 “인간은 부와 신분이 높은 순수한 혈통 중 하나만 지녀도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어느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부랑자와 노예 취급을 받으며, 선택받은 소수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낭비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질 거요!”

이렇듯 괴물은 사회의 지배적 가치와 이념에서 소외된 자로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괴물은 가부장적인 사회의 여성을 상징하기도 하고, 소외된 하층계급이나 노동자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뿐만 아니라 ‘괴물’은 인간과 인간 사회의 본질에 대해 이와 같은 의문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인간은 어떤 때는 순전히 악의 근원에서 태어난 자식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고귀하고 신과 같은 존재로 보이기도 했소. 위대하고 고결한 인간이 되는 것은 감각이 예민한 존재에게 있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 같았소. 많은 역사적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비열하고 사악한 인간이 되는 것은 가장 비참한 타락, 눈먼 두더지나 나약한 벌레보다도 더 비참한 지경의 인간처럼 보였소. 오랫동안 나는 한 인간이 어떻게 동족을 죽일 수 있는지, 심지어 법과 정부 따위가 왜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소. 하지만 악과 살육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가 품었던 의혹은 사라지고 역겨움과 혐오감이 몰려와 고개를 돌리고 말았소.”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의 존재에 대해 느꼈던 역겨움과 혐오감, 그리고 인간이 인간 자신에게 저지르는 악과 살육을 보면서 ‘괴물’이 인간 존재에 대해 느꼈던 역겨움과 혐오감.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은 한 몸에서 나온 두 존재처럼 겹쳐 보인다.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예민한 고뇌, 인간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 ‘괴물’의 입을 통해 내뱉어지는 장중한 어휘들은 ‘괴물’이 얼마나 지적인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뿐만 아니라 프랑켄슈타인이 죽었을 때 ‘괴물’이 느끼는 회한과, 스스로를 불태우기 위해 장작을 싣고 사라진 점을 보면, 그가 참으로 이성적 존재임을 새삼 알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괴물’을 떠올리면, 추한 외모에 동물적인 단순한 감정을 지닌 짐승이나, 말 그대로 괴력을 지닌 잔인한 괴물만을 생각한다. 사실 그런 이미지는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에 투영한 이미지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소설 속 괴물에 대한 첫 인상을 떠올리면, 루소가 말하는,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자연인, 고결한 야만인이 생각날지도 모른다.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괴물을 통해 단순히 과학이 낳을 수 있는 파국에 대해 경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스스로 사회화해가는 괴물의 눈으로 당시 시대가 내세우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가치가 가진 허구성을 낱낱이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 시대의 과학과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괴물’의 입을 통해, 자신을 탄생시킨 시대 가치의 허구성을 조롱하고 숨어 있던 실체를 폭로하였다.


인간에게 생명을 만들어낼 권리가 있을까

인간이 알지 말아야 할 것이 있을까? 자유로운 발상과 무한성장의 분위기 속에서 개인 또는 제도가 지식의 한계를 진지하게 제기할 수 있을까? 기독교의 뿌리가 된 히브리 서사를 보면, 인간의 욕망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한다. 하나는 영생의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무한지식의 욕망이다. 영생을 향한 무한 지식의 욕망, 그것이 바로 생명공학이다. 인류는 나날이 발전해가는 생명공학에 대해 무지갯빛 바람을 가진다.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고통 없이 삶을 영위할 수 있기를 얼마나 바라고 있는가.

프랑켄슈타인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뚫고 들어가 생명이 없는 암흑의 세계에 폭포수 같은 빛을 쏟아붓고 싶어했다. 생명 없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에 매료되었다. 그리하여 저항할 수 없는, 거의 광적인 충동에 사로잡혔다. 한계를 뛰어넘는 과학 지식의 추구는 그에게 새로운 존재의 창조라는 결실을 주었지만, 그는 거대한 열망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 결과가 어떤 일들을 초래할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를 위한 과학적 발견에 의해 오히려 자신과 가족이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파우스트 Ⅱ> 초반에 나오는 일화에서 메피스토텔레스는 바그너의 실험실 안으로 들어간다. 파우스트의 조수였던 바그너는, 유전학을 전공하는 고등연구원이었고, 메피스토텔레스가 침입한 그 순간 바그너는 빛을 내며 진동하는 정화기 속에서 ‘호문쿨루스’라는 실체를 창조하는 데 성공한다. 호문쿨루스는 육체는 없고, 인간의 것과 비슷한 정신만 있는 존재다.

하지만 바그너가 유전학 실험에 착수하는 장면이 나오는 <파우스트Ⅱ>보다 10년 전에 씌어진 <프랑켄슈타인>에는 생명 창조에 대해 결코 지적 농담이 들어 있지 않다. 오히려 인공적으로 생명을 생산하는 일이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키고 있다. 괴테는 새 생명의 창조를 우연한 장난처럼 다루지만, 메리 셸리는 새 생명의 창조를 이야기의 핵심부에 두고, 그것을 괴기적인 탈선으로 파악한다.

지식에 대한 끝없는 추구! 다윈에게서 촉발된 인간 생명에 대한 자연과학적 상상력이 <프랑켄슈타인>을 낳았지만, 완벽한 인간복제의 길마저 실현 가능해 보일 정도로 발전하고 있는 현대에 이르러, 인간이 창조주가 되어 인간을 창조하는 일은 더 이상 상상 속의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인간에게 생명을 만들어낼 권리가 있는 것일까. 인간의 생명에 관한 것은 영원히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일까.

1816년,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반도 훨씬 전에 스무 살의 어린 여성이 쓴 <프랑켄슈타인>은 당시 영국사회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 작품은 오히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더 절박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2004년 2월 미국의 과학 전문지 <사이언스>는 세계 최초로 인간 배아로부터 줄기세포를 얻는데 성공하였다고 발표하였고, 한 한국인 과학자가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마치 이 획기적인 연구는 일반 대중들에게 복제인간의 설계도가 완성된 듯한 느낌마저 주었다. 하지만 황우석의 줄기세포는 논문 자체가 조작된 것이며, 연구 조사 과정에서 최소한의 윤리규정을 무시해 큰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일과 무관하게 인간 배아로부터 줄기세포를 얻기 위한 과학적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최근 우리는 DNA 구조의 발견으로 생명 창조 및 인간복제의 문제에 있어서 심각한 윤리적 난관에 직면해 있다. 판도라의 상자가 조금씩 열리고 있는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이 죽자 자신도 장작에 불을 지펴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현대의 생명복제 기술에 의해 생산된 생명체가 이처럼 쉬운 결론으로 끝나지 않을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죽어가는 프랑켄슈타인은 광적인 탐험가 월튼에게 이렇게 말한다.

“잘 있게, 월튼! 평온함 속에서 행복을 찾고 야망은 피하게. 야망이 과학과 발견의 분야에서 자네에게 명성을 안겨줄, 언뜻 순수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말일세. 그런데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나는 그런 기대감 때문에 파멸을 자초했지만 다른 사람은 성공할지도 모르는 일인데.”

후대의 과학자를 상징하는 월튼에게 한 이 말은 결국 지금의 우리에게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해 보라는 의미이며, 한편으로는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의 횃불을 넘겨주고 싶은 광적인 과학자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죽음에 임박해서도 이 현대판 프로메테우스인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삶을 황폐하게 만든 야심적인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생명 창조의 문제는 메리 셸리의 시대보다 유전공학이 크게 발전한 오늘날 더욱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과연 인간에게 생명을 만들어낼 권리가 있을까. 과학의 문제이지만 윤리의 문제와 동떨어져 생각할 수 없는 난제인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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