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운명의 무서움을 반증하는 사례로 이보다 더한 것이 있을까?
아버지(라이오스 왕)를 살해하는 것으로 모자라 어머니(이오카스테)와 몸을 섞고, 형제이며 자식일 자식을 낳게 될 운명이라니. 오이디푸스와 아오카스테, 라이오스 왕은 신이 내린 가혹한 운명을 피하기 위해 최선의 길을 찾는다. 그러나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처참한 파멸뿐. 오이디푸스는 그저 운명의 제물에 불과한 건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적 인물 오이디푸스 신화나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프로이트가 따온 정신분석학 용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해서는 대략 알고 있으리라. ‘퉁퉁 부은 발’이라는 뜻을 가진 오이디푸스의 이름 속에는 그의 잔인한 운명이 숨어 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가혹한 신탁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복사뼈에 쇠못이 박혀 진 채 숲 속에 버려졌고, 신화 속 인물들은 모두 신탁이 예언하는 파멸적인 운명을 피하기 위해 애쓰지만 누구도 그 운명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오이디푸스 신화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단골메뉴였다. 희랍 비극의 창시자 아이스퀼로스와 에우리피데스도 같은 작품을 썼는데,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 가장 유명하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기원전 425년에 아테네의 비극 경연대회에서 최초로 공연되었다고는 하나, 쓰여진 연대도 상연된 시기도 불확실하다고 한다.
<오이디푸스 왕>은 테베 궁전에서 오이디푸스 왕이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 한 나절 동안의 일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 짧은 시간 동안 오이디푸스의 아버지 라이오스왕과 오이디푸스, 2대에 걸친 사연들이 압축돼 있다. 오이디푸스와 그를 둘러싼 인물들은 신이 부여한 지독한 숙명에 맞서 싸운다. 숙명을 벗어났다고 안도하는 인간을 비웃기라도 하듯 운명은 그들을 덮쳐 파멸로 이끈다. 이 파멸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신의 존재를 두려워하지 않은 인간의 무지가 빗어낸 것일까? 오이디푸스의 파멸은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우리에게 던진다. 더불어 오이디푸스는 고통과 몰락 속에서도 인간이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보여준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은 예기치 못한 운명이 불러오는 비극이다. 스스로의 의지로 맞설 수 없는 일들, 복병처럼 숨어 있다 일순간 우리를 덮치는 사건들. 갑작스러운 사고나 병마가 덮쳐 가족을 앗아가는 일. 이런 일들만 피할 수 있다면 평안한 일생이겠지만 도대체 누가 무엇을 장담할 수 있겠는가. 몽테뉴는 이러한 인간 운명의 보편성에 대해 경고하는 <오이디푸스 왕>의 마지막 구절을 자신의 삶의 지표로 삼았다고 <수상록>에서 밝히고 있다.
코러스(노래): 오오 조국 테베의 시민들이여, 보라. 이 분이 오이디푸스다.
그이야말로 저 이름 높은, 죽음의 수수께끼를 풀고, 권세 이를 데 없었던 사람.
온 장안의 누구나 그 행운을 부러워했건만,
아아, 이제는 저토록 격렬한 파멸에 묻히고 마셨다.
그러니 사람으로 태어난 몸은 조심스럽게 마지막 날 보기를 기다려라.
아무런 괴로움도 없이, 삶의 종착점에 이르기 전에는
이 세상의 행복에 대해 장담하지 마라.
사실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고, 잔인한 운명에 희생된 숱한 사연들을 대할 때도 우리는 평범한 보통의 삶과는 동떨어진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과연 그럴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인간의 삶에서 운명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이야기는 오이디푸스가 이미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테베의 왕이 된 때부터 시작된다. 도시 국가 테베에 지독한 열병이 돌아 도시 전체에 죽음의 그림자가 덮친다. 사람들은 이 난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이디푸스 왕에게 도움을 청하고, 왕은 자신이 이 문제를 해결하리라 결심한다. 그리하여 처남 크레온을 아폴로 신의 거처인 델피로 파견해 신탁을 받아오라 명한다. 델피의 신탁에 의하면 선왕 라이오스 왕을 죽인 범인을 잡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 오이디푸스 왕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결단코 범인을 잡으리라 단언한다.
이때 등장한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 그는 계속 범인을 쫓는 일을 그만두라고 간청하고, 왕은 테이레시아스의 이런 태도를 의심하고 다그친다. 마침내 테이레시아스는 무거운 입을 연다. “그대는 그분(라이오스 왕)의 살해자를 찾고 있으나 그대가 바로 그분의 살해자란 말입니다.”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쏟아내는 말들은 모호함으로 가득하다. 이미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알고 있는 독자(관중)들은 그 말들의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지만, 오이디푸스로서는 도저히 해독 불가능한, 미치광이의 저주이거나 음모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오이디푸스 왕은 진실을 밝히려고 나선다. 그러나 진실을 향한 그 길은 오이디푸스를 고통과 몰락, 파멸로 이끄는 지옥의 계단이었다.. 테베의 왕이었던 라이오스 왕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가 조금씩 윤곽을 드러냄과 동시에 오이디푸스는 불안과 의혹에 휩싸인다. 라이오스 왕이 죽었던 정황과 오이디푸스가 자신에게 내려진 잔혹한 신탁(모두들 알고 있는 그 신탁)을 피해 코린토스를 떠나 테베로 오는 길에 있었던 우연한 사건이 맞물려 돌아간다. 결국 자신이 라이오스 왕의 살해범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뒤이어 이보다 더한 비밀이 속속들이 드러난다. 오이디푸스 왕은 라이오스 왕과 이오카스테 왕비가 버렸던 아들이었던 것.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극의 등장인물들은 신이 꿰맞춰 놓은 운명의 굴레를 결코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작품 속에서 오이디푸스는 지혜로운 자, 수수께끼를 잘 푸는 자로 등장한다. 테베 사람들은 역병이 돌자 오이디푸스의 지혜에 구원을 빈다. 오이디푸스는 반드시 진실을 규명해 테베를 구하겠다고 확언한다. 그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의 태도는 자신만만하다. 소포클레스가 묘사한 오이디푸스는 조금은 오만한 성격의 소유자다. 진실을 규명하리라는 자신감에 차 있고,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오히려 테이레시아스를 꾸짖으며 자신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었음을 당당히 외치고, 예언자의 무지를 조롱한다. 하지만 그의 당당함은 극이 진행되면서 점점 무너져간다.
이렇게 읽으면 그의 불행은 신이 예정한 운명을 거부한 그의 오만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서 <오이디푸스 왕>은 일면 교만한 인간에 대한 경고와 충고로도 읽힌다. ‘이들을 보라, 이들은 결코 아폴론 신의 신탁을 벗어나지 못하지 않았느냐?’ 하는 신의 조롱이 들리는 듯하다. 인간은 결코 운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단 말인가.
소포클레스와 소크라테스는 동시대 인물로, 당시에는 소피스트 철학자들이 판을 칠 무렵이었고, 덩달아 신을 믿는 사람들과 인간적 지혜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심각하게 대립해 있던 시기였다. 소포클레스보다 앞선 비극 시인 아이스퀼로스와 소포클레스 작품이 보여주는 차이도 이러한 시대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아이스퀼로스의 작품에서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신의 의지가 인간의 의지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했고, 따라서 인간보다는 신이 오히려 극의 주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소포클레스의 작품에서는 인간의 한계와 더불어 인간의 위대함이 주제를 이루고 있고, 신의 의지보다는 인간의 의지가 결정적인 역할은 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극의 주역을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대에 상연된 <오이디푸스 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였다. ‘신을 믿을 것인가, 인간을 믿을 것인가.’ 만일 아폴론의 신탁이 옳으면 신을 믿어야 할 것이고, 스핑크스를 물리칠 만큼 현명한 지혜의 소유자인 ‘대표적인 인간 오이디푸스’가 아폴론의 신탁을 벗어나서도 존재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인간, 즉 인간의 지혜를 더 믿게 될 것이다. 이처럼 신탁을 실현할지의 여부를 증명할 책임을 맡은 오이디푸스는 가장 합리적인 절차와 과정을 통해 현실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인간’이다.
오이디푸스는 신이 내린 운명의 희생자이며,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 패배자에 불과한가? 그게 아니라면, 여러분은 오이디푸스를 어떻게 평가하겠는가?
이에 대해서는 대략 다음과 같은 평가에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결코 운명의 단순한 제물은 아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맹목적 생존을 위해 자신의 인간적 존엄을 포기했더라면 파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파멸할 줄 알면서도 진리를 찾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여러분은 이 생각에 동의하는가? 후대 사람들이 그를 두고 ‘진실을 탐구하는 새로운 영웅’이라고까지 평가하는 이유도 생각해보자.
오이디푸스는 ‘비극적 아이러니’ 속에 있다. 라이오스 왕의 살해범을 찾아내겠다는 순수한 열정과 성실한 노력이 오히려 그를 파국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지 말라 경고한다. 오이디푸스는 불구덩이를 찾아 들어가는 사람처럼 스스로 범인임을 밝혀내야 하는 모순된 상황에 처한다. 만일 여기서 중단한다면 지옥과 같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떤 일들이 이어질까?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 또 둘 사이의 네 자녀는 행복할 수 있었을까? 신탁을 내린 아폴론 신은 어찌했을까? 진실을 밝히지 않은 오이디푸스를 징벌하기 위한 테베의 재난을 멈추지 않으려나.
오이디푸스는 불안과 불길함이 엄습하는 와중에도 진리를 규명하는 작업을 중단하지 않는다. 자신의 파멸을 초래할 줄 뻔히 알면서도 이오카스테(어머니이며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신의 신분을 끝까지 밝혀낸다. 그리하여 상상하기도 두려운 처참한 파멸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오이디푸스가 인간으로서 보여주는 존엄한 자유의지다. 오이디푸스의 영웅적 면모는 이런 상황에서도 진리를 찾기 위해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오이디푸스는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자신이 바로 범인임을 알게 되었지만, 그 사실을 회피하거나 은폐하지 않았다. 그는 운명을 피하려 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였다. 설혹 그 운명이 참혹한 것이어도. 또한 굴욕적인 삶보다는 정의로운 삶을 선택했으며, 비겁한 삶보다는 명예로운 죽음의 길을 택했다.
이는 이오카스테가 보여준 행동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오카스테는 고통스러운 진실을 끝까지 철저히 외면했다. 그녀는 진실이 밝혀지려 하자 그 자리에서 도망쳐 결국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공포스러운 진실과 대면하기를 거부했다. 그 참혹한 진실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달랐다. 비록 그 진실이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을 줄지언정 피하지 않고 대면했고, ‘내가 모르는 나’를 인정했다. 스스로 눈을 찔러 평생을 암흑 속에서 방랑하는 것은 죽음보다 더욱 비장감 넘치는 인간적 행위가 아닐까.
신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었고, 그 운명이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지만,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신을 책망하지 않았으며, 신에게 미뤄두지 않았다. 그는 잘못에 대해 자신을 벌하여 끝까지 스스로 책임지는 참으로 인간다운 인간, 자유의지를 지닌 새로운 영웅이었던 것이다.
진리를 찾는 순수한 열정이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역설. 이 역설 외에도 <오이디푸스 왕>에는 또 하나의 역설이 있다. 진리를 전하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꾸짖는 장면을 잠시 떠올려보자. 눈먼 예언자는 왕의 살해자가 바로 오이디푸스라고 밝히며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부지중에 그대의 가장 가까운 핏줄과 가장 가까운 인연을 맺고 살면서도 어떤 불행 속에 빠져 있는지 보지 못하고 있다”고. 그 말에 오이디푸스는 “그대는 귀도 지혜도 눈도 멀었”다고 조롱한다.
그대가 나의 눈먼 것까지 조롱하시니 말씀드립니다만
그대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불행 속에 빠져 있는지도, 어디서 사는지도, 누구와 사는지도.
그대가 누구의 자손인지 알고나 있습니까? 그대 자신은 모르겠지만
그대는 지하와 지상에 있는 그대의 혈족의 원수입니다.
그리하여 어머니와 아버지의 저주라는 이중의 채찍이 언젠가는
그대를 무서운 발걸음으로 뒤쫓으며 이 나라 밖으로 몰아낼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올바로 보는 그 눈도 그때는 어둠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과연 누가 현명한 자였던가. 이미 오이디푸스 신화를 알고 있는 독자들과 관중들은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테이레시아스임을 알고 있다. 진정 진실을 가려낼 줄 아는 지혜로운 눈을 가진 자는 ‘눈먼’ 테이레시아스였고, 자신의 현명함을 뽐내는, 두 눈으로 사물을 똑똑히 볼 수 있는 오이디푸스는 오히려 진실을 전혀 보지 못하는 가련한 인간이었다.
결국 이야기의 끝을 따라가 보면, 오이디푸스는 눈을 잃고 나서야 진실을 보게 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눈을 찔렀을 때, 그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의 허상을 진실하게 볼 수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파멸의 순간 진실을 인식함으로써 참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신체적으로는 장님이 되었지만, 정상인이었을 때 보지 못했던 진실을 보게 되고, 무지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이 순간, 병든 테베는 다시 건강해진다. 더불어 테베의 왕이었을 때에는 불확실한 출신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소외되어 있다가, 이 인식의 순간부터 인간의 품위를 지킨 왕으로서 국민들의 호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 비단 오이디푸스와 테이레시아스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이디푸스의 비장한 결단을 두고 참으로 인간적 면모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오이디푸스, 이 문제적 인간을 여러분은 어떻게 평가하겠는가?(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