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자연 앞에 겸손하지만, 결연한 의지를 지닌 노인 산티아고. 끝없이 넓은 바다 한가운데서 노인은 홀로 사흘 밤낮을 거대한 청새치(블루마린)와 사투를 벌인다. 마침내 사흘째 되는 날, 청새치는 노인의 작살에 목숨을 잃고, 노인은 자신의 배보다 큰 고기를 배에 묶고 돌아오는데…….
바다로 나가고, 거대한 고기를 잡고, 집으로 돌아오다 상어들의 공격으로 뼈만 덩그러니 남은 청새치를 끌고 죽음과 같은 피로에 지쳐 돌아온 산티아고 노인. 하나의 의식처럼 치러낸 그의 이 행위가 우리에게 이토록 경이롭게 다가오는 이유는 뭘까.
언젠가 만화가 이두호 선생님을 뵈었을 때, 그분이 하셨던 얘기 한 토막.
늘 흥얼거리던 동요 한 곡이 어느 날 마음에 걸리더란다. “따르릉, 따르릉, 비껴나세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따르르르릉. 저기 가는 저 노인 꼬부랑노인” 아, 여기까지는 전혀 문제될 게 없었는데, 마지막 소절, “우물쭈물하다가는 큰일 납니다.”가 걸리더라고. 꼬부랑 노인을 조심조심 보호하자는 내용이 아니라 꼬부랑 노인에게 겁을 주는 노랫말이란 거였다. 노랫말이 뭔가 잘못 된 게 아닌가 싶으셨단다. 몇십 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불렀던 그 노랫말이 가시처럼 목구멍에 걸린 이유는, 나이가 들어서라고 하셨다.(최근에 머털도사가 중국자본으로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접했다. 축하드려요^^)
세상의 모든 일들은 어떤 눈으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참 달라 보이는 것 같다. 인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젊은 사람들과 나이 든 사람들이 인생을 대하는 자세는 무척 다르다. 어떤 태도가 옳은지, 그른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냥 많이 다르다. 나이가 들면 자신감과 치기가 넘쳐나던 젊은 시절에는 볼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이 눈에 보일 것 같다.
헤밍웨이는 사나이다운 삶을 살았던 작가다. 사냥과 낚시, 모험을 즐기고, 1,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내란이 한창인 스페인을 여행하며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젊은 시절 아프리카 대륙을 휩쓸며 사냥에 탐닉했고, 카리브 해의 돈키호테로 불릴 만큼 열정이 끓어 넘치는 사람이었던 것. 하지만 헤밍웨이가 비교적 만년에 창작한 <노인과 바다>는 이전 작품들과 사뭇 다르다. <노인과 바다>는, 열정적이고, 거칠고, 서사적인 다른 작품에 비해, 곰삭은 맛이 나는, 조금 지루할 정도로 단조로운 이야기를 담은 중편 소설이다. 이 작품에서 헤밍웨이가 창조한 ‘산티아고 노인’은 그가 더 젊었더라면 만들어내기 어려웠을 캐릭터일 것이다. 헤밍웨이는 이 작품을 쓰고 나서 이렇게 말했단다.
“내가 일생동안 하려고 했던 일을 마침내 이룬 것 같다.”
수많은 난관을 헤쳐 오며 삶을 살아낸 자들이 보는 인생은 어떤 모습일까?
바다와 같은 인생 한가운데서 묵묵히 자신의 역량을 훌쩍 뛰어넘는 거대한 고기와 싸워나가는 산티아고 노인. 그를 보면서, 인생이 무엇인지, 인간이 얼마나 강인한 존재일 수 있을지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망망대해에서 늙은 어부가 고기를 낚는 이야기라.
감칠맛 나는 재미를 기대하기란 당연히 어렵다. 솔직히 지루한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읽어내려 갈수록 묘한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담백한 문체도 문체려니와 바다 한가운데서 벌이는 노인의 사투가 꽤 긴박감을 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매력은 ‘산티아고 노인’이란 캐릭터에 있다. 그는 참으로 멋진 인간이었다. 세상과 같은 바다를 대하는 그의 태도, 바다 위의 새와 온갖 물고기와 나누는 대화, 자신의 적일 수도 있는 청새치와의 교감, 마침내 고기를 낚는 데 성공하지만, 수없이 밀려드는 상어들과 벌이는 또 한 번의 사투 등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도 늘 노인을 존경해온 소년 마노린의 눈으로 이 늙은 어부를 바라보게 된다.
처음 40일 동안 함께 했던 마노린의 부모마저 아들을 다른 배에 옮겨 타게 한다. 그러나 성과도 없고 가난한, 이 보잘것없는 늙은 어부에 대해 소년은 단호하게 말한다. 솜씨가 좋은 어부도, 훌륭한 어부도 더러 있지만, 할아버지가 세계 제일이라고. 그리하여 소년은 언제고 노인과 함께 바다에 나갈 일을 손꼽아 기다리며 노인을 돌본다.
마침내 노인은 85일째 나간 바다에서 어마어마하게 큰 청새치를 만난다. 청새치는 그날 노인의 미끼를 물었고, 얼마나 담대한 놈인지 미끼를 문 채 노인의 조각배를 끌고 다니다, 삼일째 되는 날, 노인의 작살에 목숨을 잃게 된다. 이 놀랄 만한 성과 때문에 노인을 존경하게 된 것이냐고? 물론 아니다. 노인에게 바다는 세상이며, 삶이며, 인생이다. 홀로 먼 바다로 나간 노인이 아주 작은 조각배에서 거대한 고기를 꿈꾸며 항해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삶에 대한 태도는 참으로 존경할 만한 것이었다.
우리 역시 산티아고 노인처럼 저마다 자신의 배를 끌고 인생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한 사람의 어부이다. 우리보다 앞서 고단한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늙은 어부 산티아고. 그가 보여준 초극(超克)의 의지가 여전히 고기를 찾아 표류중인 우리에게 무언의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티아고 노인은 덕목(德目)이 풍부한 존재다. 투지와 용기도 남다르고, 자신의 기술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다. 또한 견고한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이 청새치와 싸우는 과정에 그대로 묘사되고 있다. 자신의 조각배보다 더 큰 고기를 낚는 것.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왼손은 쥐가 나서 오그라 붙었고, 칠백 킬로그램이 넘는 놈을 노인의 몸으로 버텨내는 것은 분명 이기기 어려운 싸움이었다. 하지만 자신과 청새치,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우기로 결심한다. 조각배 안에는 달랑 목을 축일 물 한 병. 소금도 없이 바다에서 건져 올린 날치와 다랑어로 겨우 에너지를 얻고, 사흘 밤낮을 아무도 없는 바다 한가운데서 등에 줄을 매고 뜬눈으로 보냈으니, 초극의 의지를 지닌 인간이 아니라면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다.
노인은 힘들 때 옛 생각을 하며 용기를 얻는다. 카사블랑카의 술집에서 거인 검둥이와 팔씨름을 했던 일을. 손과 손톱 밑에서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하루 낮 하루 밤을 손을 맞잡고 씨름을 했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고, 주위 사람들이 무승부를 제안할 무렵, 그는 최후의 힘을 짜내어 이기고 만다. 노인은 꼭 하고 싶다는 생각만 있으면 누구하고든 이길 자신이 있는 투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사흘째 되는 날, 의식이 몽롱하고 속이 메스껍고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쇠약해졌을 무렵, 물 위에 고기가 배를 드러낸 채 떠있었고, 마침내 노인은 작살을 던져 고기의 숨통을 끊어놓는다. 드디어 노인은 승리를 거둔 것일까? 그러나 얼마 후, 고물에, 배 허리에 묶은 고기의 피 냄새를 맡고 상어 떼들이 몰려온다. 노인은 작살로, 밧줄로, 곤봉으로 차례차례 상어를 상대하지만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임을 알고 있었다. 상어떼는 청새치의 머리 부분만 남기고 모두 먹어치워 버린다. 날고기를 먹는 고결한 청새치를, 죽은 고기도 서슴지 않고 먹는, 게걸스러운 식욕을 가진 상어가 먹어치우는 것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노인은 생각한다. 좋은 일은 오래 가지 않는가 보다고,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고기 따위는 잡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그러나 노인은 말한다.
"인간은 죽을지는 몰라도 패배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 어떠한 운명에서든 결코 패배하지 않는 고귀한 의식을 지닌 존재인 산티아고 노인의 싸움도 끝을 맺는다. 앙상한 고기의 잔해를 달고 항구로 돌아오는 산티아고. 그의 이 지난한 싸움을 두고 우리는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그의 싸움은 패배한 것일까?
참으로 허탈하기 그지없는 결말이지만, 우리는 그의 싸움이 결코 패배가 아님을 알고 있다. 소년은 죽음과도 같은 피로 속에서 자고 있는 노인을 눈물을 글썽이며 바라본다. 남은 잔해만으로 사람들은 그 고기가 얼마나 대단한 놈이었는지 알고 있고, 산티아고 노인이 홀로 바다 한가운데서 그 큰 고기를 잡기 위해 얼마나 어떤 과정을 겪어냈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가 보여준 행위가 인간으로서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인정하기 때문이다.
노인은 청새치가 상어떼의 습격을 받을 때, 이 최악의 사태를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잡은 청새치가 식욕의 화신 상어의 습격을 받자, 청새치를 죽인 것이 죄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다 곧 모든 것은 무언가 다른 것을 죽이며 살아가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또 고기잡이라는 일이 자신을 살아 있게도 하고, 자신을 죽게 할 수도 있음을 떠올린다. 그러다 자신의 생계를 도와준 소년을 생각하며, “자신을 살아있게 만드는 것은 고기잡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보살핌과 사랑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거대한 청새치와 늙은 어부는 서로를 잇는 줄을 두고 팽팽히 맞선다. 어느 순간 그 줄 위에 새 한 마리가 쉬러 내려온다. 하지만 새는 너무 기진맥진해 보였다. 곧 이어 청새치가 움직여 그 새는 오래 쉬지도 못하고 날아간다. 노인은 그 작은 새 한 마리가 변변히 쉬지 못하는 것도 마음이 아리다. 노인은 자신과 싸우는 청새치에게도 존경과 사랑을 보낸다. 자신이 던진 미끼에 걸린 청새치가 너무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라고, 자신이 뭔가 먹을 때면 청새치도 무언가를 먹을 수 있길 기대한다. 그 고기를 침착하고, 고결하고, 아름다운 또 하나의 존재로 받아들인다. 청새치와 늙은 어부는 진한 연대감으로 묶여 있음이 전해져온다. 고기와 노인은 모두 거대한 자연의 일부이고, 그 속에서 둘은 자기 역할을 최선을 다해 해낸다.
어떻게 보면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결말인데도, 소설은 따뜻함으로 가득 차 있다. 결코 헛헛하거나 공허하지 않다. 그 이유는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 모든 존재가 서로를 버텨주며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바다 한가운데서 노인이 보여준 강인함, 담대함, 노련함,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초극하는 불굴의 의지 등은 인생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우리에게 인간이 얼마나 강인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만년의 헤밍웨이는 산티아고 노인을 빌어 이 말도 우리에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나이 듦은 분명 젊음을 앗아가지만 그 대신 새로운 혜안을 선사하고 있음을 새삼 느끼게 해준 작품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