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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나 May 01. 2016

야성의 현자(賢者), 조르바

06. 니코스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를 살다간 두 거인 카잔차키스와 조르바는 21세기를 맞은 나에게 여전히 현실이다.”_번역한 작가 이윤기

내 글로 그를 형용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카잔차키스가 단숨에 써내려간 그에 대한 이 긴 연대기를 두고. 그러나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일생에 한번은 꼭 그 사내를 만나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내의 이름은 조르바다. 



대문호의 작품을 글 재료로 삼는 일은 솔직히 늘 어렵다. 그런데 오늘은 어려움을 넘어 두려움 같은 게 와서 주춤주춤 물러서게 만든다. 책은 통쾌하게 읽었다. 소설을 읽는 며칠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 예순도 넘은 이 늙은 사내에 대한 생각이 내 안을 들락날락했다. 늘 하던 사소한 행동들을 종종 조르바라는 거울에 투영해보기도 했다. 그러면 어느 틈엔가 조르바가 거친 말투로, 그러나 표현할 길 없는 진득한 사랑으로, 어깨를 툭 치며 한마디 할 것 같았다. “쪼잔한 생각은 악마나 물어가라지. 열심히 먹고, 싸고, 지금 하는 일을 어정쩡하게 하지 말고 몸을 던져 해버려.”

조르바의 거친 육성들은 내 심장 속에서 펄펄 뛰었다. 대체 이 기이하고도 위대한 ‘진짜 사내’ 조르바에 대한 얘기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카잔차키스가 열정에 휩싸여 한달음에 그려낸 이 기상천외한 초인의 상을 흩뜨려 놓는다면 그건 정말 큰 죄가 아니던가. 생생한, 날것 그대로의, 하지만 삶과 세계의 본질을 육신을 던져 통찰한 조르바를 구태의연한 해설의 틀 속에 가두는 건 정말로 끔찍한 일이지 않은가 말이다.  

조르바를 설명하는 이 글은 아무리 생각해도 사족(蛇足)일 수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그리하여 이번만큼은 이 글을 읽기 전에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열독하기를, 다음과 같은 조르바의 육성들을 실컷 들어두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니코스 카찬차키스의 페르소나, 오그레

<그리스인 조르바>는 카잔차키스가 쓴 실존 인물 조르바의 연대기요, 다른 한편으로는 카잔차키스 자신의 생애를 그린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은 전형적인 책상물림인 젊은 지식인 ‘나’(오그레)가 우연히 포구의 한 식당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 조르바와 우연히 만나 함께 생활하며 광산사업을 벌이다 들어먹은 이야기다. ‘나’가 당대 지성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페르소나라고 본다면 이 소설은 ‘나’의 자전소설이면서 동시에 조르바의 임박한 죽음을 감지하고 한달음에 써내려간 조르바의 연대기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에겐 조금 낯선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의 대표적인 지성인이다. 지중해 문명의 발상지인 크레타 섬에서 태어난 그는 전 생애를 조국 그리스를 축으로 여러 나라를 누비며 방황했고, 그 방황의 여정을 33,333행의 대서사시로 써내려간 시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거부한 이단아였고, 호메로스와 베르그송과 니체에 매혹된 사상가요 실천적 혁명가이기도 했으며 인류의 또 다른 구원자 부처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기도 했다. 

카잔차키스의 삶은 영원히 모순되는 반대 개념에서 하나의 조화를 창출하려는 끊임없는 투쟁으로 이루어진다. 신과 인간, 천사와 악마,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 보이는 존재와 보이지 않는 존재, 내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등. “우리가 카잔차키스의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가파른 투쟁의 오르막길 굽이굽이에서 그가 피워낸 꽃이라고 할 수 있다.”(이윤기)   

카잔차키스는 어느 날 펠로포네시안 광산에서 조르바를 만난다. 지식의 세례라고는 전혀 받은 바 없는 무식쟁이 조르바. 하지만 세상의 누구보다도 인간다운 냄새를 푹푹 풍기는 조르바는 카잔차키스의 영혼을 달래주었다. 

“내 삶을 풍부하게 해준 것은 여행과 꿈이었다. 내 영혼에 깊은 골을 남긴 사람이 누구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꼽을 것이다.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조르바.”_<영혼의 자서전> 중에서

카잔차키스는 사회복지부장관 신분으로 소련을 방문할 때 그를 대동할 정도로 그를 아꼈고 한다. 또한 “... 힌두교도들은 ‘구루(사부)’라고 부르고 수도승들은 ‘아버지’라고 부르는, 삶의 길잡이를 한 사람 선택해야 했다면” 틀림없이 조르바를 택했을 것이라고 했다. 덧붙여 “주린 영혼을 채우기 위해 오랜 세월 책으로부터 빨아들인 영양분의 질량과, 겨우 몇 달 사이에 조르바로부터 느낀 자유의 질량을 돌이켜볼 때마다 책으로 보낸 세월이 억울해서” 격분하고 쓰라렸다고도 했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원시적인 배짱’이 두둑한 조르바를 내세우고, 그 옆에 조르바가 “가망 없는 펜대 운전사”라 불렀던 자신의 페르소나 오그레를 대비시켜 곰삭혀온 자신의 철학을 <그리스인 조르바>에 모조리 토해내기에 이른 것이다.

소설 속의 사유가 조르바의 것이든 카잔차키스의 것이든, 결국 이 책은 삶을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고, 어떤 식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는 철학적인 소설이다. 

나는 스무 살 언저리에 이미 조르바를 한번 만난 적 있었다. 희미한 기억 속의 조르바는 야성의 열정이 끓어 넘치는 기막힌 사내였다. 하지만 나이 들어 다시 만난 조르바는 조금 달랐다. 세상의 경험이 마련해준 선물 덕에 더 밝아진 눈으로 보니, 조르바는 야성의 열정을 지니고 있되 세계와 삶의 본질을 간파한 현자(賢者)의 모습이었다.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내, 조르바

알렉시스 조르바. 뺨은 움푹 들어갔고, 광대뼈는 툭 튀어나왔으며, 잿빛 고수머리에 눈동자가 밝고 예리한 사내. 그는 손가락이 하나 없다. 한때 흙덩이를 녹로에 돌려 도자기를 만드는 일에 빠졌는데, 녹로를 돌리면 손가락이 번번이 끼어들어 작업을 망쳐버린다고 손도끼를 쳐들어 제 손가락을 날려버린 사내다.

또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쪼글쪼글 늙고 천박한 퇴물 창녀 오르탕스 부인한테도 홀딱 빠진다. 제 말로 결혼은 공식적으로 한번 했고, 비공식적으로는 천번, 아니 3천번쯤했다니, 우리의 상식으로는 당연히 부도덕한(?) 사내다. 그뿐이면 다행이게. 신념이 흔들린 수도사를 부추겨 수도원을 홀라당 태워먹게까지 하였다.  

어떤가? 이런 사람을 두고 현자라고 해야 하나? 

솔직히 말하면 일정한 도덕률의 틀 속에서 온전하게 제 몫의 삶을 누리는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도덕과 규범이라는 형식적 틀 밖의 조르바를 이해하기 버거울 수도 있다. 절대 자유의 초인이란 수식도 어림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만일 기독교인이라면 더더욱 조르바를 감당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을 거다. 하지만 이는 카잔차키스가 경유한 철학적 고뇌와 내공을 흡수할 힘이 부족한 거라고 보는 편이 맞을 듯싶다. 어째서 그런지는 잠시 뒤로 미뤄두고 내가 동의한 조르바는 이렇다.   

나는 자신이 하는 일에 혼을 다하느라 손가락을 끊어내는 고통을 감수한 그의 영혼이 진정 자유로워 보인다. 일에 몸을 빼앗기면 머리꼭지부터 발끝까지 잔뜩 긴장해 돌이 되고 석탄이 되고 산투리가 돼버리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그의 일갈이 여전히 귀에 쟁쟁할 뿐만 아니라 툭 하면 잔뜩 뒤로 빼려는 내 엉덩이를 냅다 걷어차 준다. 


“일을 어정쩡하게 하면 끝장나는 겁니다. 말도 어정쩡하게 하고 선행도 어정쩡하게 하는 것,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 다 그 어정쩡한 것 때문입니다. 할 때는 화끈하게 하는 겁니다. 못하나 박을 때마다 우리는 승리를 해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악마 대장보다 반거충이 악마를 더 미워하십니다.”


게다가 오르탕스 부인에 대한 태도는 감동이다. 그는 퇴물 창녀다. 천박한 화장을 두껍게 칠한 늙고 뚱뚱한, 볼품없는 여자다. 하지만 조르바는 그 얼굴 뒤에 숨겨진 여자의 영혼을, 진면목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화장범벅의 그녀의 얼굴을 두고 그것은 “덧없는 순간의 투명한 가면에 지나지” 않다고 했고, 그래서 그 가면을 찢고 본래의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는 사내다운 사내였다. 그는 모든 여자들을 그렇게 대했다. 과부든, 늙든, 젊든, 천하든, 뭐하든 이 투명한 가면 너머에 숨겨진 여자들 각자의 위엄을 볼 줄 알았고, 그들에게서 신성하고 신비스러운 아프로디테의 얼굴을 떠올리는 그런 사내였다.

조르바의 거칠고 질박한 말들과 이중섭의 들소를 떠올리게 하는 순수한 저돌성들. 그가 그렇게 열정적으로 삶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세계를, 인간의 숙명을 간파한 때문이었다. 늘 보는 나무, 꽃, 냉수 한 컵을, 매일 보는 사물을 처음 보듯 놀라는 조르바. 그의 생명력은 여기서 불을 뿜는다. 말로 표현되지 않으면 춤을 춰버리는 호쾌한 사내, 조르바. 카잔차키스는 이 구원의 오아시스 같은 사내에게서 그가 평생 꿈꿔온 양립할 수 없는 모순된 개념들 너머에서 일어나는 변화, 메토이소노*를 비로소 찾아냈다. 

그리하여 책벌레 오그레(카잔차키스)는 이런 깨달음에 도달한다.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것인가.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은 다 품은 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 성탄절 잔치에 들러 진탕 먹고 마신 다음, 잠든 사람들에게서 홀로 떨어져 별은 머리에 이고 뭍을 왼쪽, 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해안을 걷는 것…, 그러다 문득, 기적이 일어나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동화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


어떻게 하면 ‘그리스인’으로 살 수 있나

카잔차키스는 이 천연적인 인간 조르바 앞에 ‘그리스인’이란 수식어를 붙였다. 이는 한국사람이라 한국인이라 붙인 것과는 좀 다른 의미다. 무얼 두고 ‘그리스인’이라 부르는지 따져보려면 거칠지언정 카잔차키스가 크게 영향을 받은 니체를 불러와야 할 것 같다. 

카잔차키스는 니체의 ‘초인’을 인류의 희망이라 부르면서 자서전에 이렇게 쓰고 있다. 


“구원의 문은 우리 손으로 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우리에게 ‘초인’은 희망이다. ‘초인’은 대지의 종자이며, 해방은 그 종자 속에 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우리를 심연의 가장자리로 데려다 놓았다. 인간은 마땅히 저 자신의 본성을 뛰어넘어 하나의 초인이 되어야 한다. 신의 빈자리를 우리가 차지해야 한다. 주인의 명령이 없어진 지금, 우리 의지로써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여기서 말하는 ‘초인’은 초월을 완성시킨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투쟁하는 인간이다. 카잔차키스에게 조르바는 바로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었던 셈이다.  

니체는 잘 알려진 것처럼 ‘신의 죽음’과 ‘허무주의’를 외쳤던 철학자다. 하지만 우리가 따져봐야 할 것은 그 말 너머에 있는 진짜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데 있다. 니체가 말하고자 한 것은 신의 죽음이 아니다. 신에게만 의지하는 나약한 인간에 대한 비판이요,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부단히 극복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일갈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처절한 몸짓으로 보여준 반역과 저항은 진정한 긍정과 화해를 위한 것이었다. 즉, 니체의 이 허무주의적 사상에 내재한 것은 이 지상의 삶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라고 볼 수 있다. 

니체는 대지에 굳게 뿌리내리고 이 순간의 삶에 순수하게 몰입하는 것, 바로 이것이 진정으로 삶을 사랑하는 자라고 보았고, 그런 사람들을 ‘희랍인(그리스인)’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그와 반대의 경우를 싸잡아서 ‘유대인’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말하는 희랍인이나 유대인은 하나의 대표적 개념을 안은 일반 명사란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의 사상에 기대면 희랍인(그리스인)은 우리가 유한한 생명을 끌어안고 뒹구는 대지의 모든 것을 긍정하는 자의 별명이며, 유대인은 오직 요단 강 너머의 피안만을 연모하며 이 땅에서는 오로지 회개와 기도, 눈물과 한숨만으로 살아가려는 자의 이름을 말한다. 

니체는 삶을 사랑하는 것은 결국 희랍인으로 사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수사의 수도원 방화를 독려 혹은 방관한 조르바의 태도는, 바로 금욕을 앞세운 이 몽매한 기독교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면 무방할 것 같다. 

카잔차키스가 조르바 앞에 ‘그리스인’이라 붙인 것은, 바로 조르바가 니체가 말한 그리스인이었기 때문이고, 그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해 어떻게 하면 그리스인으로 살 수 있는지 조르바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TV에서 세계여행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리스와 그리스인들이 나왔다. 바다는 눈부시게 푸르렀고, 하늘은 그린 듯이 맑았다. 청량한 바람이 하늘거리는 나무 아래 마을 사람들이 모여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있었다. 어린 아이들이 뛰놀았고, 젊은 축도 있었지만, 인상적인 건 노인들의 얼굴이었다. 몸은 우람하고 건장했는데 여유로운 웃음이 넘쳐나고 있었다. 소박했지만 삶을 더없이 풍부하게 즐기고 있단 게 한눈에 보였다. 나는 그리스의 자연보다 그들의 평범한 삶이 더 부러웠다. 

즐겁고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그리스인들, 조르바는 그들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거다.   


우리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어야 하는 이유

물론 나는 ‘조르바식’이란 말을 사랑한다. 조르바식으로 생각하는 데는 동의했고, 조르바식으로 행동하고 싶지만, 그건 좀 어려워 보인다. 아무튼 조르바식으로 살고 싶다. 뭐가 조르바식이냐고? …세계와 인간의 삶의 본질을 간파한 힘으로 현재의 삶을 통쾌하게 즐기는 것 아닐까? 

우리가 사는 세계를 둘러보라.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의 내 모습을 반추해보라. 나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넘쳐나는 지식과 정보로 무장한 채 숨가쁜 속도전을 치러내고 있다. 물론 이 복잡다단한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우리들은 모두 나름의 인생관을 설계하고, 나름의 가치관을 곧추세운다. 

하지만 더 진지하게 우리들의 모습을 돌아보면 모두들 지식의 높이에 치여 정작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다. 어정쩡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잃은 채 현상에 급급해하며 어떤 것에도 온 힘을 다하지 않는다.  

조르바는 책벌레 오그레에게 이렇게 다그친다.

“내가 보기에는 두목은 배고파 본 적도, 죽여본 적도, 훔쳐 본 적도, 간음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그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세상 돌아가는 꼴을 알 수 있겠어요? 당신 머리는 순진하고 살갗은 햇빛에 타보지 않았어요.”

그리하여 오그레는, “내 인생은 한갓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걸레를 찾아 내가 배운 것, 내가 보고 들은 것을 깡그리 지우고 조르바라는 학교에 들어가 저 위대한 진짜 알파벳을 배울 수 있다면…. 내 인생은 얼마나 다른 길로 들어설 것인가.”라고 되뇐다. 

지식의 세례 따위는 받은 일 없는 호쾌하고 농탕한 사내 조르바. 

그에게서 진정 자유로운 삶이 무엇이고,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언지 배워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한번뿐인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지 않을까?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를 살다간 두 거인 카잔차키스와 조르바는 21세기를 맞은 나에게 여전히 현실이다.”_번역한 작가 이윤기(끝)




*메토이소노 혹은 거룩하게 되기

카잔차키스의 이름을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려 놓은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인생과 작품의 핵심에 위치하는 노른자위 개념이자 그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가치의 하나인 ‘메토이소노(聖化)’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메토이소노’는 ‘거룩하게 되기’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육체와 영혼, 물진과 정신의 임계 상태 저너머에서 일어나는 변화, 이것이 ‘메토이소노’다. 물리적, 화학적 변화 너머에 존재하는 변화, ‘거룩하게 되기’가 바로 이것이다. 포도가 포도즙이 되는 것은 물리적 변화다. 포도즙이 마침내 포도주가 되는 것은 화학적인 변화다. 포도주가 사랑이 되고, ‘성체’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메토이소노’다. 

하나의 예를 들면, 조르바는 카잔차키스에게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두목, 음식을 먹고 그 음식으로 무엇을 하는지 대답해 보시오. 두목 안에서 그 음식이 무엇으로 변하는지 설명해 보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려드리리다.”

조르바는 그것으로 일과 좋은 유머에 쓴다고 했다. 이것이 메통이소노다.(이윤기 해설 참조)


>> 니코스 카잔차키스(1885~1957)

시인, 소설가, 사상가, 정치가. 그를 평생 휘몰았던 강렬한 충동은 희랍적(그리스적) 영광의 재현이었다. 그가 <오디세이>를 새롭게 쓴 것이나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것은 순전히 이런 이유에서다. 쪽빛 바다에 떠 있는 붉은 바위와 같은 그의 고향 크레타에서 은거하며 써내려간 많은 작품들은 비록 그리스 문명의 르네상스를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지만 세계의 수많은 독자들에게 희랍 정신의 저력을 되새기도록 해주었다. 다른 작품들로는 <돌의 정원> <자유냐 죽음이냐> <그리스 최후의 유혹>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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