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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나 May 22. 2016

아스라이 사라진
개츠비의 꿈, 미국의 꿈

06.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그럼 황금 모자를 쓰려무나, 그래서 그녀의 마음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높이 뛰어오를 수 있거들랑 그녀를 위해 높이 뛰어오르려무나,

그녀가 이렇게 외칠 때까지 “사랑하는 이여,

황금 모자 쓰고 높이 뛰어오르는 사랑하는 이여,

당신을 차지해야겠어요.” -토머스 파크 딘빌리어스


사랑하는 데이지를 되찾기 위해 ‘황금 모자 쓰고 높이 뛰어’올랐던 개츠비. 하지만 그의 화려한 비상은 허무한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가문도, 학벌도, 재산도 볼품없던 시절, 개츠비는 우연히 하얀 궁전 저 높은 곳에 사는 황금의 아가씨 데이즈를 만나고, 가진 것이 없어 헤어져야 했던 그는 데이지를 되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마침내 거대한 부(富)를 손에 쥐고 데이지를 다시 만난 개츠비.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어떤 존재일까? 왜 데이지는 무지개처럼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버렸던 것일까. 데이지라는 꿈을 좇았던 개츠비를 형용한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는 누군가에게는 반어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고전문학에 속하는 어떤 작품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면 그와 연관된 어렴풋한 느낌이 함께  떠오른다. 어렸을 때 얼치기로 읽은 경험 때문이거나, 읽은 적은 없지만 대략적인 줄거리를 알아서 이렇게 저렇게 생긴 일종의 선입견인 셈이다. <데미안>을 비롯한 헤세 작품을 생각하면 섬약한 젊은이들의 지적 방황이 떠오르고, <오만과 편견> 하면, 살짝 허영에 들뜬 처녀들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리고 대개 그 ‘선입견’들은 약간의 매혹으로 가슴속에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위대한 개츠비>는 어떤가? 솔직히 위대한 개츠비는, 위대하기는커녕 흥청거리는 파티에 젖어 있는 퇴락(頹落)한 미국의 졸부 모습으로 떠오른다. 이런 인상은 스무 살 무렵에 읽었던 기억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 퇴락한 졸부 이야기를 왜 다시 읽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몇 번씩이나 들었다. 그러다 문득 어쩌면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나쁜 선입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다시 했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몇 년 전 뉴욕의 랜덤하우스 출판사의 편집위원회가 20세기에 영어로 쓰여진 가장 위대한 소설을 선정할 때,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다음으로 꼽은, 현대 미국 소설의 첫걸음으로 평가받는 소설이다. 1930년대의 미국의 삶을 이해하려면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읽어야 하듯, 1920년대의 미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대한 개츠비>를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제이 개츠비가 지녔던 야망과 그가 이루려 했던 이상(理想)은 비단 개츠비 개인의 것이 아니며, 또한 개츠비를 창조해낸 작가 피츠제럴드의 개인적 경험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반증하는 것이다. 

개츠비가 허망한 죽음을 맞이하고, 그의 죽음을 지켜본 유일한 친구 닉(일인칭 화자 닉 캐러웨이)은 웨스트에그를 떠나기 직전 개츠비의 대저택 계단에 앉아 생각한다.  


나는 그곳에 앉아 그 오랜 미지의 세계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개츠비가 부두 끝에 있는 데이지의 초록색 불빛을 처음 찾아냈을 때 느꼈을 경이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는 이 푸른 잔디밭을 향해 머나먼 길을 달려왔고, 그의 꿈은 너무 가까이 있어 금방이라도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으리라. 그 꿈이 이미 그의 뒤쪽에, 공화국의 어두운 벌판이 밤 아래 두루마리처럼 펼쳐져 있는 도시 저쪽의 광막하고 어두운 곳에 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개츠비가 보여주었던 현실의 상(像)은 허점투성이일지 모른다.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으고, 남의 아내가 된 첫사랑을 되찾으려 하는가 하면, 현실적인 감각도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개츠비가 품었던 낭만적 이상만은 쉽게 평가절하기 어렵다. 소설의 화자인 닉은 작품 서두에서 개츠비가 가진 탁월함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였다.


개츠비는 내가 드러내놓고 경멸해 마지않는 모든 것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만약 개성이 일련의 성공적인 몸짓이라면 그는 뭔가 멋진 것을, 마치 1만 마일 밖에서 일어나는 지진을 감지하는 복잡한 기계와 연결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삶의 가능성에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 그것은 희망에 대한 탁월한 재능이요, 다른 어떤 사람에게서도 일찍이 발견된 적 없고 앞으로도 다시는 발견할 수 없는 낭만적인 민감성이었다. 


왜 닉은 초지일관하게 개츠비를 두둔하고 나선 것일까? 생전의 개츠비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면서 닉은 이렇게 말한다. “그 인간들은 썩어빠진 족속이오. 당신 한 사람이 그들을 합쳐놓은 것만큼이나 훌륭합니다.” 닉은 개츠비를 형용한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결코 반어적인 것이 아님을 인정한 유일한 등장인물이다.


‘위대한’ 개츠비, 과연 그는 어떤 인물인가? 

작품 속에서 개츠비를 만나려면 적어도 제4장(이 작품은 총9장으로 구성돼 있음)은 지나야 한다. 개츠비라는 인물의 윤곽은 좀체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일인칭 화자 닉의 옆집 주인이라는 사실 외에는. 개츠비는 어마어마한 대저택의 소유자로, 그 저택에서는 날마다 화려한 파티가 성대하게 열린다. 그뿐이다. 그에 대해서 소문만 무성할 뿐 사람들 사이에 그는 불가사의한 존재이다. 본격적으로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가 드러나는 4장 이후에야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기까지 읽어내기도 쉽지는 않다. ‘1920년대 미국’이라는 시공간적 배경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참 의미 없는 에피소드같이 느껴진다. 특히 이스트에그와 웨스트에그에 대한 설명은 미국의 동부와 중서부 지역의 차이를 보여주는 데 이에 대한 설명은 우리에겐 아득한, 먼나라 이웃나라의 얘기로 들린다.

개츠비라는 인물에 대해 소설은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다만 보잘것없는 신분의 사람으로 데이지라는 상류계급의 미모의 아가씨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 정도. 가진 것이 없어서 헤어져야 했던 데이지는 개츠비에게는 너무나 매혹적인 이상이었다. 개츠비는 오로지 그 이상을 위해 온 생애를 바친다. 

도대체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어떤 존재였기에 자신의 온 생애를 바치려 하는 것일까.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절대적이며 종교적인 존재에 가깝다. “그러니까 그녀(데이지)의 불만스러운 눈빛 한 번에 그만 대저택 전체가 카드로 만든 집처럼 폭삭 주저앉아 버리고” 말 정도였다. 데이지가 교통사고를 내고 돌아와 이미 그를 배신하던 순간에도 그녀의 안녕을 지키기 위해 개츠비는 그녀의 침실 아래 어두운 정원을 쉽게 떠나지 못한다.  

잠시 소설의 다른 등장인물들을 한번 살펴보자. 톰과 데이지는 이미 도덕적 불감증 상태다. 톰은 정부가 있었고, 데이지는 그런 톰을 물질적 풍요를 위해 떠나지 않는다. 또한 자신이 낸 사고에 대해 함구한 채 개츠비의 죽음조차 외면하는 비정한 인물이다. 개츠비의 사업파트너인 울프심은 조직 폭력계 두목이고, 그 역시 개츠비의 장례에조차 참석하지 않는다.  닉이 잠깐 만난 골프선수 조던은 골프 시합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경기를 하는 등 ‘구제할 수 없을 만큼 부정직’한 인물이다. 톰의 정부 윌슨과 그녀의 여동생 역시 마찬가지다. 

개츠비의 이상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과연 데이지가 그의 온생애를 바쳐 되찾으려 한 만큼 가치가 있는 인물인지는 잠시 보류하자. 개츠비의 이상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고, 그 꿈을 성취하기 위해 취했던 방법들이 부도덕한 것이었을망정, 개츠비가 자신의 꿈을 성취하기 위해 보여준 헌신적인 노력은 톰과 데이지를 비롯한 다른 인물들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동과 비교하면 차라리 숭고하게 느껴진다. 

데이지를 되찾으려는 그의 무모한 시도를 두고, 닉이 과거는 반복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지만, 개츠비는 흔들림 없이 말한다. “과거를 반복할 수 없다고요? 아뇨, 그럴 수 있고 말고요.” 

적어도 꿈과 환상을 간직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온갖 희생을 무릅쓴다는 점에서 개츠비는 ‘위대한’ 것이다.

개츠비가 이 부조리한 세계를 살아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뭐였을까? 또 그가 돈과 성공에 대한 집념을 불태웠던 이유는? 물질적 부와 명예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가슴 깊이 품고 있던 이상과 꿈을 얻기 위해서였다. 개츠비가 품은 꿈은 다름 아닌 ‘데이지’였다! 그리고  ‘데이지’는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퇴락해가는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상징이었다. 

데이지와 아메리칸 드림이라? 이 낯선 두 단어가 어떻게 하나의 연결고리로 이어질 수 있을까?  개츠비의 허망한 죽음은, 돈이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황금만능주의, 청교도주의의 정신적 가치를 모두 상실한 채 물질적 가치만 숭상되던 당시 미국의 가난한 청년들의 공통된 꿈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말해준다. 데이지와 아메리카드림을 하나의 상징으로 이어낸 것. 피츠제럴드의 이 문학적 성취가 바로 <위대한 개츠비>를 미국 문학의 첫 걸음이 되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어떤 존재일까? 이 물음은 <위대한 개츠비>의 핵심적 주제에 다다를 수 있는 중요한 열쇠다.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어떤 존재인가-망가진 아메리칸 드림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모든 것을 다 바쳐 이루려했던 꿈이었고, 환상이었고, 종교와도 같은 신성한 것이었다. 데이지와 나누었던 순수한 사랑에 대한 희구가 그의 이상이었다. 그래서 미국 중서부 빈농의 아들 제임스 캐츠는 데이지를 되찾기 위해 스스로 제이 개츠비가 되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산을 일궈냈다. 금주법이 시행되던 시대에 밀주를 판매하고, 훔친 증권을 팔고, 도박으로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그에게는 데이지라는 꿈이 있었기에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돌이킬 수 없다며 그의 맹목적인 환상에 닉이 반문을 제기해도, 그는 과거를 되찾을 수 있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가 꿈꾸었던 데이지는 물질적 욕망 그 자체였다. “데이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물론 “그가 난생처음으로 알게 된 ‘우아한’ 여자”였지만, 그는 “‘우아한’ 여자가 도대체 어느 만큼이나 특별할 수 있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데이지는 톰만큼 경솔한 인간이었고, 무책임한 인물이었으며, 물질적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꿈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 허망한 것이었고, 개츠비의 죽음도 그 꿈만큼 허망한 최후를 맞이한다. 첫사랑을 둘러싼 신흥 부자 신사 개츠비의 사랑과 죽음을 다룬 이 한 편의 소설이 어떻게 대표적인 미국문학 작품이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개츠비가 지닌 꿈이나 환상이 작가 피츠제럴드의 꿈이기도 했고, 당시 미국의 가난한 청년들의 공통된 꿈이기도 했던 것이다. 즉 개츠비와 피츠제럴드의 꿈은 개인적 차원의 의미를 넘어 국가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의 꿈과 이상은 상징적으로 ‘미국의 꿈’으로 이어진다. 

미국의 꿈, 아메리칸 드림, 광활한 신대륙이 국가의 모습을 갖추고 오늘날과 같은 세계적 패권국가가 되기까지에는 수많은 이민자의 유입이 필수적이었다. 근면하고 성실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아메리칸 드림이었다. 개츠비가 죽고 찾아온 그의 늙은 아버지는 개츠비가 프랭클린의 삶의 방식을 따르려 했던 영특한 소년이었다고 말한다. 물질적 성공 신화는 어떤 면에서 미국을 움직여온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물질적 성공은 ‘미국의 꿈’을 금세 변질시키고 만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정착했던 이들이 정신적 가치는 그 자리를 잃고 만 것이다.

건너편에 서서 부두 끝에 있는 ‘데이지의 초록색 불빛’이 처참하게 사그라들듯 청교도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그 초록의 꿈은 빛을 잃고 만 것이다. 개츠비는 바로 변질된 ‘미국의 꿈’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의 20년대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나

피츠제럴드는 언젠가 미국에 멋진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데 큰 희망을 걸고 있지만 그러한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뒤, 미국은 ‘결코 뜨지 않는 달’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한 미국의 삶에는 오직 1막만이 있을 뿐 2막은 없다고 밝힌 적도 있다. ‘미국의 꿈’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단적으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김욱동의 <작품해설> 중에서)


왜 피츠제럴드는 미국의 꿈에 대해 이렇게 회의적이었을까?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인 1920년대의 미국은 어떤 사회였을까? 1차 세계대전을 치른 상흔이 유럽 전역을 뒤덮고 있는 동안 미국은 경제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이루어냈다. 특히 상류 계층에게는 재산을 증식할 수 있는 최적의 시대였다. 증권 시장이 활황이었고, 고급 승용차가 넘쳐났으며, 누구나 꿈을 꾸면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시대였다. 사람들은 돈이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황금만능주의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있었다. 물질적 풍요의 그늘에서는 향락주의, 도적적 타락, 허무주의가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었다. 그 정점에서 미국의 20년대의 빛과 그늘을 실감나게 표현한 유일한 작가가 바로 피츠제럴드였다. 그런 그를 두고 *‘재즈 시대의 왕자’라고 불렀다.  

대개 문학작품을 이해하기에 앞서 우리는 작가 연대기를 읽는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작가 개인과 주변의 인물, 작가가 살았던 내력이 작품 속에 투영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피츠제럴드의 경우에는 개츠비의 연대기가 바로 피츠제럴드의 것으로 읽힌다. 신기하게도 두 사람은 가난을 딛고 화려한 생활을 누리다 허망한 죽음을 맞이한다. 작가 자신이, 개츠비가 자신의 생을 통해 보여준 것은 무엇일까? 황금으로 치장한 물질적 가치라는 것이 과연 생을 걸 만큼 가치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과연 진정한 우리의 이상이 될 수 있는지 묻는다. 현란한 20년대는 29년 대공황이라는 직격탄이 기다리고 있었다. 

20년대 미국 사회는 물질적 풍요를 얻는 대신 청교도적 가치로 대변되는 정신적 가치를 잃어버렸다. 책을 덮고, 잠시 숨을 고르고 보니, 그에 못지않게 전통적인 공동체적 가치를 잃어버린 우리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니,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물질적 가치가 세상의 기준이 되고 있다. 이 땅 어디에선가 개츠비가, 피츠제럴드가 데이지를 꿈꾸고, 젤다를 꿈꾸다 허망하게 죽어가고 있을 것 같다는 환상이 머릿속에 맴돈다.  (끝)



**재즈시대란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세계대전을 겪은 뒤 서구 문명 자체에 깊은 회의를 보이면서 재즈에 심취하던 미국의 1920년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피츠제럴드는 1896년 미국의 중서부 지방에서 태어났다. 외가 쪽은 부유했으나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피츠제럴드는 가난한 소년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 때문에 돈과 성공에 대한 꿈은 평생의 집념이 되었다. 가난한 학생시절을 보내던 그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육군소위 시절, 판사의 딸 젤다 세이여를 만난다. 그녀와 약혼까지 했으나 돈이 없었기 때문에 결혼을 할 수 없었고, 1920년 <낙원의 이쪽>으로 명성과 돈을 얻고서야 젤다와 결혼하게 된다. 그후 그는 아내와 함께 뉴욕, 파리 등을 전전하며 화려한 생활을 하면서 건강과 재능을 소모하기에 이른다. 그러다 아내 젤다의 정신이상이 심해져 문학의 제일선에서 타락하게 만들던 중 기적적으로 <위대한 개츠비>라는 걸작을 만든다. 그러나 그후 30년대의 대공황을 계기로 크게 변모한 미국사회는 그의 문학을 상대해주지 않았고, 그 또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다 40년 11월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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