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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나 May 23. 2016

햄릿, 존재의 양면성에 번민하는
전체 인간의 전형

07. 셰익스피어, <햄릿>

아버지를 독살하고 어머니를 취한 숙부 클로디어스, 남편을 잃고 두 달 만에 남편의 아우와 결혼한 어머니 거트루드, 부패한 덴마크에서 권력을 쥐려 전전긍긍하는 재상 폴로니어스…. 형을 독살하고 왕권을 찬탈한 클로디어스의 덴마크는 거짓 가면 속에 추악한 실재를 감추고 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이상주의적이었던 햄릿은 ‘순리에 맞는’ 복수를 명받는다. ‘햄릿형 인간’이란 말은 햄릿에 대한 단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우유부단함은 생각을 너무 많이 한 탓이 아니라, 생각을 잘 하는 지적인 능력 탓이다. 그가 망설인 진짜 이유는, 인간의 삶을, 인간 행위의 본질을 깨우쳐서다. 



 

문학작품을 두고 자유롭게 토론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쉽다. 말은 입에서 나온 순간 흩어져 날아가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과의 소통이 전제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에 대한 글쓰기는 매번 어렵다. 그나마 글을 쓸 수 있는 건, 이 글이 작품에 대한 본격적인 비평이 아니라 자유로운 소통을 위한 글쓰기라는 사실에 기대서다.   

<햄릿>을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이유는, 이런 어려움에 직면할 용기가 선뜻 나지 않아서였다. <햄릿>은, 나라와 시대를 초월해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기 때문에 그 전모를 밝히는 일이 불가능한데다 작품이 포괄하고 있는 주제의식에 닿는 길이 여러 갈래다. 또한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통해 말하려 하는 바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꼼꼼히 깊이 있게 다가가야 한다. 그런데도 다시 <햄릿>을 읽으면서 용기를 낸 이유는 하나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햄릿’과 셰익스피어의 극 중에 살아 있는 ‘햄릿’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  

흔히 ‘햄릿형 인간’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햄릿형 인간’이란 생각이 깊고 행동이 지나치게 신중해 우유부단한 사람, 또는 과잉의식에 사로잡혀 쉽게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 즉 근대 지식인의 원형이라고도 할 내향적 성격의 사람을 말한다. 한마디로 행동하지 못하고 쭈뼛거리는 우유부단한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햄릿이 어마어마한 비극에 휩쓸려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이유는 햄릿이 생각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에 빚어진 비극이라고 말한다. 

햄릿이 우유부단함 때문에 죽었다고? 정말 그럴까? 지나친 단견이다. 


흔히 <햄릿>의 주인공 햄릿이 생각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에 결심을 할 수 없게 되어 빚어지는 비극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햄릿이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너무나도 잘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너무나도 뛰어난 지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아마도 세계의 모든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지적으로 가장 뛰어난 등장인물일 것이다. _<햄릿의 허무주의>(정재문)


햄릿을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가장 지적인 인물이라고 말한 이유는 뭘까?

거짓과 허위가 혼재하고, 겉치레와 실재가 뒤섞여 있으며, 이성과 열정이 혼재하는 인간사, 복수를 감행해야 하는 햄릿은 그 과정에서 도저히 양립할 수 있는 이러한 대립을 끊임없이 보여줌으로써 우리 인간의 행위의 본질이 무엇인지 계속 묻고 있다. 햄릿의 복수가 지연된 이유는 복수에 대한 열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진실을 증거할 수 있는 확신이 부족해서였다.  

극의 초반, 햄릿은 감수성이 예민한, 허무주의적인 청년이었다. 그러나 선왕의 유령이 나타나 부친에 대한 복수를 요구하는 순간부터, 복수를 감행하는 과정에서 삶의 본질을 고통스럽게 깨쳐간다. 거짓 광기로 무장하고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정신적 고뇌에 빠져 있던 햄릿은 극이 끝나갈 즈음 인간사에서 순리가 무엇인지, 인간과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된다. 아직까지도 우리가 <햄릿>에 열광하는 이유는, 바로 햄릿의 고뇌 속에, 그의 복수 행위 안에 개인과 국가, 가족, 남녀간의 사랑 등 인간사의 모든 것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햄릿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간략하게 개괄한 다음,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복수 행위를 통해 삶의 진실에 도달해가는 과정을 살펴보자.


햄릿, 허무주의의 늪에 빠지다

1막 1장의 첫 장면은 음산하고 음울한 기운이 감도는 황량한 앨시노어 성벽에 선왕 햄릿의 유령이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유령의 정체를 둘러싸고 불안과 공포가 엄습한다. 하지만 곧 펼쳐질 1막 2장은 밝고 질서정연한 궁정의 세계다. 형인 선왕 햄릿이 죽자 왕권을 이어받은 클로디어스는 형수인 거트루드와 결혼하는 한편, 선왕 햄릿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 덴마크를 위협하는 포틴브라스를 맞기 위해 군을 정비하고, 포틴브라스의 숙부인 현재 노르웨이 왕에게 외교 사절을 보내는 등 특유의 외교술을 발휘한다. 1막 2장은 클로디어스의 연설로 시작된다. 


왕(클로디어스)_…전에는 형수요 지금은 왕비인, 전운 감도는 이 나라의 왕권 분담자를

과인은 이를테면 꺾어진 기쁨으로, 한 눈은 행복에 또 한 눈은 수심에 차,

장례에 축가를 혼례에 만가를 부르듯, 환희와 비탄을 꼭 같은 무게로 달면서

부인으로 삼았소.… 


클로디어스는 형인 선왕이 죽은 지 두 달 남짓 되었을 때 형수와 근친상간적 결혼을 하고, 그 결혼을 통해 장자상속법의 전통을 어기고 왕위에 오른다. “꺾어진 기쁨” “한 눈은 행복에 또 한 눈은 수심에” “장례 축가에 혼례 만가” 등의 모순된 어법을 구사한 그의 연설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모순을 통제하기 위한 것임과 동시에 사실은 위선적이며 이중적이고 애매모호한 덴마크 궁정의 현실을 상징하는 것이다. 

조카이자 아들, 숙부이자 아버지, 어머니이자 숙모……. 덴마크 궁정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대해 이미 도덕적 불감증에 빠져 있다. 덴마크 사회의 밑바닥에는 추악한 실재가 진실의 가면을 쓴 채 숨죽여 있는 것이다. 

하지만 햄릿은 다르다. 선왕의 유령이 나타나 사실을 밝히고 복수를 명하기 전인데도 햄릿은 추악한 실재를 간파하고 역겨움을 느낀다. 왕비 거트루드가 부왕의 죽음에 대해 누구나 죽게 마련인 죽음이 왜 햄릿에게만 특별해 보이냐고 묻자 이렇게 답한다. 상복이나 한숨, 눈물이나 비애의 모든 격식은 다 보인다고.  “허나 제겐 겉모습 이상의 무엇이 있으며, 그런 건 비통의 옷이요, 치장일 뿐입니다.”라고 답한다. 햄릿은 이처럼 보여지는 겉치레와 진실의 문제를 강력하게 제기한다. 이미 그의 눈에는 세상사가, 이를테면 왕위 계승 문제와 아버지의 장례식, 어머니의 결혼 따위가 허위와 가식으로 가득 차 보인다.  


햄릿_오, 너무나 더럽고 더러운 이 육신이 허물어져 녹아내려 이슬로 화하거나,

영원하신 주님께서 자살 금지 법칙을 굳혀놓지 않았으면, 

오 하느님! 하느님! 이 세상 만사가 내게는 얼마나 지겹고, 맥빠지고, 단조롭고, 쓸데없어 보이는가!


이와 같은 햄릿의 실존적 고독과 허무에 어머니의 근친상간적 결혼이 가세함으로서 햄릿은 인간 본성에 대한 공포와 혐오, 절망을 느낀다. 이렇게  허무주의의 늪에 빠져 있던 햄릿은 부왕의 유령을 만나면서 새로운 상황에 직면한다. 


햄릿의 복수는 왜 지연되었나

햄릿 앞에 모습을 드러낸 선왕인 유령은 햄릿에게 말한다. 자신은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처럼 독사에 물려 죽은 것이 아니라 현재의 왕에 의해 독살된 것이라고. 자신은 자다가 동생 손에 생명과 왕관과 왕비를 한꺼번에 빼앗기고 고해성사도 없이 죄를 청산하지도 못한 채 심판대에 보내졌다고. 유령은 왕자에게 천륜을 어긴 형제간의 살육을 복수해 달라고 애절하게 부탁한다. 

햄릿은 청천벽력 같은 충격에 사로잡힌다. 

유령의 요구를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렇다. 현왕 클로디어스를 대역 살인의 죄인으로 처벌하고, 부패한 현재를 바꾸어 놓으라는 것이다. 허무주의의 늪에 빠져 있던 햄릿에게 복수의 과업이 떨어졌다. 따라서 햄릿은 사악한 현왕과 왕비에 의해 부패한 현재의 덴마크를 바로 잡아서 겉과 속이 일치하는 부왕 시절의 덴마크로 바꾸겠다고 다짐한다. 

2막이 열리고, 무대 위에는 “겉으로나 안으로나 과거의 그를 닮지” 않은 햄릿이 거짓 광기로 자신을 포장하고 등장한다. 왕과 왕비, 재상 폴로니어스는, 햄릿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어수선하게 움직인다. 술수와 획책이 휘장 속에 가려져 은밀하게 움직인다. 그리고 드디어 3막에서 햄릿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계책을 꾸민다. 배우를 불러들여 왕과 왕비 앞에서 연극을 행하게 하는데, 그 중간에 선왕의 사망 경위와 비슷한 장면을 집어넣고 왕과 왕비의 행동을 지켜보기로 한다. ‘농담 속의 독’을 던진 것이다. 연극을 보다 황급히 자리를 뜬 왕이 홀로 기도를 올린다. “아, 내 죄 썩은 내가 하늘까지 나는구나. 난 인류 최초의─형제를 죽인 저주를 받고 있다.…”

왕의 행동을 지켜보던 햄릿은 이때야말로 복수를 감행할 적기라고 판단하고 칼을 뽑지만, 칼을 거둬들인다. 기도중인 왕을 죽이는 것은 “청부 살인이지 복수가” 아니라고. 햄릿은 무방비 상태의 적을 공격하는, 암살에 가까운 사적 복수는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얼마 후 왕비의 내실에서 휘장 뒤에 숨어 있던 재상 폴로니어스를 클로디어스인 줄 알고 죽인다. 

햄릿은 자신에게 부여된 복수의 임무가 얼마나 힘겨운 것인가 깨닫는다. 

햄릿에게 복수의 임무가 벅찬 첫 번째 이유는, 복수가 갖는 본래의 성격, 복수의 이중성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으로부터 복수를 재촉받은 내가”라는 햄릿의 대사에서 나타나듯 복수는 선과 악의 양면성을 지닌다. 억울한 부왕의 원수를 갚는다는 동기는 비록 선한 것일지라도 살인은 비열한 행위일 수밖에 없다. 복수의 딜레마다. 

뿐만 아니라, 유령의 모습으로 나타난 선왕이 요구한 복수는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유령은 자신의 말을 맺기 전에 또 다른 임무를 고한다. “허나 어떤 식으로 이번 일을 추진하든, 네 마음을 더럽히거나, 네 어미에 대한 계책을 꾸미진 말아라.” 

이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하물며 강한 증오심에서 비롯되는 사적 복수는 결국 복수자의 마음을 더럽히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유령은 복수를 하되 “마음을 더럽히지 말라”고 명령한다. 따라서 유령은 사적 복수를 하지 말고, 재판에 의한 공적 복수를 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나 사실상 마찬가지다. -<앞의 글>(정재문) 


햄릿의 복수는 지연된다. 햄릿은 고뇌한다. 해치울 명분과 의지가 있고 힘과 수단이 있는데도 단번에 복수를 행하지 못하는 자신을. 그런데 복수의 행위가 정당성을 가져야 하고, 나아가 부패한 권력을 바로 잡아 부왕 시절의 금수강산 같은 덴마크로 환원시켜 놓아야 한다. 이 어찌 쉬운 일일까?

그렇다면 햄릿의 복수가 지연된 이유는, 햄릿이 해야 할 복수의 어려움 때문이라는 건가?

솔직히 말하면, 햄릿의 복수가 지연된 이유에 대해 간결하게 설명해낼 자신이 없다. 물론 복수의 이중성과 햄릿에게 요구된 복수의 어려움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행동을 지연시켰다가 극단적으로 행동을 실천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숨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내세워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와 관련이 깊어 보인다. 


왜 우리는 햄릿에 매혹되는가?

<햄릿>에 대한 또 하나의 오해는, <햄릿>을 ‘복수극’으로만 본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명예가 목숨보다 중요했던 당시 유행한 복수극을 염두에 두고 <햄릿>을 쓴 건 사실이지만, 복수극이라는 관점으로만 작품을 보는 것은 너무 협소한 평가다. 오히려 복수라는 임무에 맞닥뜨린 햄릿을 통해 인간의 존재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 가깝다.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혹은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햄릿의 독백이 <햄릿>의 가장 도드라진 대사인 이유도 여기 있다.  

격정적인 혼돈(왕의 죽음의 진실, 복수의 임무, 어머니에 대한 혐오 등)이 지난 후 마침내  햄릿은 새로운 방식의 복수를 결심한다. 그것은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진실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는 스스로 신의 응징의 도구이자 대리인이 되겠다고 선언한다. 그는 현왕의 명령대로 영국으로 떠나고, 마치 신의 도움인 듯 현왕의 올가미에서 빠져나와 덴마크로 돌아온다. 덴마크로 돌아온 후의 햄릿의 행동은 이전까지와는 사뭇 다르다. 햄릿은 깊은 고뇌를 거쳐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였고, 마침내 인간사의 순리를 따르게 되었다. 햄릿은 인간 능력의 한계를 깨달았으며 인생사가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만은 아니고 거기에는 그것을 다듬어 마무리하는 그 어떤 힘이 있음을 경험을 통해 인식하게 된다. 

폴로니어스의 아들 레어티즈와의 승부를 앞두고 햄릿은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호레이쇼에게 이렇게 말한다.


햄릿_아무 상관 없어. 우린 전조를 무시해.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데도 특별한 섭리가 있잖은가. 죽을 때가 지금이면 아니 올 것이고, 아니 올 것이면 지금일 것이다. 지금이 아니라도 오기는 할 것이고. 마음의 준비가 최고야. …순리를 따라야지.


햄릿이 아무런 치밀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는데도 그의 복수는 말끔하게 마무리된다. 

허무주의의 늪에 빠져 있던 1막의 햄릿과 자신의 죽음을 포함한 복수의 마무리를 순순히 바라보는 햄릿은 달라 보인다. 결국 셰익스피어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햄릿의 복수가 아니었고, 복수의 임무를 받아들인 햄릿이 가야 했던 긴 도정이었으며, 그 도정 속에서 그를 괴롭혔던 고뇌였다. 즉, 그의 고뇌는 존재의 양면성에 번민하는 전체 인간의 한 전형인 셈이다.     

어쩌면 햄릿의 머뭇거림, 햄릿의 우유부단함이야말로 지금까지도 우리가 햄릿이라는 인물에 매혹되는 이유다. 그에게는 양극단이 신비롭게 공존하다. 그는 모든 명분과 조건을 다 갖추었음에도 복수를 지연시키다가 막상 클로디어스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맞지만 살려주며, 금세 휘장 뒤에 숨어 있던 플로디어스를 클로디어스라 생각하고 아무런 주저 없이 찔러 죽인다. 그는 이처럼 극단적인 행동 지연과 극단적인 행동 실천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인물이다. 


어느 누구도 당할 수 없는 기지와 재담, 존재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 등 인간이 가진 거의 모든 능력 극대화하여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런 능력은 항상 양극화되어 나타나며 양극에 부딪칠 때 생기는 모든 대립과 갈등은 그의 존재양식이 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햄릿은 우리의 반영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보편적인 사고와 행위는 있음과 없음, 선과 악, 허구와 실재, 아버지와 어머니 같은 이분법적 사물 인식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작은 햄릿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종철의 작품해설


어떤가? 무대 위의 햄릿이 이젠 좀 달라보이게 되었나?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에서 삶과 죽음 사이에 생길 수 있는 거의 모든 문제를 다루고 있다. 형제간의 시기와 음모, 질투와 살인은 성경에 나오는 카인의 행위와 연결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두 달도 못 되어 삼촌과 결혼한 어머니에 대한 햄릿의 미움과 사랑은, 인류가 가정이라는 구조를 유지하는 한 보편적으로 겪게 되는 경험이다. 여기에 햄릿과 오필리아라는 두 청춘 남녀의 비극적인 사랑까지 덧붙어 있다. 

햄릿의 복수극이 펼치는 격정적인 파노라마를 보다보면, 인간의 삶이, 그 삶을 살아가야 할 우리의 철학이, 인간사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만 같다. 그 한 가운데서 햄릿이 비칠거리며 걸어가고 있다. 햄릿이 이렇게 깊은 고뇌에 빠진 이유는 삶과 세상에 대한 지적 통찰력 때문임을 여러분도 알게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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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가 <햄릿>을 쓴 건 아니라고?

지금은 작가의 원고가 그대로 책이 되지만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그가 극으로 만들었을 때의 원래 의도 사이에는 무시하지 못할 거리가 존재한다. 셰익스피어는 배우로 출발했지만 나중에 소속 극단의 주주이자 전속작가였다. 따라서 그가 쓴 극은 극단의 소유물이었고, 극단은 관객 확보를 위해 작품을 출판하려 하지 않았다. 더구나 햄릿처럼 인기 있는 극은 다른 극단이나 출판업자가 노리는 물건이었고, 따라서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연극 대본이 빠져나가게 되었다. 그중 한 가지 방법이 극에 출연한 동료 배우 하나가 연극 대사를 모조리 외워 재구성한 것이고, 여러 판본이 존재한다. <햄릿>은 셰익스피어 극작품 중 유일하게 세 가지 완전히 다른 판본이 존재하는 작품이다. 

또한 <햄릿>의 출처 역시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보통 이야기를 새롭게 지어내는 천재라기보다 주어진 이야기를 재구성 혹은 재해석하는 천재로, 그는 자유롭게 다른 작품들로부터 소재를 빌려와 자기 의도에 맞추어 자르고, 붙이고, 늘리고, 틈새를 메웠는데, <햄릿>도 예외는 아니다. <햄릿>의 직접적인 출처는 <햄릿>과 마찬가지인 복수극의 일종으로 토머스 키든의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햄릿 이야기와 직접 연결되는 최초의 이야기는 12세기 말 경에 씌어지고 1514년에 처음 출판된 삭소 그라마티쿠스의 <덴마크 역사>에 실려 있다. ‘삭소이야기’는 햄릿 이야기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클로디어스의 형제 살해, 어머니 거트루드와 삼촌 클로디어스의 근친상간적 혼인, 거짓 광기, 오래 지연된 복수의 실행 등등과 유사한 사건들이 삭소 이야기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 원시적인 복수 이야기를 햄릿과 같이 다양하면서도 통일된 주제와 깊이를 가진 극으로 바꾼 것은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이며,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당대 시대정신을 훌륭하게 담은 탁월한 작품이다. _민음사 작품해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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