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나 May 31. 2016

데미안,  '알'에서 나오기 위한
투쟁과 구도의 길

08. 헤세, <데미안>

자신의 내부에서 무언가 산산 조각나는 처절함을 경험한 적 있나? 자기가 바라보는 자기와 자신을 둘러싼 세계 사이에서 길을 잃은 적은? 아니면, 지금 내 눈으로 감지되는 삶을 뛰어넘는 어떤 이상을 열망한 적은? …

 <데미안>을 단순히 설명하면 청년 싱클레어가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기록이다. 하지만 이 길에서 헤세는 개인과 세계의 구원은 오직 자기 실현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고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여러분이 싱클레어의 여정에서 무엇에 전율할지 궁금하다.  



“어떤 사물을 눈앞에 두었을 때, 그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것이 단순하고 우리에게 친숙하기 때문에 눈길을 끌지 못한다. 따라서 가장 깊이 탐구해야 하는 것이 그냥 스쳐 지나간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인용하며 이 글을 시작하려 한다.

이 인용글이 <데미안>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맞다. <데미안>의 핵심과는 무관한 글이다. 진작 다뤘어야 마땅함에도 몇 번을 지나치고, 몇 번을 못 본체 하다 이제야 <데미안>을 마주하는 나의 심사와 맥락이 살짝 닿아서다. 십대에 보고, 이십대에 다시 읽은 이 작품은 모두에게 친숙한 고전이다. 그래서 더 메마르게 개괄해버릴 것 같은 우려가 내 마음속에 도사렸던 탓이다. 

그렇게 머뭇거리다 다시 <데미안>을 마주하고, 나는 놀란다. 이 소설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성장소설이라는 손쉬운 해설에 갇혀 있기엔 벅찬, 거대한 소설이다. 세계와 맞닥뜨리는 지점에서 하나의 자아가 자신을 찾아가는 것은 위대한 여정이다. 그런데 더 나아가 헤세는 진정한 자아 탐구란 무엇인지 철학적으로 사유하기를 우리에게 주문한다. 개인과 전체가, 추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남자와 여자가,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선과 악이, 서로서로 날을 세우며 대립해 있는 모든 극단적인 양극이 어떻게 자신의 내면 안에서 통합해야 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민음사 번역자는 이 작품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가급적 원문에 밀착하도록 번역했다고. 특히 “핵심적인 문장을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대신 아주 오랜 고심 끝에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로 원어에 가깝게 바꾸었다”고. 

십대에 보았을 때는 성장의 통과의례가, 이십대에 보았을 때는 모든 익숙한 것과의 투쟁이 단박에 눈에 들었다. 성장 이전의 안온한 세계를 벗어나기 위한 투쟁, 모든 기존의 규범을 낯설게 봄으로써 세계를 재해석하기 위한 투쟁….

투쟁은 젊은이의 것이고, 구도는 성숙한 어른의 것이던가?

어른이 되어서 다시 읽은 <데미안>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진정한 내적 통합이란 무엇인지와 관련된 ‘구도의 길’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뭐 중요하겠는가. <데미안>은 자신의 경험치 만큼, 딱 보이는 그만큼만 봐도 멋진 작품인걸. 


말씀 좀 해주십시오. 에밀 싱클레어가 누굽니까?

<데미안>은 1919년 출판에 앞서 같은 해 2월부터 4월까지 피셔 출판사의 한 잡지에 세 차례 걸쳐 나누어 연재되었다. 작가의 이름은 헤르만 헤세가 아닌 에밀 싱클레어. 헤세는 이미 알려진 자신의 이름 대신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이 작품에 강렬한 인상을 받은 토마스 만(지난번 단편 <행복으로의 의지>를 쓴 독일 작가)은, 깜짝 놀라 발행인에게 당장 편지를 보내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말씀 좀 해주십시오. 에밀 싱클레어가 누굽니까?” 

그로부터 30년 후(1948년), <데미안>의 두 번째 영역판 서문에서 토마스 만은 당시의 느낌을 이렇게 적고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싱클레어라고 하는, 베일에 싸인 어떤 작가가 쓴 <데미안>이 일으킨 전류와도 같은 영향을 잊을 수가 없다. 이 작품은 무서울 만큼 정확하게 시대의 신경을 포착하고 있으며,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그들에게 주는 사람이 이미 마흔두 살의 어른이었는데도) 자신들의 한가운데서 자신들의 깊은 생을 예고해주는 사람이 생겨났다고 생각하는 젊은 세대 전체를 감사와 열광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다.”

어떤가? 현재의 우리들에게 <데미안>은 열 살 소년 싱클레어의 성장기로 읽힌다. 더불어 그의 성장기가 일반적인 통과의례처럼 보이는, 하나의 전형성을 담보한 탓에 ‘데미안’하면 청춘의 비밀스러운 떨림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토마스 만의 글을 보니, <데미안>이 발표된 당시 독일의, 혹은 유럽 젊은이들의 느낌은 우리의 그것에 비해 한층 더 격렬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아마도 토마스 만의 표현처럼 <데미안>이 ‘시대의 신경을 포착’해서였을 것이다.   

동시대적 감수성이란 게 있다. 그 시대를 함께 경험한 세대가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하나의 정서. 당시의 젊은이들은, 이제 막, 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전쟁을 겪어낸 참이었다. 최초의, 대규모적인 인류의 전쟁. 유럽은 폐허로 변했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생명을 잃었다. 물리적 폐허도 심각했지만 그에 동반된 정신적 공황 상태도 수습할 길이 없었다. 젊은이들은 여태 자신들이 살아왔고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지 비감해했다. 특히 독일은 전쟁을 일으킨 패전국이라 사회분위기는 더 없이 침체돼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로부터 탈출할 방법도 없었고, 자신들의 생활을 개혁할 여력도 없었다. 당시의 젊은이들 눈에는 오로지 사회의 불안과 파괴만이 보였고 수많은 젊은이들은 길을 잃고 있었다. 

한편, 중년의 헤세는 이 전쟁에 극렬하게 반대했다. 보편적인 정신적 가치를 무시하는 인류의 야만성에 깊은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헤세는 정적이던 자신의 철학을 내던지고 이 야만적 일상에 몸을 던졌다. 잡지를 발행하고, 글을 쓰고, 수많은 논문을 써서 전쟁에 항의했고, 인간의 우매함에 항의했다. 그의 마음속에 ‘에밀 싱클레어’가 태어나 자란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게다가 당시 헤세의 개인사는 불안정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정치적 행보는 매국노라는 비판을 받았고, 애증이 교차하는 아버지가 죽었고, 아내와 아들의 신경질환은 극심했다. 헤세는 이때 육체적 정신적으로 어려운 상태에 있었다. 심한 우울증과 신경쇠약을 동반해 1916년 융의 제자인 랑 박사에게 정신분석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헤세의 귀에는 자신의 내면의 소리가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1차 대전을 겪고 난 헤세에게 중요한 문제는 인간과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이었고, 그는 이에 대한 한 가지 해결방법을 <데미안>을 통해 제시했다. 즉, 혼란한 사회, 냉혹한 현실, 붕괴된 가치 등 절망적 상황 속에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자기 실현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데미안>은 전형적인 소설 구성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특정한 사건이 전개돼 등장인물 사이에 갈등이 생성되는 형식이 아니라 처음 두 장을 제외하고는, 각각의 장들이 철학적 논문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다. 싱클레어의 해결되지 않은 내적 긴장과 갈등이 거의 유일한 사건이고 무대인 셈이다. 

마흔 살의 헤세가 겪은 정신적 방황과 여정이 싱클레어라는 어린 소년의 것으로 옮겨온 <데미안>. 비슷한 정신적 고통을 겪던 당시의 젊은이들은 싱클레어의 여정에 강렬하게 반응했다. 소년 싱클레어가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는 기나긴 여정 속에는, 밝고 어두운 두 개의 세계가 교차하고, 개인의 실존과 인류 전체가 어떻게 융화하는지 말하고, 익숙한 것을 깨뜨리는 투쟁을 통해 세계가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싱클레어가 걸었던 내면의 길, 투쟁의 길, 구도의 길은 그들 개인이, 혹은 전체가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깨달음의 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데미안>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두 세계, 그리고 알에서 나오려는 투쟁

소설을 열자마자 마주한 첫 문장.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저자 서문과도 다른 서장이 소설을 연다. 주인공 싱클레어보다 헤세의 육성이 먼저 울린다. 서장의 핵심은 이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싱클레어의 성장기를 다루고 있지만 <데미안>의 핵심 주제는 ‘자아 탐구’이다.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지난한 여정. 헤세는 여기에 덧붙인다. 사람은 모두 유래가 같다고. 모두 같은 협곡에서 나온 존재며, 어머니들이 같다고. 따라서 싱클레어의 자아 탐구는 결국 나의 것인 셈이다. 

열 살 소년 싱클레어가 비로소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둘러본다. 

그곳에는 두 세계가 뒤섞였다. 밤과 낮이 두 극(極)으로부터 나왔다. 한 세계는 아버지의 집이었다.…그 세계의 이름은 사랑과 엄격함, 모범과 학교였다. …의무와 책임, 양심의 가책과 고해, 용서와 선한 원칙들, 사랑과 존경, 성경 말씀과 지혜가 있었다. 

반면 또 하나의 시계가 우리 집 한가운데서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냄새도 달랐고 말도 달랐고 약속하고 요구하는 것도 달랐다. 그 두 번째 세계 속에는 하녀들과 직공들이 있고 유령 이야기들과 스캔들이 있었다.


소년은 조심스럽게 첫걸음을 내딛는다. 그런데 그 발걸음이 향한 곳은 금지된 세계다. 자기 실현의 첫단계는 무의식적이고 순수한 선의 세계, 부모님의 세계에서 벗어나 악의 세계에 들어서는 것이다. 

물론 그를 불러낸 것은 프란츠 크리머의 휘파람 소리다. 크리머와의 갈등은 어린 소년에겐 무시무시한 공포요 부담이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그곳은 극심한 불안을 야기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매혹을 지니고 있었다. 소년은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하지만, 크리머의 위협에도 아버지 세계로 숨어들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아버지의 세계가 갖는 권위에 대해 회의하고, 악의 세계에 숨어든 자신의 비밀 때문에 아버지보다 우월하다고 느낀다.  “그것은 아버지의 신성함에 그어진 첫 칼자국이었다. 내 유년생활을 떠받치고 있는, 그리고 누구든 자신이 되기 전에 깨뜨려야 하는 큰 기둥에 그어진 첫 칼자국이었다.” 


소년 싱클레어의 이 비밀스러운 경험은 사춘기 무렵의 나를 요동쳤던 것 같다. 삶의 비밀을 이제 막 알 것 같은 순간의 포착. 그 무렵의 우리는 그와 같은 미묘하고 불순한 악(惡)에 매혹된다. 하지만 악과의 접촉은 고통스럽다.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의 첫 걸음은 이처럼 기존의 규범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이미 익숙해 있던 자신이 몸담고 있던 세계에서 발을 떼야 새롭고 더 큰 자신을 구축하는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알이라는 세계를 부수고 나와야 아브락사스에게로 날아갈 수 있는 것이다. 

싱클레어의 내면에 강렬한 폭풍이 일기 시작한다. 혼돈의 공포가 밀려오고 내적 긴장과  갈등이 시작되지만 그는 여전히 너무 어리고 미약하다. 기성 사회질서로부터 소외된다는 것은 성장기의 소년에겐 가히 위협적인 것이었다. 

그때 싱클레어 앞에 데미안이 나타난다. 성숙하며 자아의 통제가 완벽한,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 불가해한 인물. 데미안의 도움으로 크리머는 떨어져나갔지만, 그렇다고 싱클레어의 내면의 갈등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통해 세계가 둘로 갈라졌음을 확연하게 알아챈다. 선과 악이, 밝음과 어둠이, 정신과 자연이, 삶과 죽음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뿐만 아니라 싱클레어는 데미안으로부터 사물을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규범과 가치를 부숴 보면 새로운 가치가 존재함을 인식한다. 그 과정을 통해 싱클레어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고와 행동을 배워간다.  

그래도 싱클레어의 번민과 방황과 고뇌는 쉽사리 멈출 수 없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비롯해서 피스토리우스, 에바 부인 등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이들과 만나는 와중에도 싱클레어의 갈등은 고조된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그들 모두는 이미 싱클레어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어떤 것을 대변하는 인물들이다. 알을 깨고 나오려는 싱클레어의 부단한 투쟁은 아브락사스라는 신에 향해 있다고 말한다. 알을 깨는 투쟁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마침내 싱클레어라는 새가 날아가려는 ‘아브락사스’라는 신의 정체는 무엇이냔 말이다.

  

이봐 싱클레어, 우리의 신은 아브락사스야

<데미안>을 읽은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성당 교리실에서 모여 앉아 독서토론을 했던 게 기억난다. 칠판에 누군가 이 글귀를 적어놓았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나는 너무 어려서 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가만히 언니 오빠들이 하는 얘기를 주워 듣고 앉았는데, 신기한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고도 이 구절만큼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데미안, 알, 아브락사스’. 이 세 단어는 한 묶음을 지어 내 심장에 박혀 있었던 거다. 겨우 부모님의 울타리 밖을 건너다볼 수준의 중학생이었지만, 너무나 멋진 글귀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싱클레어도, 우리도 두 세계가 있다는 건 쉽게 알 수도 있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원론적 세계를 인지하는 순간 우리에게 ‘알을 깨기 위한 투쟁’이란 숙제가 떠안겨진다는 것이다. 싱클레어는 크리머로부터는 자유로워졌지만 이를 인지하는 순간 더 깊은 혼돈 속에 빠져들었다. 

데미안은 이런 싱클레어에게 ‘카인과 아벨 얘기’를 들려준다. 카인은 악을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 그런데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이렇게 묻는다. 정말 그럴까? 성경에서 말한 것이 다 일까? 실제의 카인과 아벨이 있었고, 이와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상상한다면 현실 세계의 카인과 아벨 이야기는 선과 악으로 딱 구분짓는 성경 속 얘기와는 다를 수 있지 않겠냐는 말이다. 여러분 생각엔 어떤가? 고개가 조금 끄덕여지는가? 

잠시 인간의 삶을 되돌아보면 인간의 삶 안에서 선악으로 대표되는 모든 대립된 것들은  여기와 저기로 선명하게 구획 지을 수 없는 것들투성이다. 선한 행위들 속에 악한 저의가 숨어 있고, 겉으로 드러난 악이 본래 선한 의도로부터 줄기를 뻗은 것일 경우도 있다는 얘기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싱클레어는 본격적으로 이 이원론적 대립 속에서 방황하게 된다. 술도 마시고, 성적인 갈등도 겪는다. 성(性)에 대한 은밀함 속에는 이상한 기류가 흐른다. 그리고 흔히 성적인 것은 속된 것으로 치부하고, 이것으로부터 초월한 것은 성스런 행위로 추앙하는 경향이 있다. 정말 그런가?… 정신과 물질도 마찬가지다. 정신은 우위에 있고 물질은 그 하부에 있는가?

싱클레어의 내면은 이 상반되는 세계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투쟁 때문에 들끓는다. 그러면서 차츰차츰 성장해 나간다. 물론 성장을 돕는 인물들도 출현한다. 성당 오르간 연주자인 피스토리우스, 데미안,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 등이 그들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 안에서 대립된 양극이 하나로 통합하는 자아 실현의 구원에 다다른다. 

“우리는 우리의 개성의 경계를 늘 너무나도 좁게 긋고 있어! 우리는 늘, 우리가 개인적이라고 구분해놓은 것, 상이하다고 인식하는 것만 개성이라고 생각해. 그러나 우리는 세계의 총체로 이루어져 있어. 우리 하나하나가 말이야. 그리고 우리 몸이 진화의 계보를,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훨씬 더 멀리까지,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 영혼도 일찍이 인간 영혼들 속에 살았던 모든 것을 지니고 있어.”

한 사람 안에 우주가 있다, 동양 사상의 중심축이기도 한 이 말을 아마 어디선가 한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가진 인식, 나를 규정한 모든 것은 과연 온전히 나 개인의 것이었을까.  

갈등과 모순을 온몸으로 체험한 뒤에 그것들이 어떻게 한 개인의 존재 속에서 혹은 전체 속에서 통합되는지 깨닫게 된 싱클레어. 마침내 그가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천사상이며 사탄이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였고, 인간과 동물, 지고의 선이자 극단의 악이었다. 이 양극단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운명으로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을 맛보는 것이 나의 운명으로 보였다. 나는 운명을 동경했고, 운명을 두려워했지만, 운명은 늘 거기 있었다. 늘 내 위에 있었다.” 

<데미안>에서 말하는 진리란 아름답기만 한 곳이 아니라 선과 악이 뒤엉킨 경계였던 것이다. 진리란 것이 ‘선, 밝음, 성스러움’의 세계는 여기, ‘악, 어두움, 속된 것’의 세계는 저기라고 경계를 딱 긋고, 진리가 선의 세계에만 존재한다고 믿고 그곳만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오히려 그보다는 둘 사이의 경계를 서성이며 방황하다 마침내 그 둘의 통합을 어렴풋이 느끼는 것, 이것이 헤세 혹은 데미안이 생각한 자기 실현의 참된 길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실현을 완성한 인간이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양극의 세계가 사실은 서로를 보완하면서 조화를 이룬 통일된 하나임을 체험한 후,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자각한 독자적인 인간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데미안은 이렇게 말한다. 

“이봐 싱클레어, 우리의 신은 아브락사스야. 그런데 그는 신이면서 또 사탄이지. 그 안에 환한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가지고 있어.” 

마침내 싱클레어라는 노란색 새의 머리가 “세계의 껍데기를 뚫고” 조금 더 자유롭게 쳐들게 된다. 그러고는 자신의 친구이자 안내자인 데미안과 닮은 자신을 발견한다. 

데미안은 카인을 표적을 지닌 사람이라고 했고, 싱클레어도 표적을 지닌 사람이라고 말했다. ‘표적’이란, “바로 인식, 회의, 비판에 이르려는” 시도들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이 ‘표적’을 지녀야 비로소 이것과 저것을 분명하게 구분짓지 않고 경계에서 방황하다 자기 실현의 길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표적’을 지닌 사람인가?(끝)



매거진의 이전글 햄릿, 존재의 양면성에 번민하는 전체 인간의 전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