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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나 Jun 10. 2016

11. 스티븐슨,  
<지킬 박사와 하이드>

지킬과 하이드, 이중자아 모티프의 대표주자

"나는 그 육체 안에서 마치 환상 속에서 물방아에 물이 흐르듯 무모한 무분별과 무질서한 관능적 이미지의 물결이 흐르는 것을 의식했다. 책임감이 녹아 사라지고,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결코 순수하지 않은 영혼의 자유로움도 인식할 수 있었다. 이 새로운 생명을 처음 호흡하자마자 나는 내 자신이 더욱 사악해져서, 열 배는 더 사악해져서 내 깊은 곳의 악마에게 노예로 팔렸음을 알아차렸다."_본문 중에서


인간의 이성이 신에게서 떨어져 나온 순간, 인간은 스스로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불안해하고 방황하며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그리고 불안의 내밀한 안쪽에는 스스로의 자아를 위협하는 또 다른 자아에 대한 각성이 자리잡고 있다. 지킬과 하이드는, 이처럼 자아 안의 또 다른 자아라는 이중자아의 모티프를 대표하는 독특한 소설로, 다양한 문화장르의 모체가 되었다. 



쉰 살의 균형 잡힌 체격의 헨리 지킬 박사. 그는 막대한 부와 좋은 평판을 모두 얻은 사람이다. 반면에 왜소한 체구의 에드워드 하이드는 불쾌하고 혐오감을 일으키는 젊은이로 저주 받아 마땅한 악마의 적자(嫡子)다. 음산한 기운이 안개에 뒤섞인 런던의 밤거리. 하이드는 악령이 깃들지 않았다면 저지를 수 없는 범죄를 일으키고는 종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원제는 The strange case of Dr. Jekly and Mr. Hyde)는 공포소설로서의 기묘한 마력(魔力)이 충만한 고딕풍 소설이다. 환상과 현실을 결합하는 솜씨가 탁월한 작가 루이스 스티븐슨은 공포소설의 기법에 충실한 형식을 취해 효과를 극대화하고, 사건의 전모를 끝까지 밝히지 않은 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끌어간다. “그릇된 행동에 휘말리는 인간을 매우 경이롭게 생각”하는 어터슨 변호사는 예리한 셜록 홈스와는 다른 인물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지킬과 하이드가 어떤 식으로든 연관돼 있음을 감지하지만, 쉽게 진실에 다다르지는 못한다. 몇 사람의 증언이 뒤따르고, 몇 통의 편지글이 등장하다, 마지막에 지킬 박사의 고백을 읽고 나서야 겨우 전모가 밝혀진다.  

루이스 스티븐슨

더없이 흥미진진한 구성이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김 빠진 콜라처럼 톡 쏘는 제 맛을 만끽하기는 어려웠는데 그 이유는 작품 내적인 문제 탓이 아니라, 지킬과 하이드가 하나의 육체에 깃든 두 자아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내가 작품이 발표되던 당시의 독자였다면, 이 고딕풍의 공포소설에 전율했을 게 틀림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1886년 발표 당시, 영국에서만 발간 6개월 만에 4만부가 팔렸고, 빅토리아 여왕도 읽었을 만큼 폭발적인 반응이었단다) 

어찌되었든, 이 모든 사정을 감안해도, 일독을 권한다. 특히 소설의 마지막장 ‘헨리 지킬의 고백’편을 읽다보면, 이 책이 단순히 대중적 재미에 기댄 괴기소설이라고 평가할 수 없는 분명한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이미 다양한 문화장르로 확장된 수없이 많은 ‘지킬과 하이드’를 경험했다. 영화로, 만화로, 다이제스트된 이야기로, 심지어 액션어드벤처 게임으로까지. 하지만 지킬의 고백을 듣다보면 이 소설이 끔찍한 괴물이야기가 아니고, 인간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또 다른 자아에 대한 묵직한 성찰을 담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지킬 박사, 또 다른 자아를 탄생시키다

우리의 주인공 헨리 지킬, 쉰 살 무렵의 건장하고 기품 있고 지적이며 평판 좋고, 그런 자신에게 걸맞은 부와 지위를 가진 상층계층의 의사. 소설 초반에 이 나무랄 데 없는 지킬 박사에게 무언가 석연치 않은 조짐이 일어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다음은 오랜 친구 래니언 박사의 말이다. 

“…벌써 십여 년 전부터 헨리 지킬은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비현실적으로 변했다네. 그 친구, 자꾸 잘못된 방향으로 생각이 흐르더군.…”

래니언 박사는 어터슨 변호사에게 관심은 두고 있지만 거의 만나지 않고 있으며, 그가 비과학적인 헛소리를 해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지킬은 자신의 저택과 연구실에 거의 은둔하다시피 한다. 신사적인 그의 겉모습에서는 누구도 찾아낼 수 없지만, 그의 내부에 도사린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자아. 지킬은 자신 안에 숨은 또 하나의 혹은 다중의 자아가 존재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이미 오래전부터 ‘상당히 이중적인 생활’을 해오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는 한편으로는 숨겨진 또 하나의 자아에 대해 ‘병적인 수치심’을 가지고 있었고, 어떻게해서든 이러한 ‘자신의 부조리’를 감추려고 했다. 그러다 오랜 노력 끝에 과학적 발견을 통해 그 길을 찾게 된다 . 

그러므로 지금까지 나 자신을 형성해 왔으며, 내 안에서 인간의 이중성을 나누고 결합시키는 선과 악이라는 두 영역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깊은 고랑을 파서 철저하게 분리시킨 것은, 내가 타락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내가 지향하는 바가 매우 엄격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조제한 액체를 마시고, 마침내 지킬은 또 하나의 자아를 만나게 된다. 그가 바로 지킬의 ‘이중자아’ 하이드다. 에드워드 하이드…. 혐오스러움, 기형, 공포, 고약한 대담함, 사악함, 삶에 대한 욕지기…. 하이드에 대한 묘사는 한결 같다. 소설 속 하이드는 짐승 같은 성질에 왜소한 체구, 몸에는 털이 많은 야만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어터슨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헨리 지킬에게 그의 새친구 하이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자는 도무지 인간 같지 않았어! 원시 야만인 같다고나 할까?…아니면 밖으로 내어 나와 육체까지 변형시킨 사악한 영혼의 발현일까?”

헨리 지킬이 자신 안에 숨은 악을 철저히 분리시키려 했던 이유는 무얼까?

지킬은 자신 안에 숨은 ‘악’을 이미 보았고, 그 존재를 인정하였다. 이중자아로 느끼는 혼돈은 위험한 것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지위와 명예를 위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존재로 인한 ‘쾌락’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처음 이 모든 사태에 대한 진지한 고백의 서두에서 자신의 가장 큰 단점으로 ‘쾌락을 탐하는 성향’이 있음을 인정한다. 

즉, 그가 애초에 자신 안에 내재된 선과 악을 분리하려 했던 것은, 다분히 이 은밀한 쾌락을 자유롭게 누리고자 함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분에서 드러낼 수 없던 ‘악함’을 이렇게 분리함으로써 지위와 계급을 유지할 수 있었고, 하이드가 속한 ‘저급한 사회계층’을 열등한 것으로 마음껏 비판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탄생시킨 하이드로 변신해서 자유와 젊음을 만끽했고, 모든 규제와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웠으며, 그 자유로 인해 맥박이 힘차게 뛰었고, 이 모든 것이 제공하는 은밀한 쾌락을 만끽했다. 


지킬로 잠들어 하이드로 깨어나다

어둡고 습한 런던의 밤거리. 이 시공간적 배경은 하이드의 세상이다. 그의 악마성은 음습한 밤을 배경으로 마음껏 발현된다. 거리에 쓰러진 소녀를 무자비하게 밟고 가는가 하면, 점잖은 사회 지도층 인사인 댄버스 커루 경을 무자비하게 살해한다. 짐승 같은 광기로 지팡이로 노인을 때려 쓰러뜨린 후, ‘고릴라 같은 분노를 표출’하며 발로 짓밟고 마구 내리쳐 살해한 것이다.  

지킬은 하이드가 저지른 몸서리치는 악행에 기겁한다. 

“신께 맹세컨대 다시는 그자를 만나지 않겠네. 자네에게 내 명예를 걸고 말하지만, 이제 그자와는 끝이야. 그리고 그자도 내 도움을 바라지 않아. 자넨 내가 아는 만큼 그를 알지 못하지. 그는 이제 위험하지 않아. 위험을 끼치지 않을 거야. 내 말을 믿어. 다시는 그자 얘기를 들을 일이 없을 걸세.”

지킬은 하이드를 버리고, ‘나이 들고 불만도 많은 의사’인 지킬을 선택하려 한다. 하지만 이미 무의식 속에서 깨어난, 스스로가 탄생시킨 하이드의 힘은 막강하다. 지킬이 자신의 행위에 대한 참회의 긴장이 느슨해지면, 아주 오랜 동안 탐닉해온, 그러나 이제는 막 억누르려고 하는 ‘하이드’라는 자아가 으르렁거린다. 이제 지킬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난다. 하이드에서 지킬로 돌아오고 난 뒤에도 하이드의 성질이 남아 훨씬 대담해지는가 하면, 스스로를 얽어매었던 의무감 같은 것도 헐거워지는 것이 아닌가. 지킬이 변해갈수록 하이드의 힘은 커져 갔다. 

당연히 지킬은 하이드를 증오했고, 그를 없애려 했다. 그의 존재가 지킬의 지위를 위협하기 때문이었다. 지킬은 하이드를 의식하고, 하이드와 대립했다. 하지만 이와 달리 하이드는 지킬이라는 존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단 지킬에 대한 증오는 있었다.  

하이드가 지킬에게 느끼는 증오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교수형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계속 일시적인 자살을 행할 수밖에 없었고, 인간의 모습 대신 인간의 일부분이 되어 종속적인 위치로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하이드는 그 필요성이 싫었고, 지킬과의 의존관계가 싫었으며, 지킬이 자신을 혐오한다는 것이 괘씸했다. 

지킬에 종속된 하이드. 지킬이 죽으면 하이드도 없다. 따라서 하이드가 살려면 지킬을 눌러야 한다. 지킬과 하이드의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 투쟁의 결과는? 하이드의 승리다. 지킬은 하이드를 불러내는 일을 그만두지 못했고, 지킬인 상태에서 잠이 들었는데도 하이드로 깨어나기 일쑤였던 것이다.  

자신 안의 선과 악을 분리하리라던 지킬 박사의 실험은 이렇게 실패로 끝나고 만다. 물론 표면적인 실패의 원인은 애초에 불순물이 들어 있던 약품을 구할 수 없어서였다. 하지만 지킬의 실패가 의미하는 것은, 지킬이 처음에 상상했던 둘 사이의 확고한 구분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임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중자아’라는 모티프의 문학적 의미 

결국 지킬은 ‘모든 인간이 그렇듯 자신도 선과 악이 혼재하는 복합적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하이드는 어떤가? 이 소설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하이드의 심리와 내면이 불충분하다는 점이었다. 지킬은 자신은 복합적 존재라고 인정했지만, 하이드는 그냥 악한 존재라고 판단했다. 독자들 역시 하이드 안에 지킬을 발견하기란 어려웠다. 

하지만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점을 알게 된다. 하이드의 외모와 느낌은 물론 악의 전령사처럼 보인다. 하지만 최초의 범죄, 거리에서 소녀를 밟고 지나갔다가 어터슨의 친적뻘인 엔필드가 뒤쫓아갔을 때 하이드의 태도를 떠올려보라. 만일 하이드가 악 그 자체였다면 엔필드조차 해치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하이드는 사람들의 눈에 자신의 외양이 어떻게 비추던 신사로 보이길 원했다. 그래서 지킬의 백지수표로 자신이 일으킨 사고를 무마하려 했다. 그러고 보면 하이드 안에도 지킬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잠시 질문 하나. 지킬과 하이드의 투쟁은 선과 악의 싸움인가?

그렇게 단순화시키기는 곤란해 보인다. ‘지킬 박사’와 ‘야수 하이드’의 함의는 그보다는 훨씬 복합적이다. 지킬이 자신 안에서 분리하고자 했던 ‘악’은 단순히 ‘악’ 자체라기보다는,  지킬의 사회적 지위에서 보았을 때, ‘악’으로 분류되는 다양한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규범적인 가치에 대립되는 관능적이며 성적인 것, 존경받을 만한 행동에 어긋나는 비난받을 행동들, 정의의 반대편에 있는 방종과 타락, 질서와 반대되는 무분별과 무질서, 건강한 가치로 평가받기 어려운 자유분방한 생활태도들… . 

이처럼 후자의 것들을 ‘하이드’로 보았을 때, 이런 질문도 가능해보인다. 

과연 하이드는 지킬 안에만 있는가? 어터슨에게도 래어먼에게도, 그밖에 다른 사람들 안에도 존재하고 있지 않을까? 어떤가,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과 함께 사는 또 다른 자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은 없나?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발간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한편으로는 선정적인 싸구려 소설이라는 평가도 만만치 않았다. 특이한 착상, 근대적인 스릴이 넘치는 독특한 작품이라는 면에서는 꽤 점수를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지킬의 심리가, 아니, 그보다는 하이드의 내밀한 심리가 너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스티븐이 창조한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단단한 반석 위에 섰다. 이중인격, 혹은 이중자아라고 말할 때 누구나 저절로 떠올리게 되는 강렬한 창조물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지킬과 하이드’ 외에도 ‘이중자아’를 모티프로 한 문학작품은 여럿 있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중자>, 포의 <윌리엄 윌슨> 등은 이중자아 모티프를 비중있게 다룬 작품들이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소설 제목이라는 고유명사를 넘어 이중인격을 대표하는 일종의 일반명사화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중자아 모티프는 여러 문화 장르 속에 숨어들어 둔탁한 우리들을 흔들어 철학적 혼돈에 빠지게 만든다.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 ‘이중자아’는 그 자체로 섬뜩한 공포를 안겨준다. 왜 우리는 이렇게 손쉽게 공포에 말려드는 것일까? 그 이유는 나의 또 다른 자아가, 내 안에 숨어 있는, 내가 잘 모르는 낯선 자아를 일깨워 내가 나의 주인이라는 기본적인 정체성마저도 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중자아’는 내 안에 은폐하려 했던 내밀한 비밀을 눈앞에 드러내버리고, 그럼으로써 ‘나’를 혼돈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이중자아를 넘어 페르소나까지

한 가지만 더. 지킬의 다음 말도 들어보자. 

그 진실이란, 인간은 진정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이다. 내가 둘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내 지식이 그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킬과 하이드, 이중자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본래 인간의 자아란 이중적인 것이 아니라 다중적인 것이는 사실의 의미한다. 

이 책을 읽기 직전 <블랙 스완>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최고의 발레리나를 꿈꾸는 순수한 발레리나 니나는 자신이 꿈꾸는 완벽한 예술을 위해 자신 안에 있는 흑조(관능적이며 마력이 강한)를 끄집어낸다. 니나라는 한 자아 안에서 흑조와 백조로 나누어 대립하고 있었지만, 사실 니나는 수많은 자신을 만난다. 나에게는, 흑조를 끄집어내다 파멸해간다는 강렬한 주제보다 바를 잡은 아름다운 니나가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다 비스듬히 기울인 순간, 수없이 늘어서 있는 여러 명의 자신을 만나는 장면이 더 인상적이었다. 

물론 영화에서는 병적 히스테리를 드러내주는 장면으로 그려졌지만, ‘수많은 나’라는 사실이 내게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페르소나(persona)’라는 말 들어보았나. 그리스 고대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일컫는 말이다. 이 말을 심리학자 융이 자신의 이론에 쓰게 되는데, 심리학에서 이 말은 타인에게 비치는 외적 성격을 나타내는 용어다. 융은 인간이 천 개의  페르소나(가면)를 갖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적절한 페르소나를 두르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어나간다고 했다. 즉, 페르소나를 통해 주변의 세계와 상호관계를 맺어간다는 말이다. 

과거 ‘인격의 가면’이라고 할 수 있는 페르소나는 이중적인 인간의 대표적인 모습인 ‘지킬 박사와 하아드’로 대변되기도 했다. 하지만 페르소나는 사회적 자아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회적인 역할에 따라 명명되어지는 ‘~으로서의 나’를 말한다. 따라서 사회가 분화될수록 한 사람이 사회 안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게 되고, 따라서 한 개인이 소유한 페르소나의 수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지킬과 하이드가 살았던 시대로부터 백년이 흘렀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복합적인 존재인지 절감한다. 우리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가치를 동시에 원하는 우리의 마음을 종종 발견한다. 정갈한 규범을 좇지만, 관능의 자유로움을 거부하긴 어렵다. 전자가 옳고 후자가 그르다는 판단도 마찬가지로 어리석다. 오히려 자신 안에 있는 이 갈등을 무모하게 분리할 때, 자신의 페르소나를 자신의 실체와 분리하려 할 때 지킬과 같은 파멸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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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시대에 관한 최고의 안내서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적 위선을 드러내준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즉, 이 소설은, “빅토리아 시대에 관한 최고의 안내서들 중 하나로, 겉으로는 체면을 차리면서도 속으로는 욕정으로 가득한 19세기의 근본적인 사회분위기에 대해 날카롭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높이 평가받고 있다고 언급되기도 한다. 즉, ‘도덕’과 ‘억압’에 짓눌린 신사와 숙녀들의 내면에 감추어진 욕망과 위선을 드러내기 위해 하이드라는 악의 결정체를 탄생시킨 것이라는 견해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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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1850년 에든버러 출생. 부유한 토목기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주길 바라는 가족들의 기대와는 달리 에든버러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그는 당시 도시의 직업 계층이 요구하는 장로교의 관습에 저항했고, 그래서 부모와 갈등을 겪기도 했다. 그후 스트븐슨은 체면을 내세우는 중산 계급이 가지는 잔인성과 위선을 혐오하는 자유로운 보헤미안을 자처했다. 

<보물섬>(1883), <납치>(1886)로 모험소설 작가로 명성을 굳혔다. 스티븐슨이 자란 칼뱅주의 성장환경은 그에게 운명 예정설에 의한 의무와 악의 존재에 대한 매혹을 심어주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인간정신의 어두운 측면을 탐구했으며 <발란트레의 거장>의 거장 캐릭터는 ‘그가 악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을 갖춘 인물이다. <심술궂은 자넷> <명랑한 사람들> <병속의 꼬마 도깨비> 등 여러 편의 단편을 남겼다. 1889년 사모아 섬에 정착해서 살았는데 <허미스톤 웨어>를 집필하던 중 1894년 마흔네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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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와 아이들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내 마음을 철저하게 속이고 살아온 내 인생엔

가슴 깊이 존재했던 불만이 있어.

너무나도 달랐던 두 맘을 갈라놓기 위해서

어렵지만 난 과감하게 선택했었네.

끝없는 내 마음의 갈증은

저주받은 이 인류가 풀지 못할 숙제인가.

난 언제라도 꿈틀거릴 내 본성이 두려웠어.

캄캄한 밤에 나는 누군가에게 길을 묻다가 내리쳤어.

그 안개 속을 난 뛰고 있어 날 망쳤어.

내가 먹던 약은 이제 내 말을 듣질 않게 됐었네.

저주받은 내 선택에 끌이 보였어. 

서태지와 아이들이 1994년 발표한 노래의 제목. 마약에 찌든 한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최악의 비참한 상황까지 치닫게 되는지, 그 과정을 담아낸 이 노래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이중적인 욕망과 그 욕망이 좋이 않은 방향으로 실현되어 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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