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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aKim 김지나 Jun 03. 2016

페스트와 맞서 싸운
인간들의 이야기

 10. 카뮈, <페스트> 

1947년 6월 서른네 살의 작가 카뮈는 <페스트>를 세상에 내놓았다. ‘페스트’는 14세기 유럽 세계가 겪은 전대미문의 악몽으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페스트(흑사병)로 사망했으며, 서유럽 인구는 16세기가 되어서야 페스트가 창궐하기 전 수준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 

카뮈는 194×년 프랑스 영토인 알제리 북부 도시 오랑을 덮친 재앙으로 페스트를 지목했다. 도저히 인간의 척도로 이해할 수 없는 재앙, 페스트. 인간들은 페스트의 한복판에서 비극적이며 부조리한 세계를 절감하는 한편, 그 속에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고,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고뇌한다. 카뮈는 왜 이 케케묵은 중세의 전염병을 현대 세계로 불러들인 것일까? ‘페스트’가 갖는 다양한 함의(含意)는 지금 우리가 직면한 재앙은 무엇인지, 그 재앙에 우리가 어떻게 맞서고 있는지 깨닫게 한다.



카뮈와 <페스트>

문학을 꿈꿔온, 혹은 문학을 좋아하는 청년들에게 <이방인> <전락> <시지프의 신화>의 작가 카뮈는 단연 흠모의 대상이다. 감수성 넘치는 문체로 날카롭게 빛을 발하는 지성(知性)은 철학과 문학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아울렀고, 그의 실존적 고민은 당대의 사회적 실천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실천 속에서 더욱 견고해졌다. 탁월한 문학적 감수성을 가진 매혹적인 지성인. 그가 카뮈다.       

사르트르가 자신의 책 <상황>에서 카뮈를 회고하는 부분을 잠깐 옮겨보겠다. 


우리들에게 당신은 한 인물과 하나의 행동과 하나의 작품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이루어진 존재였습니다. 그때는 1945년이었지요. 사람들은 항독 지하운동가 카뮈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방인>의 저자 카뮈를 발견했었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지하에서 발견되던 신문 <전투>의 그 사설 집필자가 바로 어머니를, 그리고 정부(情婦)를 사랑한다고 말하기를 거부할 정도로 극단적인 정직성을 보여주던 뫼르소를 창조해낸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특히 당신이 그 양쪽 중에서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외견상의 그 같은 모순은 우리들 자신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진보를 가져왔습니다. 당신은 하나의 모범이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내면 속에 우리 시대의 갈등을 요약하고 있었으며 그 갈등을 사는 치열함을 통해서 그것을 극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카뮈가 ‘페스트’에 관한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은 흔적이 처음 나타난 것은 1941년이었고, <페스트>는 첫 구상부터 마지막 마무리까지 장장 7년이라는 긴 세월이 소요되었다. 사실 소싯적에 <페스트>를 시작은 했지만 끝내지는 못했다. <이방인>과 <전락>은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나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의 일이다. 당시의 내가 왜 끝까지 읽지 못했는지 알 것 같다. 페스트가 창궐한 오랑의 한복판을 지루할 정도로 차분하게 그려내고 있는데, 그 서술의 행간 속에 숨겨진 작품의 깊이나, 카뮈 사상의 핵심을 읽어낼 만큼 지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던 것이다.  

세월이 흘렀고, 그만큼 생각의 폭과 깊이도 조금 자란 모양이다. <페스트>를 다 읽고 책을 덮은 뒤 나는 잠시 숨을 고른다. 작품의 깊이에 압도되었고, 작품 속에 드러난 카뮈의 사상에 매료된 까닭이다. <페스트>는 그야말로 ‘페스트’라는 재앙이 덮친 도시 오랑과 그 속에 존재한 인간들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장장 7년에 걸쳐 구상하고 마무리하면서 카뮈가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는 무엇일까?

카뮈가 스톡홀름에서 노벨상을 받을 때 한 말을 읽으면서 <페스트>가 과연 어떤 작품인지 탐구심을 가져보자. 


그렇다. 나의 작품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내게는 정확한 플랜이 세워져 있었다. 우선 나는 부정(否定)을 표현했다. 세 가지 형태로 말이다. 소설로는 <이방인>이었고 극으로는 <칼리굴라>와 <오해>였으며, 이념적 형태로는 <시지프의 신화>였다. (중략) 사람은 부정 속에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으므로 <시지프의 신화>의 서문에서 그 점을 미리 밝혀놓았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세 가지 형태의 긍정을 표현해보고자 했다. 소설로는 <페스트>, 극으로는 <계엄령>과 <정의의 사람들> 그리고 이념적인 것으로는 <반항적 인간>이 그것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세계는 부조리로 가득 차 있고, 이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부정을 담은 소설이 <이방인>이라면, <페스트>는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부정 속에 억누를 수 없는 하나의 ‘긍정’이 있음을 담아낸 작품이다. 페스트가 창궐하는 부조리한 세계, 그 세계 속에서 결코 무릎 꿇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의사 리유와 그와 동지적 우정을 나눈 타루를 통해, 우리는 카뮈의 이 육성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성싶다. 



오랑을 급습한 재앙, 페스트

감염된 설치류가 매개체가 되어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유행병 페스트는 중세 유럽의 악몽이었다. 원래 중국과 아시아 내륙에 번성했던 페스트는, 1347년 킵차크 군대가 크림에서 제노바 교역소를 포위하고, 페스트 환자의 시체들을 노포(弩砲)로 도시를 향해 쏘아보냄으로써 유럽에 퍼지게 되었다. 당시 문헌에 따르면, 일명 ‘흑사병’으로 불리는 이 병의 치사율은 인구의 8분의 1에서 3분의 2 정도에 이르렀고, 1400년 영국 인구는 1300년 인구의 절반 가량으로 줄었다고 하니, 실로 무시무시한 질병이었다. 페스트로 인한 인구 손실은 결국 노동력 손실로 이어져, 유럽 경제의 기반인 장원제도와 봉건제도마저 위태로웠다고 한다. 중세 유럽 대륙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늘이 어떠한 비극을 초래했는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카뮈는 이 참혹한 재앙을 현대로 불러들였다. 194×년 오랑이라는 도시를 급습하게 만든 것이다. 독자들은 “4월 16일 아침, 의사 베르나르 리유는 자기의 진찰실을 나서다 층계참 한복판에서 죽어 있는 쥐 한 마리를 목격했다.”는 문장을 읽으며 이 일이 바로 엄청난 재앙의 서막임을 감지하게 된다. 죽은 쥐떼들이 여기저기 목격되고 온 동네는 쥐 이야기로 들끓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죽은 쥐들의 수는 늘어나, 급기야 4월 25일 하루 동안 6231마리의 쥐가 수거, 소각되기에 이르는데, 죽은 쥐들이 자취를 감춘 순간, 쥐들에게 일어난 일들이 똑같이 인간에게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도시 오랑은 죽은 쥐의 출몰이라는 대수롭지 않은 사건으로 시작된 페스트의 창궐로 죽음의 도시로 변모한다. 

이제는 거의 자취를 감추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페스트’균을 왜 카뮈는 현대 도시 오랑에 퍼뜨린 것일까?  

번역자 김화영은, 1939년 9월에 터진 제2차 세계대전은 카뮈로 하여금 <페스트>라는 소설을 쓰도록 만든 기폭제가 되었다고 해설하고 있다. 카뮈의 <작가수첩>을 보면, “작품의 첫 착상에서부터 페스트는 ‘전쟁’의 내면화 과정을 상징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카뮈에게는 “한가하고 습관에 젖은 삶 속으로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전쟁은 질병이나 죽음과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다시 말해 어처구니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 이었다는 것이다.

‘페스트’라는 재앙의 습격을 받은 오랑. 이제 페스트는 오랑 시민들의 투쟁의 대상이 되었고, 그리하여 이 작품은 페스트로 쓰러진 사람들, 그리고 각자 자신들의 방식으로 페스트에 맞서 싸운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페스트에 대응하는 몇 가지 방식_리유, 타루, 랑베르, 그랑, 파늘루 신부 


“페스트에 휩쓸려 새 한 마리 볼 수 없게 된 아테네, 말없이 죽음의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한 중국의 도시들, 썩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시체들을 구덩이에 처넣고 있는 마르세유의 도형수들, … 흑사병이 창궐하는 동안에 갈고리로 찍어서 끌어내지는 환자들, 마스크를 쓴 의사들의 카니발, … 공포에 질린 런던 시의 시체 운반 수레들, 그리고 도처에서 항시 끊이지 않는 인간들의 비명으로 넘쳐나는 밤과 낮.”


페스트가 몰고 온 이 모든 참상이 오랑을 덮쳤고, 인간의 의지로 거스를 수 없는 죽음의 징후에 사람들은 급작스런 공포와 체념에 사로잡혀 버렸으며, 도시는 형용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4월에 시작된 페스트는 여름 더위에 힘입어 맹위를 떨쳤고, 9, 10월, 드디어 도시 전체를 급습했다. 이제 재앙의 미친 바람이 휩쓸고 있는 도시의 한복판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방식으로 페스트에 대항해야 한다.  

한결같이 성실하고 정직하고 단호하게 페스트와 맞서 싸웠던 의사 리유. 소설 초기에는 그저 연대기의 한 객관적 서술자처럼 옆으로 비켜서 있다 점점 전면에 모습을 드러냈다가 페스트가 잦아질 무렵 어처구니없게 페스트균의 일격에 죽음을 맞이한 타루. 이 도시와는 전혀 상관없다며 이방인처럼 주위를 기웃거리던 기자 랑베르, 그리고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욱 영웅적인 인물 시청직원 그랑과 종교적 신념이 투철한 파늘루 신부. 리유의 동료의사이며 페스트 혈청을 만들어내느라 여념이 없었던 늙은 의사 카스텔. 

소설의 주요 인물들은 이 ‘페스트’라는 비극적 재앙에 대해 자신들의 방식으로 맞선다. 이들이 보여준, 혹은 제시한 대응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되는데, 파늘루 신부가 보여준 관념적(초월적) 방식과, 이에 대한 비판으로서 리유와 타루가 보여준 ‘반항’을 통한 구체적 실천 방식이 그것이다. 더불어 눈여겨보아야 할 사람이 있는데, 오랑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가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확신했던 기자 랑베르의 변화다.   


▲파늘루 신부의 관념적(초월적) 방식

중키에 몸이 딱 바라진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 초기 기도주간에 설교자로 나서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설교하였다. 


“(중략) 이 재앙이 처음으로 역사상에 나타났을 때, 그것은 신에게 대적한 자들을 쳐부수기 위해서였습니다. 애굽 왕은 하느님의 영원한 뜻을 거역하였는지라 페스트가 그를 굴복시켰습니다. 태초부터 신의 재앙은 오만한 자들과 눈먼 자들을 그 발 아래 꿇어앉혔습니다. 이 점을 잘 생각하시고 무릎을 꿇으시오.”


그의 연설에 따르면, 현재 (여러분)들이 겪고 있는 불행은 (여러분)들이 신에게 대적한 결과로 받게 되는 당연한 심판이며,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반성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재앙이니 신 앞에 회개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페스트에 대해 관념적, 초월적 방식을 견지하던 파늘루 신부의 신념은 예심판사 오통의 어린 아들의 죽음을 고통스럽게 지켜본 후 커다란 시련을 맞는다. 이 작품에서 가장 격정적이고, 인상적으로 그려진 이 장면에는 작품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등장한다. 리유, 타루, 그랑, 랑베르, 파늘루, 카스텔…. 죽음과 싸우는 한 아이의 모습은 운명과의 싸움임을 실감나게 한다. 그리고 파늘루 신부는 이 죽음을 지켜본 그날 이후 변하였다. 그의 생각과 달리 죄없는 사람들조차 페스트의 습격에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었으며, 페스트는 사악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올바른 사람들마저 두려움에 떨게 하는 정의롭지 못한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어린 아이의 죽음을 지켜본 후 리유는 파늘루에게 화를 내며 말했고, 파늘루를 돌아보며 변명처럼 말한다. 

“용서하십시오. 피곤해서 그만 어리석은 짓을 했군요. 이따금 이 도시에서 나는 반항심(강조)밖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리유의 말에 파늘루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정말 우리 힘에는 도가 넘치는 일이니 반항심도 생길 만합니다. 그렇지만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리유는 파늘루를 바라보며 말한다. “아닙니다. 신부님. 나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달리 생각하고 있어요. 어린애들마저 주리를 틀도록 창조해놓은 이 세상이라면 나는 죽어도 거부하겠습니다.”  


▲ 리유와 타루의 ‘반항’을 통한 구체적 실천

페스트가 발발하던 초기부터 리유는 비타협적으로 페스트에 맞서 싸울 것을 단호하게 요구한다. 보건위원회를 열고, 페스트에 대처할 현실적 방법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동료의사 리샤르와 대립할 때에도 리유는 “그것을 페스트라 부르건 지혜열이라고 부르건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며, 중요한 것은 시민들의 반수가 목숨을 잃는 것을 저지시키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안이한 대처로 사태를 무마하려 할 때, 그리하여 이 질병을 페스트라고 확신하냐고 물을 때에도 중요한 것은 어휘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라고 잘라 말한다.    

이런 리유에게는 동지적 우정을 나누게 된 타루가 있었다. 타루는 소설이 진행되는 한참동안이나 오랑 시민들은 물론 심지어 리유마저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어디서 왔는지 모를 정도로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리유와 우정의 시간을 갖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타루는 페스트가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페스트와 싸우기 위해서는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보건대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리유 역시 그의 말에 흔쾌히 동의한다. 


“이렇다 할 확신도 없이 그냥 관리들이 하는 방식대로 모집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상상력입니다. 그들은 결코 재앙의 스케일에 맞설 만한 능력이 못 돼요. 그래서 그들이 상상해낸 대책이란 것은 겨우 두통 감기약 수준에 불과한 겁니다. 만약 그들이 하는 대로 맡겨두었다가는 그들은 결국 손들고 말 거예요. 우리도 함께 죽게 되겠죠.”


타루는 리유에게 그러니 보건대 일을 자신에게 맡겨주고, 당국은 빼버리자고 말한다. 그리고 보건대는 시민들이 페스트 속에 더 깊게 파고들도록 도와주었으며, 시민들에게 부분적이나마 질병이 눈앞에 있으니 그것과 싸우기 위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된다는 것을 납득시켰다. 타루는 페스트가 한창이던 시기에 리유와 함께 페스트를 퇴치하기 위해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한다. 시청직원 그랑과 늙은 의사 카스텔은 그들의 우군이었다.  

페스트라는 부조리한 재앙에 대한 ‘반항’과 투쟁은 파늘루 신부의 태도에 대한 비판과 관련이 있다. 리유는 “체념하고서 페스트를 용인한다는 것은 미친 사람이나 눈먼 사람이나 비겁한 사람의 태도일 수밖에” 없다면서, 있는 힘을 다해 맞서 싸워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따라서 치료는 곧 반항이며, 페스트는 곧 죽음을 의미하므로 이와 싸우는 것은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솟구치는 혐오감의 표현인 것이다. 

리유와 타루의 이러한 태도를 통해, 우리는 <페스트>가 왜 부정의 소설이 아닌, 긍정의 소설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편 끊임없이 자신의 사랑과 행복을 위해 탈출을 시도하는 기자 랑베르에 대한 리유의 전면적 이해는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그의 ‘반항’ 속에 ‘행복에 대한 조바심’이 전제돼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랑베르의 변화

랑베르는 지면을 많이 차지하지는 않는 데 비해 중요한 몫을 담당한 인물이다. 그는 파리에서 취재차 오랑에 왔다가 억울하게 발이 묶여 있는 동안 갖은 노력을 다해 탈출을 꾀한다. 그는 죽음의 도시 오랑과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으므로, 페스트 발발 초기부터 백방으로 오랑을 탈출할 방법을 찾는다. 사랑하는 여자 곁으로 돌아가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그의 욕망은 거금을 들여 시 관문을 지나는 경비병을 매수하고,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오랑을 빠져나갈 날이 확정된다. 

마침내 오랑을 떠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랑베르는 돌연 리유를 찾아와 떠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말한다. 


“나는 늘 이 도시와는 남이고 여러분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러나 이제는 볼 대로 다 보고 나니 나는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이곳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오랑을 떠나는 것, 그것은 랑베르에게 있어 자신의 행복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떠나버리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파리에 두고온 자신의 연인을 사랑하는 데도 거북해지리라는 것이었다. 

재앙을 회피하려던 랑베르의 변화 속에는,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원칙적으로는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눈앞에 전쟁이 닥쳤을 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회피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임을 깨달은 카뮈 자신의 모습이 투영돼 있다.  


‘페스트’의 의미

페스트는 1월이 지나면서 잦아들고 페스트의 노예로 살았던 오랑 시 사람들은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이 시점에 타루는 페스트의 습격에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타루의 죽음은 인간이 결코 페스트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는 비극적 암시를 품고 있다.    

오랑 시가 페스트로부터 해방되어 환희의 외침소리가 울려퍼질 때, 리유는 그 속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하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그는 그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고 있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가지고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유의 이 마지막 성찰 속에는 인간의 삶을 이루는 다양한 일상 속에 페스트균이 존재하고 있다는 카뮈의 인식이 드러난다. 리유가 말한, ‘방’ ‘트렁크’ ‘손수건’ ‘낡은 서류’ 같은 일상적인 물건들은 현대문명 속에서 일상화되어 있는 사건, 사고들의 비유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인간이 지배할 수 없는 수많은 질병들, 개인의 운명을 짓이겨 버리는 수많은 전쟁과 테러, 전혀 예기치 못하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운명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다양한 재해 등 현대문명의 수많은 구성요소들이 리유가 <페스트>의 마지막 문단에서 말하고 있는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을 ’페스트균인 것이다. 

인류는 세계대전을 치렀지만,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크고 작은 전쟁과 테러라는 재앙을 수시로 맞고 있다. 이 비극적인 일들은 거기에 참가하는 수많은 개인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발발해서 개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진행돼 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이유 없는 광기나 죽음에 이르게 된다.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테러의 희생자들 또한 전쟁의 와중에서 희생당한 사람들만큼이나 부조리한 죽음을 맞는다. 전쟁과 테러 속에서 부조리한 죽음을 당한 이들의 죽음에는 어떠한 정당한 논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우리의 삶 곳곳에 잠복해 있다가 언제든지 우리를 습격할 채비를 하고 있는 페스트균의 습격을 받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카뮈에게 페스트는 무엇일까. <페스트>를 쓸 당시의 그에게는 전쟁이었을 것이고, 전체주의였을 것이고, 온갖 형태의 압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세계 여기저기 번지고 있는 페스트의 정체는 무엇일까? 전쟁과 테러, 지구 온난화에 의한 자연 재앙, 그리고 매일 매일 우루 주위에 일어나는 부조리한 죽음들…. 따라서 페스트의 상황은 바로 우리들이 처한 상황인 것이다. 

이 부조리한 세계에 내던져진 고독한 인간들의 실존, 그것은 곧 반항하는 인간으로서의 실존이다. 


“‘페스트’라는 말이 입 밖에 나온 것도 사실이고, 바로 이 순간에도 재앙이 두서넛의 희생자를 후려쳐서 쓰러뜨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거야 뭐 중지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인정해야 할 것이면 명백하게 인정하여, 드디어 쓸데없는 두려움의 그림자를 쫓아버린 다음 적절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페스트가 멎을 것이다.”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치열한 부정(否定)과 날카로운 현실인식에 기반하여, 자신의 온힘을 다해 그 사실에 ‘반항’함으로써 자신의 실천을 모색하는 것, 이것이 카뮈가 말하는 <페스트>의 긍정의 힘이 아닐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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