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주의는 어떻게 20세기 사상사의 중심에 서게 되었나?
구조주의의 가닥을 잡기란 어렵다. 학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분류를 위한 공통 기준도 없기 때문이다. 이해를 위한 키워드는 사물의 관계를 개별적으로가 아니라 전체 체계 안에서 다른 사물과의 관계에 따라 인식하는, 인식의 대전환을 이룬 하나의 사상적 경향이라는 것!
‘구조언어학, 구조인류학, 포스트구조주의…’ ‘구조’혹은 ‘구조주의’가 붙어 있는 학문의 명칭이나 용어를 볼 때마다 궁금증이 생깁니다. ‘구조언어학은 언어학의 구조를 연구하는 학문인가? 아니면 어떤 ‘구조’로 언어학을 분석한다는 뜻일까?’ ‘구조주의’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조’란 말은 어떤 전체의 뼈대라는 뜻인데, 거기에 ‘주의’라는 말이 붙는다면 어떤 의미가 될까? 구조를 중시하는 하나의 사상인가? 그렇다면 대체 여기서 말하는 ‘구조’란 뭘까?… ‘구조’라는 말이 따라붙음으로써 파생된 의미들에 대해 추측이 어려웠고, 이런 궁금증들이 쌓여 ‘구조주의’에 대해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대략적으로 구조주의에 대해 알아보려고 백과사전을 뒤적였는데, 무슨 뜻인지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이 설명에 번호를 달아보겠습니다. ‘전체 체계 안에서 다른 사물과의 관계에 따라 규정’이라는 의미와 ‘총체적인 구조와 체계에 대한 탐구를 지향’이라는 설명을 잠시 새겨두도록 합시다.
➊ 어떤 사물의 의미는 개별로서가 아니라 전체 체계 안에서 다른 사물과의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는 인식을 전제로, ➋개인의 행위나 인식 등을 궁극적으로 규정하는 총체적인 구조와 체계에 대한 탐구를 지향하는 현대 철학 사상의 한 경향이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감을 잡을 수 없는 백과사전의 이 요약이, 나중에 책과 자료들을 읽고 나서야 정확한 설명이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되더군요. 백과사전의 뒤이은 설명은, 구조주의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발전된 분석 양식이며, 이것이 인접한 학문으로 퍼져나가 현대에 와서는 인문사회과학의 모든 분야의 중요 개념이 되었고, 한 시대의 중요한 인식체계가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살펴보겠지만, 소쉬르는 다양한 외국어들 사이의 공통점을 찾으려 했던 19세기의 언어 이론에 불만을 느꼈고, ‘하나의 단어는 옷감의 실과 같은 것으로 그 기능이 다른 주변의 실들과의 짜임과 관련’해서만 결정된다고 보았지요.
예를 들어 걸음마 단계의 아이는 배고프다는 단어를 어떻게 발음하는지, 어떻게 ‘맘마’라고 말하는지를 배울 뿐이다. 이 단어는 그 자체로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어른들도 그 단어의 의미를 말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빈틈없는 부모라면 유아의 언어 능력과 행동을 큰 맥락에서 이해하고 유아가 ‘우유’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들을 것이다. 요컨대 언어는 자의적인 사회관습이며 이에 따라 한 언어의 모든 부분들은 커다란 사회 구조 체계로부터 그 의미를 획득한다. _《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그런 다음 프로이트를 비롯해 라캉, 레비스트로스, 바르트, 푸코의 구조주의를 개략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요, 텍스트를 모두 읽고 나도 여전히 ‘대체 구조주의가 뭐래는 거지?’라는 의문이 머릿속에 맴맴 돕니다.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라는 부제가 붙은,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를 읽고서야 어렴풋이 구조주의를 이해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구조주의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기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철학적 구조주의라는 게 일정하게 조직돼 있지도 않고, 학파를 이룬 것도 아니고, 분류를 위한 공통 기준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앞의 백과사전의 요약 내용대로 그러한 경향성을 지닌 일군의 사상가들―소쉬르, 레비스트로스, 푸코, 라캉 등―의 사상 속에 깃들어 있는 구조주의를 이해해야 하는데, 이해 자체도 어렵거니와 이해를 토대로 그 경향성을 식별해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찌되었든 구조주의에 대한 이해의 실타래는 ‘인식 방법의 대전환’을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즉, 구조주의가 인식 방법에 대한 획기적인 전환을 이뤘기 때문에 20세기 사상사를 뒤흔들게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려 합니다.
보통 하나의 사상은 이전 사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생성됩니다. 그렇다면 구조주의는 무엇에 대한 극복의 과정이었으며, 구조주의를 통해 인식의 방법이 어떻게 변화했다는 것일까요?
구조주의라는 사상이 아무리 난해하다고 해도, 그것을 세운 사상가들이 ‘인간은 세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며 행동할까?’라는 물음에 답하려고 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그 물음에 대한 접근 방법이 보통 사람들보다 강하고 깊었을 뿐이죠._우치다 타츠루,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인식방법이란 말이 꽤 어려웠는데 우치다 타츠루가 쉽고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군요. “인간은 세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며 행동할까?”라는 말로. 사물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 사람과의 관계 혹은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런 것이 아마도 철학에서 말하는 ‘인식’이라는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구조주의 이전의 근대에는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며 행동했을까요?
사전적 설명에 기대 단선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신의 대리인쯤으로 파악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세계의 중심이요, 주인으로 보고 (마치 신처럼) 인간이 사물들 전체를 규정하고,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보았던 것이죠. 또한 어떤 주관적이고 자기결정적인 주체가 세상을 인식하고, 의사를 결정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구조주의는 사물의 관계를 개별적으로가 아니라 전체 체계 안에서 다른 사물과의 관계에 따라 인식한다고 보았고, 주체가 자율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규정하는 ‘구조’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의 근대 비평에 대한 문제제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저자란(문학의 경우에 국한해서) 0에서 작품을 창조해낸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은 일종의 신의 영역이니, 저자를 이렇게 규정하는 것은 조물주를 모방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평가들은 이들 저자에게 작품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는지 묻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쉽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자신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평가는 하는 수 없이 “저자의 가정환경, 유아 때의 체험, 독서경험, 정치적 사상, 종교, 병과 질환, 성적 기호 등에서 작품의 ‘비밀’을 찾으려고 합니다.”(아치다 타츠루, 같은 책) 이것이 근대비평의 기본 형태인데요, 바르트는 이 원칙을 밀어냅니다.
바르트는 저자의 작품(텍스트)은 0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며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 다양한 것들이 섞여 직조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즉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에서 온 복합적인 글쓰기(에크리튀르)로 이루어져 서로 대화하고 풍자하고 반박한다”(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고 말합니다. 나아가 이 “다양성이 집결되는 장소가 바로 독자”라고 말합니다. 텍스트는 독자에게 수용되면서 다르게 규정되고 받아들여지게 된다며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을 치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텍스트의 창작뿐 아니라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는 ‘구조’가 얽혀 있음을 알았고, 이를 비평의 기본원리로 제시합니다.
백과사전에서 구조주의를 설명한 요약 내용을 다시 한번 찬찬이 읽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물의 의미는 개별로서가 아니라 전체 체계 안에서 다른 사물과의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는 인식을 전제로, 개인의 행위나 인식 등을 궁극적으로 규정하는 총체적인 구조와 체계에 대한 탐구를 지향하는 현대 철학 사상의 한 경향이다.”
처음 읽었을 때와는 다르게 어떤 의미인지 가늠이 되는지요? 바르트의 핵심 사상을 개괄하지는 못했지만, 바르트가 제기한 비평의 원리를 통해 ‘구조주의’적인 인식방법이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신호가 오고 있는지요?
소쉬르의 언어학은 구조주의의, 혹은 구조라는 개념의 출발선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어떤 대상이나 현상을 겉으로 드러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현상’을 중심으로 볼지, 아니면 현상을 지배하는 보편적인 ‘구조’를 중시해서 볼지 폭넓게 논의되었습니다. 프로이트, 니체, 마르크스 같은 사상가들 역시 인간의 인식을 규정하는 ‘구조’에 대해 자신들의 사상을 피력했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지금 우리가 거론하고 있는 구조의 개념은 20세기 초반 제네바 대학의 한 강의실에서 소쉬르라는 언어학자가 강의한 이론에서 비롯되었고, 이 이론이 프라하학파에 계승돼 하나의 철학 분파로 자리매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철학 분파는 점차 확장되어 20세기 사상 논쟁에 중심에 서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소쉬르의 언어학적 분석방법이 무엇인지, 왜 그 분석방법이 인문사회과학 전 분야로 확장되어 나갔는지 이해해야 하는데, 이것 역시 간단치 않습니다.
소쉬르가 언어학에서 다룬 구조적 방법론을 강의하기 전, 즉 전통적인 사고로는 언어가 대상을 가리킬 수 있다고 보았고, 언어를 통해 실제 대상을 재현할 수 있으며, 이름이 있기 전에 사물이 있고, 사물 자체는 본래 가지고 태어난 어떤 성질이나 의미가 내재해 있다고 보았습니다. ‘개’라는 언어가 우리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대상인 ‘개’를 가리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것입니다.
그러나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라는 용어로 언어가 대상을 가리킬 수 없으며, 언어가 사물의 이름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기의인 ‘개’는 꼭 ‘개’라는 기표를 갖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죠. ‘쾌’나 ‘멍’이라고 표현해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말의 ‘개’를 미국에서는 ‘dog’라고 부르고, 독일에서는 ‘Hund’라고 부르듯. 이처럼 같은 개념을 다른 기표로 나타내고 있으며, 따라서 ‘개’라는 기의와 ‘개’라는 기표 사이에는 꼭 그렇게 짝을 지어야 할 어떤 필연성도 없다는 얘기입니다. “만약에 낱말이 미리 주어진 개념을 표시하는 역할을 한다면 각 언어마다 하나의 의미에 해당하는 정확한 대응어가”(소쉬르, 일반언어학 강의) 있어야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따라서 이름이 있기 전부터 사물이 존재한 것이 아니며, 이름을 갖지 못한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게 소쉬르의 생각입니다. 그는 마음이나 내면이나 의식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들도 언어에 의해 표현됨과 동시에 생긴 것으로 말을 하고 난 뒤에야 우리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안다고 말합니다.
또한 소쉬르는 “언어를 ‘사회 문화적 맥락’이라는 외적 요인(파롤)과 ‘체계와 규칙과 관련된 것’(랑그)이라는 내적 요인으로 나누어 후자를 주된 연구 대상으로”(<구조주의와 그 이후>) 삼았습니다.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을 더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능력도 지면도 부족한 탓에 뭉뜽그려 말하자면, “구조주의 언어학은 어떤 사물이나 대상의 의미, 성질, 기능, 가치는 본래부터 있어온 게 아니라 이것들을 포함한 관계망 또는 시스템 속에서 어떤 ‘포지션’을 차지하는가에 따라 나중에 결정된다고 본 것입니다.” 랑그와 파롤, 기의와 기표, 언어의 자의성 등 소쉬르의 언어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따로 공부가 필요합니다. 언어학에 가한 그의 구조적 방법론은 획기적이었고, 기호 일반과 문화현상 전반을 새롭게 보는 관점으로 확대되어 ‘구조주의 혁명’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큼 인문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죠.
예를 들어 결혼반지의 의미를 이해하고 싶다고 가정해보자. 그럴 경우 내가 속한 문화의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고립해서 내 결혼반지의 의미를 캔다는 것은 내게 무익한 일이다. …나는 결혼반지를 다른 사람에게 줄 때 지닌 신호처럼 결혼반지가 문화 구조의 거대 체계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결혼반지를 끼는 것이 어떻게 해서 학교 반지를 끼는 것과 다른지를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_《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구조주의, 여전히 이해하기가 어렵지요? 이 불충분한 설명을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라는 책으로 해갈했으면 좋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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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그와 파롤
랑그(Langue)와 파롤(Parole)은 구조주의 언어학의 시초인 소쉬르가 처음 사용한 낱말들로, 언어활동(불어: langage)에서 사회적이고 체계적 측면을 랑그라고 하였고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발화의 실행과 관련된 측면을 파롤이라고 불렀다. 랑그와 파롤은 서로 상반되지만 서로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한다.
파롤은 같은 내용의 언어가 사람마다 달라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실제 발화 행위이며, 이러한 다양한 파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랑그이다.
언어는 다른 이와의 의사소통이기 때문에 서로 공통된 규칙이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가 ‘개별적’ 으로 대화하는 것을 파롤, 공통된 문법이나 낱말들에 존재하는 서로간의 규칙으로 고정적인 것을 랑그라고 한다. 가령 사람들은 공통적인 '살다'라는 낱말을 인식할 수 있는데 이를 랑그 때문이라고 볼 수 있고, 실제 대화할 때 상황에 따라 '살다' 는 조금씩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는데, 그 각각의 용례들을 파롤이라고 볼 수 있다. 같은 말이라도 상황이나 억양에 따라 받아들이는 뜻이 달라지는 것도 이 파롤 때문이다.
랑그와 파롤을 처음 사용한 소쉬르는 언어학의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랑그’ 뿐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파롤은 상황에 따라 쓰이는 느낌, 또는 뉘앙스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정적이고 본질적인 랑그만을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관점은 후기 구조주의에 이르러 많은 비난을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