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즘에 대한 반작용, 혹은 질문
하나의 흐름은 기존의 흐름을 비판하며 역행하는 반작용을 통해 또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중세의 신 중심, 귀족 중심의 반이성을 거부하며 새로움의 기치를 치켜올린 '모더니즘' 역시 예외일 수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무엇을 거부하고자 했을까?
우리는 ‘포스트모던’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포스트모던한’ 시대라니 어떤 시대를 말하는지 알쏭달쏭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란 말을 해체해보면, 모더니즘 앞에 포스트(post)라는 접두어가 붙어 있습니다. 포스트는 라틴어로 ‘뒤’ 혹은 ‘후’라는 뜻이니, 풀이대로 보면 ‘모더니즘 후’라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모더니즘 이후의 시기를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겠구나 싶지만, 그건 아닙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시대 구분을 위한 용어가 아니고, 모더니즘과는 상반된 특징을 갖는, ‘모더니즘 이후의 서양의 사회, 문화, 예술의 총체적 상황’을 이르는 말입니다. 물론 이 풀이는 아주 불친절합니다. 모더니즘에 대한 개념도 명확히 모르니 더 헛갈릴 뿐입니다. (잠깐 이에 대한 설명은 미뤄두겠습니다.)
한편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는 문학과 예술, 광고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철학, 정치 사회 이론, 심지어는 자연과학 분야에서까지 전방위로 쓰이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알아볼 작정으로 자료를 읽기 시작했는데 분야마다 쓰이는 맥락이 조금씩 달라서 명확하게 이해하기가 어렵더군요. (문학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 등을 연구하는 것은 연구자들의 몫이겠지요.)
언어 상황에 따라 그 의미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밖에 없는 인칭대명사처럼 포스트모더니즘도 어떠한 이론가가 어떠한 맥락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저마다 다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두고 C. 배리 체보트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텅 빈 기록관”이라고 부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김욱동,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을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텅 빈 기록관’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확실히 포스트모더니즘은 이것이다, 라고 정의하기가 어려운 게 사실인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 중에 하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하나의 철학이론이 아닌 것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하나의 철학이론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파괴적일 수 있다. 그 대신 그것은 사물의 근대적 개념들에 대한 다양한 비판들을 망라하는 하나의 우산운동(an umbrella movement)이다. _새뮤얼 스텀프, 제임스 피저,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해서 정의하는 대신, ‘근대적 개념에 대한 다양한 비판’이며, 모더니즘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했다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평가에 주목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려면 모더니즘부터 이해해야겠지요? (모더니즘에 대해 알아보기에 앞서 이 글에서는, 근대는 시대구분의 의미로, 모더니즘은 근대에서 출발해 현대 초중반까지 이어진 사상적 흐름을 뜻하는 용어로 구분해서 사용하겠습니다.)
✔ 실용성과 보편성, 이성에 반기를 들다
근대와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자료를 읽다보니 ‘작용과 반작용’이란 단어가 떠오릅니다. 근대는 중세의 신(神) 중심의 사상에 ‘반발’합니다. 중세에는 모든 섭리가 신의 주관(主管) 아래 있었고, 신의 뜻으로 풀이될 수 있었지요. 그러나 17세기 과학혁명을 거치면서 이제 자연과 인간의 세계는 물리적이고 과학적인 원리로 설명됩니다. 근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합리적 이성이란 자연과 세계를 지배하는 하나의 설명 체계가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제 인간의 모든 신념과 가치들은 이와 같은 통합적인 체계에 뿌리를 두게 되었고 사물에 대한 이 근대적인 개념은 19세기와 20세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20세기 초에 등장한 하나의 사상적 흐름인 모더니즘은 과학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세련된 도회적 감각을 앞세운, 19세기 사실주의에 반항하는 ‘새롭고 혁신적인’ 사상이었습니다.
근대에 접어들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인간 이성의 발달은 자본주의의 발달을 촉진시켰고, 인류는 물질적 풍요로움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행복조차 물질 소유의 크고 작음으로 평가하는 대대적인 물화 과정을 겪게 되지요. 이와 함께 정부와 기업 등 모든 사회는 효율성을 앞세우게 되고 이를 위해 관료적인 시스템이 정착하기에 이릅니다. 어느덧 근대라는 도도한 흐름은 자유분방한 개성을 존중하기보다는 획일적인 평균성과 보편성을 지키려는 성향으로 귀결됩니다. 자연의 섭리조차 신의 뜻 안에서 이해했던 중세의 무지몽매함을 극복한 근대의 합리적 이성주의는 명백한 진보였습니다. 하지만 근대의 이성중심주의가 견고해지면서 비판적 회의가 고개를 들게 됩니다.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근본적 회의, 탈중심적 사고, 효율성, 기능성, 표준화에 대한 비판 등이 그것입니다.
‘포스트모던’이란 말은 1947년 아놀드 토인비가 <역사에 대한 연구>를 요약해서 출판하면서 처음 등장했지요. 물론 이는 '모던하게' 등장한 근대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세계사적으로 노출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토인비는 근대가 시작된 이후 촉발된 사회 불안, 세계 대전과 혁명, 합리주의가 붕괴되면서 등장한 무정부주의 같은 서구 문명의 특징을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말하면서 그 한계를 비판합니다. 이와 더불어 예술 분야에서는 권위적 지위를 획득한 모더니즘에 대항하는 새로운 전위적인 운동이 시작되었지요.
중세에 대한 반작용이 근대였고, 근대에 시작한 새롭고 혁신적인 사상적 흐름이 모더니즘이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대한 또 하나의 반작용으로 등장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철학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모더니즘과 구조주의의 반발 작용이었다. 구조주의에 대항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그것이 포스트구조주의로 이어지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실제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상당히 비슷한 개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일률적인 것을 거부하고 다양성을 강조하였으며 이성을 중시하며 등장한 모더니즘이 추구한 정치적 해방과 철학적 사변도 하나의 이야기(거대 서사 혹은 큰 이야기)에 지나지 않음을 강조했다._위키백과, ‘포스트모더니즘’
✔ 건축, 포스트모더니즘을 꽃피우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은 새로운 사회․경제적 질서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하나의 분수령이었지요. 인류는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세기말적인 상황에서 절망적인 세계대전을 치릅니다. 전대미문의 살육이 벌어졌고, 경제는 초토화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시대가 열리면서 움텄던 희망과 낙관이 절망과 비관으로 기울게 된 순간이지요. 자본주의가 팽창하고 물질적 풍요를 선물한 대량소비사회 안에서 반작용이 꿈틀대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보편성을 내세운 획일화된 모더니즘의 울타리에 안주할 수 없었으며, 기존 전통과 권위에 반발하는 반문화 경향이 나타 시작합니다. 특히 텔레비전과 컴퓨터의 등장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촉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정보통신의 눈부신 발전은 지식이 유통되는 방식을 현격하게 바꾸었고, 정통성, 권위 아래 숨죽여 있던 자유분방하고 다양한 사고들이 새로운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철학적인 담론에 가장 민감했던 이들은 예술가들이었습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질서와 균형과 조화를 중시하는 근대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터라 사물에 대한 근대적 개념을 넘어선 ‘포스트모던적’인 것에 동조했습니다. 1950년 무렵 문학비평에서 쓰이기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용과 미술, 연극 같은 전위적 예술분야로 확대해나갔고, 건축 분야에 이르러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근대 건축은 19세기 후반 유행하던, 부르주아의 과시욕을 드러내던 장식적인 건축의 역작용으로 합리성과 기능성을 중시합니다. 신재료 개발, 과학기술의 발전, 산업혁명을 통한 대량생산 사회가 오면서 합리성을 추구하는 근대적 시대상이 건축에 반영된 것이지요. 그 대표적인 예는, 뉴욕이나 시카고 같은 대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천루입니다. 기능에 따라 동선을 계획하고, 좁은 대지면적으로도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고층빌딩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납니다. 한편 대부분의 건축 부품들도 표준화를 거쳐 일괄적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빠르게, 기능적으로, 효율적으로 건축물들이 지어졌습니다. 당시의 대표적인 건축가 르코르뷔제는 “집은 거주를 위한 기계”라며 기능성을 강조한 유토피아를 꿈꾸기도 했지요.
하지만 점차 사람들은 이 모던한 양식의 건축에 대해 회의적이었습니다. 합리적 기능주의를 내세운 건축물은 자본주의 대량소비사회가 빗어낸 비인간화의 양상을 그대로 담고 있었고, 사람들은 이런 건물에서, 천편일률적인 데서 생활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고,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모더니즘적인 일관성과 보편성, 기능성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복잡다단한 인간의 삶, 그 복잡성을 기능과 실용성에 맞춘 단순한 형태의 건축물이 담아낼 수 없다고 비판합니다.
파리에 있는 조르주 퐁피두센터는 포스트모더니즘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1971년에서 1977년에 준공된 복합문화시설입니다. 거대한 공공정보 도서관, 국립 현대미술관과 박물관, 이밖에 영화관, 극장, 강의 홀, 서점, 레스토랑과 카페까지 갖추고 있는데요, 만일 근대적 관점을 고수한다면 이 개개의 기능들은 아마도 독립된 형태로 지어졌을 겁니다.
우선 퐁피두 센터는 건물의 뼈대인 거대한 철골이며,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수도관 등을 건물 외관 벽면에 배치했습니다. 과거에는 건물 내부와 천정에 설치돼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던 장치들을 모두 바깥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마치 짓다만 것 같은 이 건축물을 봐서는 도서관이나 미술관, 박물관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없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건축가들은 관행적인 형태의 건축물을 해체하고 파괴해 독특한 스타일을 추구하기에 이릅니다. 이는 단순히 형태의 해체만이 아닌, 근본적인 개념들도 해체하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끌었지요.
미술의 경우는 어떤가요? 마르셀 뒤샹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작품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뒤샹은 1917년 대량생산된 소변기에 ‘리처드 머트’라는 이름을 서명한 뒤 작품명을 ‘샘’(fountain)이라고 붙여 뉴욕 앙데팡당전에 출품합니다. 뒤샹은 대량생산된 상품에 서명함으로써 서명이 작품의 질보다 더 큰 의미를 갖는 사회를 조롱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서구의 미술이 추구했던 대상에 대한 고전적 재현에 반기를 든 것입니다. 미적인 것과 미적이지 않은 것 사이의 구분도, 고급한 미술과 저급한 미술의 경계도, 장르와 장르 간의 벽을 무시로 넘나들며 모순된 요소들을 혼합해버립니다. 음악에서는 ‘랩’ 같은 장르가 발생하고, 문학에서는 강박적인 리얼리즘을 멀리하는가 하면 난해한 지성주의에 반지성주의로 맞섭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낮춰 보았던 대중문화가 새롭게 부상하는 한편, 예술 분야에서 거리를 두었던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문제도 예술 안으로 끌어들여 비판적으로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 근대성에 관해 질문할 수 있게 해주는 어떤 관점
포스트모더니즘은 등장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일관성 있는 사상체계를 갖춘 것도 아니며, 용어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진 게 아니라 학자와 분야에 따라 쓰임새가 저마다 달라 일목요연하게 정의하고 설명하기는 곤란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네 가지 관점에서 논의되고 있는데, 문화‧예술의 관점이 있고, 철학 이론의 관점, 사회 이론적 관점, 자연과학적 관점이 그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티는 구분해서 사용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학을 비롯한 예술 분야에서, 포스트모더니티는 철학이나 사회 이론에서 사용하는 개념입니다.) 이 글에서는 문화, 예술에 나타난 현상을 중심으로 다뤘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도 녹록치 않아요. 특히 사회이론과 과학 분야에서 신랄하게 비판받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사회발전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과학의 엄밀성을 침해하며 무책임한 몽매주의와 무의미함만 양산한다는 비판입니다. 노옴 촘스키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실증적 지식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 무의미한 학문이라고 일갈합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 정치 이론가 슬라보예 지젝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자본화와 세계화 같은 거대담론과 엮이지 않으려고 한다며 이러한 태도는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논리’라고 공격했습니다.
한편 객관적 진실을 추구하며 자기 이론에 책임을 져야 하는 과학자들은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실재가 없으며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어떠한 유익한 점도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즉,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과학에 대해 무지할 뿐 아니라 파괴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기적 유전자》를 쓴 도킨스는 <발가벗겨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글을 <네이처>에 게재, 날카로운 독설을 날렸습니다.
하지만 어찌됐든 포스트모더니즘이 20세기 후반의 서구 사회를 지배하는 하나의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인 것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적실성에 대한 이진경의 설명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단지 모더니즘의 스타일이나 특징에 대한 비판으로 제한한다면, 그것은 문학이나 예술에 한정된 타당성을 가질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전체를 포괄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제기할 수 있는 문제의 폭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을 “다양한 형태로 구현된 근대성에 관해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해주는 어떤 관점”(칼리니스쿠,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으로 학장하여 정의할 수 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를 계속하여 사용하는 것은 나름의 새로운 적실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_이진경, 《문화정치학의 영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