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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나 Jul 05. 2016

06. 아방가르드

길들여지길 거부하지만, 길들여지고 마는

아방가르드의 가장 큰 특징은 기존 질서에 저항하며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다. 하지만 이 새로움이 영원한 새로움으로 남을 수 있을까? 아방가르드했던 피카소의 그림은 현재 어마어마한 예술적 권위를 손에 넣었다. 미술관을 거부하지만 다시 미술관에 입성하는 것, 예술이란 개념을 부정한 반(反)예술이 다시 기성 예술이 돼버리는 것. 이것이 아방가르드의 숙명이요 태생적 한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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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이나 잡지를 뒤적이다 패션쇼 기사를 볼 때 가끔  ‘저게 옷이야?’ ‘저걸 어떻게 입지?’ 하면서 들여다볼 때가 있지요. 그러다 ‘아방가르드한’ 패션이라는 평을 읽으면 고개를 끄덕입니다. 보통 ‘아방가르드’라고 하면 이처럼 아주 파격적인 패션이나 헤어스타일을 떠올리죠. 완전히 특이한, 우리들의 관념을 뒤엎는, 우리의 감성과는 동떨어진 난해한 예술, 혹은 특이한 시도를 한 예술가. 패션이든 예술이든 행위든 장르를 불문하고 아방가르드의 가장 큰 특징은, 길들여진 것을 거부하고, 나아가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을 전복(顚覆)해버립니다.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본래 척후병이란 뜻의 프랑스어인데요, 알다시피 척후병은 적과 싸울 때 본대 맨 앞에 있다가 적진 깊숙이 침투해서 적의 동태를 살피는 병사를 말합니다. 가장 위험천만한 임무를 맡는 셈이지요. 따라서 척후병은 용감해야 하고,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예민하게 파악하고 예견할 수 있는 기민한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군대 용어인 ‘아방가르드’가 다른 의미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혁명의 여파가 일 때였습니다. 프랑스 혁명기, 일군의 지식인들이 선두에서 척후병(아방가르드) 역할을 자임하며 당시의 일반적인 관념을 뒤엎는, 진보적인 견해를 주장합니다. 이후 아방가르드는 정치․사회적으로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지요. 현재의 우리들에게는 아방가르드가 예술 장르, 혹은 예술과 연관된 용어로 다가오지만, 19세기 사람들에게 아방가르드는 정치사상이나 사회사상에 나타난 급진주의로, 문학이나 예술과 관련된 개념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아방가르드는 정치 사회적 의미에서 완전히 탈피해 예술적 급진주의만을 지칭하는, 예술 분야의 중요 개념으로  정착하게 됩니다. 아방가르드에 대한 사전적 풀이는 이렇습니다. “20세기 초 유럽에서 일어난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 따위의, 기성 예술의 관념이나 형식을 부정한 혁신적인 예술운동을 통틀어 이르는 말.”

이 설명은 딱히 복잡할 것도, 어려울 것도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20세기 초의 미래파, 다다이즘, 초현실주의만을 아방가르드라고 하는 건지, 아방가르드가 어떤 예술의 장르를 말하는 건지, 기존 예술의 권위에 저항해 새로운 걸 만들어내면 다 아방가르드인 건지, 현대에는 아방가르드 예술이 없는 건지 모호합니다. 왜냐하면 현재에도 여전히 아방가르드 예술은 맹위를 떨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한편 아방가르드는 태생적인 딜레마를 안고 있습니다. 아방가르드의 가장 큰 특징은 기존 질서에 저항하며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인데, 문제는 이 새로움이 영원한 새로움으로 남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끊임없이 기성 예술의 권위에 도전하고, 도발하고, 저항해서 이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예술을 만들어내지만, 이 새로움 역시 시간이 흐르면 권위의 옷을 입고 제도권 안에 정착하게 됨으로써 또다시 ‘새로운’ 도발에 직면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습니다.    

전통 예술을 거부하고 새로운 예술을 시도한 대표적인 예술운동이라고만 알고 있었던 아방가르드. 피상적인 이해를 넘어 아방가르드의 실체에 가까이 가보기 위해서는 왜 20세기 초 예술사에 새로운 예술을 지향하는 전위부대 아방가르드가 태동하게 됐는지, 그들의 목표는 무엇이고, 어떤 문제점을 안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 새로운 예술을 지향하는 전위부대, 아방가르드가 태동하다

흔히 예술이라고 하면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예술가가 창조해낸, 아주 심미적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술이 이처럼 그럴듯한 지위를 얻게 된 것은 19세기에 와서였습니다. 그전까지 예술은 주술적인 성격이 강했고, 종교적 요구에 복무해야 했지요. 예술의 기원을 더듬다보면 알타미라 벽화나 라스코 벽화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 그려진 동물 그림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예술사가들은 변변한 무기도 없이 현실에서 맞닥뜨려야 하는 무서운 동물을 어두운 동굴에 그리는 행위가 동물을 가둬두는 주술적 효과가 있다고 믿었거나, 그 동물을 사냥할 힘을 축원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중세에 와서도 예술가 혹은 예술활동의 독자성은 존중받지 못합니다. 위대한 음악가, 화가들은 보통 귀족이나 궁중의 후원을 받으며 창작활동을 합니다. 언뜻 보면 그만큼 예술가가 대접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예술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독자성을 상실한 것의 반증이기도 하지요. 후원자의 비위를 맞추고 그들의 요구에 종속될 수밖에 구조인 겁니다. 미켈란젤로, 고야 등 위대한 화가들의 이력에 공통적으로 ‘궁정화가’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중세의 화가들은 경제적 토대가 충분치 않았고, 따라서 귀족들로부터 초상화를 비롯해 집안을 꾸밀 그림을 주문을 받아 그려주는 프리랜서 장인처럼 작업을 했습니다. 이들이 경제적 불안을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는 궁정화가가 되는 것이었지요. 궁중전속화가란 당연히 왕가에 충성을 다하며 그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그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주는 ‘직업’이었던 셈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노련한 장인과 다를 바 없다고 볼 수 있지요.  

<카를로스 4세의 가족>,  1800~1801, 캔버스에 유채, 프란시스코 고야

귀족, 왕족 중심의 중세가 무너지고 부르주아가 권력을 잡은 근대에 접어들면서 지금과 같은 예술이라는 개념이 성립하게 됩니다. 드디어 예술가들은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들의 의지로 어떤 작품을 창작할지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예술이란 천재적인 예술가가 창조해낸 독창적인 산물이라는 지위를 비로소 갖게 된 것입니다. 이제 예술품은 미적 가치를 지닌, 독창적이고 유일한 것으로, 그 작품이 어디에 놓이든, 누가 소유하고, 어떻게 유통되든 영원히 의미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지요. 

예술이 이렇게 독자적인 지위를 점하게 되자 새로운 시스템이 생겨납니다. 무엇이 예술인지를 결정하는 비평가가 출현하고, 예술품과 예술품이 아닌 것을 결정하는 시스템이 갖춰지는 한편, 미술관, 박물관 등 예술품을 전시하는 독자 공간이 생겨나게 됩니다. 

자, 여기서 잠시 한 가지만 따져봅시다. 전시를 위한 공간이 생겼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누군가가 이 공간에 작품을 걸 만큼 예술성이 있는지의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뜻이고, 따라서 ‘인정받는’예술과 ‘인정받지 못하는’ 예술이 구분되는가 하면, 전시됐다는 사실 자체가 예술가와 예술품의 품격을 결정짓는다는 걸 함축합니다. 더불어 예술의 고유성이 강조되면서 예술을 위한 예술, 예술지상주의적인 흐름을 갖게 되고 점점 예술이 실제 생활로부터 격리되는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방가르드는 19세기의 이러한 예술적 흐름에 반기를 듭니다. 예술을 규정하는 기성의 논리를 반박하고, 예술에 권위를 입히는 시스템에 반대하고, 현실과 유리된 예술을 비판하면서, 전혀 새로운 예술을 시도합니다. 즉, 아방가르드는 새로운 예술에 붙인 명칭이거나 수사가 아니고, 이러한 기존 질서에 붙박인 예술을 파괴하고 새로운 예술을 만들어내려 했던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미학적 예술운동이었던 것입니다.  


✔ 뒤샹의 <분수(Fountain)>, 기존 예술을 엿 먹이다

아방가르드라는 전위부대의 빼어난 척후병은 아방가르드 미술의 전설적인 거장 마르셀 뒤샹입니다. 그가 작품으로 출시한 <분수(Fountain)>는, 비록 전시장에 입성하지는 못했지만 어마어마한 파란을 일으킵니다. 뒤샹의 발랄한 소동을 살펴보죠.  

1917년, 뒤샹은 진보적인 색채를 지닌 그룹 ‘독립미술가협회’의 첫 전시회에 작품 하나를 출품합니다. 뉴욕의 J.L.머트의 판매장에서 구입한 남자용 소변기에 리처드 머트(R.Mutt)라는 가명으로 서명한 다음(리처드 머트는 변기를 생산한 머트사(J.L.Mott Iron Works)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작품 제목을 ‘분수’(샘이라고도 번역한다)라고 달아서 내놓았지요. 그의 작품은 당연히 거부돼 미술관에 전시되지 못합니다. 자신이 제작한 작품이 아닌, 그냥 상업용 변기에 서명 하나 달랑 써놓은 것을 대체 어떻게 예술품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뒤샹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시장에서 판매되는 기성 소변기에 서명만 해서 작품이라고 제출했던 걸까요? 그는 변기라는 본래의 실용적 기능을 없애버린 후 변기가 놓여 있는 환경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꿔버린 이 행위가 변기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했으며, 이것 또한 예술 활동이라고 보았던 겁니다. 나아가 기성 화단에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죠. ‘전시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술적이어야 할까?’ 무엇이 예술인지에 대한 파격적인 질문인 셈입니다. 

뒤샹의 <분수>는 우리 눈에 꽤 익습니다. 그럼 이 ‘변기’는 지금 어디에 전시돼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뒤샹이 최초에 출품한 이 소변기, 혹은 작품은 사라져버렸습니다. 이 작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 번도 공식적으로 기록된 적이 없습니다. 이런 작품이 있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은 그저 사진뿐이지요. 뒤샹은 미술가협회에서 작품 전시를 거부하자 당시 최고의 사진작가였던 스티글리츠에게 작품 사진을 의뢰합니다. 스티글리츠는 작품에 리처드 머트라는 서명을 보고, 뒤샹의 작품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사진을 찍습니다. 한편 이 사진을 보고 평론가 루이즈 노튼은 <분수>에서 명상하는 부처를 연상했다며 작품성을 인정했지요. 그러자 뒤샹은 ‘리처드 머트 씨 사건’이란 기사를 발표했는데, 이 기사에 자신의 작품에 대한 노튼의 에세이와 스티글리츠의 사진을 나란히 게재했습니다.  

뒤샹은 자신이 직접 작업한 창작품이 아닌 기성의 변기에 가명이지만 서명을 해 브랜드네임을 부여하고, 나아가 사진, 기사 등 창작 이외의 활동을 통해 <분수>를 현대미술의 강력한 상징으로 창작해내고야 맙니다.(이후 오리지널은 없지만 뒤샹은 <분수>의 복제품을 다양하게 만들었고, 우리가 사진으로 혹은 전시장에서 보는 것들은 원본이 아닌, 복제품이다.) 


이처럼 아방가르드는 기존의 부르주아적 예술 양식을 거부한 예술운동이었습니다. 아방가르드의 특성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한 학자인 페터 뷔르거는, 그래서 뒤샹을 아방가르드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미래파는 정치적으로도 민감했다. 미래파는 예술지상주의적 이상향을 꿈꿨던 19세기의 미학 원리를 존경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치적으로도 무장되어 있었고, 예술만의 개혁이 아니라 예술과 함께 그리고 예술을 통한 사회 변화를 지향했다. 미래파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수신자는 예술계로 국한되지 않았다. 미래파는 사회를 향해 자신들의 ‘선언’을 전하고자 했다.”_《아방가르드》, 노명우


아방가르드 예술로 분류되는 미래파에 대한 설명인데, 아방가르드의 핵심 목표가 예술과 삶의 거리를 좁히거나 없애는 데 있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 피카소도 전위예술가였다!

아방가르드는 예술사와 미학이론에서 심도 있게 논의가 이뤄지는 개념입니다. 특히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두고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모더니즘은 근대 시기에 시작돼 현대 초중반까지 이어진 사상적 흐름으로, 이전의 정신이나 유산을 계승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이를 극복하고 변혁하려는 사고를 말합니다. 문화사적으로는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에 서구 문학사에 나타난 특정한 예술운동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아방가르드를 모더니즘의 하부 개념으로 파악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뷔르거의 주장은 다릅니다. 오히려 아방가르드는 모더니즘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난 예술운동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모더니즘의 모체가 되는 유미주의는 예술의 자율성과 심미성을 강조하고, 예술이 도구적이고 실용적인 기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아방가르드는 삶과 격리된 유미주의에 대한 파격적 도발로부터 새로운 예술을 이끌어낸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급진적, 파격적 도발로 기존 체제를 흔들어 새롭게 만들어낸 예술 역시 시간이 지나면 예술의 권위에 복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술에 대해 거칠게 분류하자면, 전통적인 예술과 상업적인 예술,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모더니즘 예술이 있는데, 아방가르드는 이 모든 예술을 비판하고, 도발하지요. 그렇다면 아방가드르는 이 분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피카소의 경우를 봅시다. 1904년 파리에 정착한 피카소는 아방가르드 미술가, 작가들의 핵심인물이었습니다. 당시의 관점에서 봤을 때 분명 피카소의 그림은 ‘아방가르드’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그의 작품을 카피한 다양한 상품들이 팔리고 있을 만큼 보편성을 획득했고, 미술시장에서 어마어마한 호가에 팔리는가 하면, 매우 ‘위압적인’ 예술적 권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길들여지기를 거부하지만 대중의 호응을 받게 되면서 다시 체제 내로 진입하여 길들여지게 되는 딜레마. 뷔르거는 뒤샹 이후의 현대미술이 이런 도전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해 우려를 표합니다. 뒤샹의 서명이 담긴 단순한 사물인 변기가 미술관에 입성하고 나면, 저항의 힘을 잃고 제도권 안에 안락하게 편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제도화하는 현대미술에 대한 뷔르거의 진단과 예측은 대부분 들어맞았다. 1950년대 말부터 등장한 팝아트에서는 대중문화의 상업적 이미지들이 미술의 틀 속으로 침범하고, 60년대 미니멀리즘에 이르러 미술가의 주문에 의해 기계적으로 생산된 사물들이 미술관을 차지하게 되면서 오리지낼리티와 저자의 존재에 대한 의미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어야 했다._<기계적 복제 시대의 저자:마르셀 뒤샹의 <분수>와 복제품의 오리지낼리티>, 우정아

미술관을 거부하지만 다시 미술관에 입성하는 것, 예술이란 개념을 부정한 반(反)예술이 다시 기성 예술이 돼버리는 것. 이것이 아방가르드의 숙명이요 태생적 한계인 셈입니다.  

근대 예술사에서 척후병 노릇을 톡톡히 한 아방가르드는 상업과 예술의 경계 자체가 모호해진  현대에 오면서 정체성을 찾기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방가르드가 없어졌다거나 의미 없다고 볼 수는 없어요. 지금도 아방가르드는 아방가르드의 정신은 계승하면서, 특유의 자기 색으로 도발적인 저항을 끊임없이 표현하며 진격 중입니다. (끝)





>>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 1968)

프랑스 화가. 다다이즘의 중심적 인물. 인상주의, 포비즘, 큐비즘의 영향을 받은 뒤, 1912년에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처녀에서 신부로의 이행> <빠른 나체들에게 들러싸인 왕과 왕비> 등 기계와 육체가 결합한 듯한 작품명을 가진 작품을 그렸다. 그후 “자기 자신을 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대부분의 회화를 파기하였다. 

1915년 미국으로 건너가 주로 뉴욕에서 살았다. 변기를 작품화한 <분수>(1917)를 비롯, ‘레디 메이드(기성품)’ 오브제를 선보였다. 성을 형이상학적 기계로 표현한 대형 글라스 작품 <추종자들에 의하여 발가벗겨진 신부(新婦)>는 1915년~1923년에 제작되어 미완으로 방치되었으나 브르통을 위시한 많은 예술가가 그 수수께끼 풀기에 전념하기도 하였다. ‘예술’을 방치하고 체스에 전념하는 생활 방식도 매력있는 수수께끼였으나, 사후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기증된 <1 물의 낙하>, <2 조명용 가스>라는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작품이 1946~1966년에 비밀리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지자 뒤샹의 전설은 더욱 분분해졌다._<미술대사전(인명편)> 참조

> 박스

페터 뷔르거((Peter Burger: 1936~  )

함부르크대학교와 뮌헨대학교에서 독문학과 프랑스문학 및 철학을 수학했고, 1960∼1964년에 프랑스에서 독일어 강사로 재직했다. 1970년 에를랑겐 뉘른베르크대학교에서 교수자격을 취득한 뒤 1971년부터 1998년에 은퇴할 때까지 브레멘대학교에서 문예학 및 미학이론 전공 교수로 재직했다. 뷔르거는 은퇴한 뒤에도 연구 활동을 계속하여 최근에 사르트르에 관한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의 중심 연구 분야는 미학, 예술철학, 문예학이다. 구체적으로 아방가르드 운동 및 미적 현대, 프랑스 초현실주의, 관념론 미학 비판,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사 방법론 등 다양한 주제에 쏠려 있다. _<해외저자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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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

<카를로스 4세의 가족>,  1800~1801, 캔버스에 유채, 프란시스코 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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