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 <변신>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변신》의 첫 구절은 독자들을 기묘한 충격 속으로 몰아넣는다. 황당한 내용과 황당한 줄거리, 하지만 이야기는 철저히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토대 위에서 전개되어 간다. 비현실과 현실을 연결하는 독창적인 카프카의 언어에 이끌려 우리는 어느덧 젊은 세일즈맨 그레고르 잠자를 만나게 된다.
20세기 문학사에서 독보적이고도 도발적인 위치에 있는 카프카와 그의 대표작 《변신》.
나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또 하나의 갑충이 단단한 등껍질과 수많은 다리를 드러내며 나를 변신시킬 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한다. 왜 그레고르 잠자는 벌레가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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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네, 카프카! 하지만 그 약속은 지킬 수 없네.”
카프카는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의 모든 작품을 출판하지 말고 소각해 달라’고 유언했지만, 막스 브로트는 그의 마지막 부탁을 차마 들어줄 수 없었다. 친구의 부탁을 저버린 브로트 덕에 우리는 프란츠 카프카(1883~
1924)라는 위대한 작가를 만날 수 있었다. 카뮈와 사르트르 등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들의 눈에 띄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 카프카의 작품들은 1926년경 영국과 미국에서 읽혀오다 2차 대전 후 유럽에서 거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1950년경에야 독일에 역수입되었다.
한 젊은 세일즈맨이 갑충으로 변신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중편 《변신》(1912년)은 지금까지도 녹슬지 않은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카프카의 《변신》은 20세기 문학의 ‘신화’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과연 무엇이 현대의 독자들을 작품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것일까? 왜 여전히 우리들은 《변신》을 읽으며 경악 속에서 말을 잃고 마는가?
《변신》은 한마디로 충격적이다. 아무런 전제도 없이 시작한 주인공의 변신, 인간이 벌레로 변한, 황당하기 그지없는 줄거리이면서도 너무나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토대 위에서 전개되는 이야기,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하는 간결한 문체, 계속되는 그로테스크한 현상 속에서도 놓치지 않는 주인공들에 대한 세밀한 묘사.
《변신》의 이러한 문학적 특징들은 시대가 변모해도 새로운 시각에서 새롭게 읽힐 수 있는 힘의 원천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변신》을 읽으며 경악하고, 당혹해하다 마침내 주인공 그레고르의 불안과 하나가 돼버린다. 왜 그레고르 잠자는 ‘불안한’ 꿈을 꾸었을까? 카프카는 왜 자신의 주인공을 갑충으로 변하는 기묘한 상황에 던져놓았을까? 카프카가 그레고리 잠자를 내세워 우리에게 하려 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벌레로 변신한, 지독한 상황에 처한 그레고르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일까? 도대체 그레고르는 왜 벌레로 변신한 것일까? 스스로 원한 것일까? 아니면 어떠한 상황이 빗어낸 결과물일까?
《변신》의 녹슬지 않은 위력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그로테스크한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데 있다. 징그러운 갑충으로 변할 것만 같은 불안감이 여전히 우리를 엄습하고 있는 것이다.
평범한 출장 영업사원 그레고르 잠자. 어느 날 아침, 불안한 잠자리에서 깨어나 보니 등껍질이 딱딱한 갑충으로 변해 있다. 잠자는 부모가 진 빚을 갚기 위해 하루하루 살아가던 고달픈 출장 영업사원. 새벽 일찍 기차를 타고 떠나야 하는데 옴짝달싹 못하는 그. 이미 문밖에서는 가족들이 채근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한 시간도 안 돼 상점의 지배인이 달려와 채근한다.
벌레로 변신한 충격적인 상황에도 잠자는 자신에 대한 탄식도 없이 오로지 기차 시간만 염려한다. 채근하는 사람들을 향해 끊임없이 말을 건네지만 이미 그 소리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고, 그들과의 소통은 불가능한 상태다. 얼마 후 방문이 열리고, 가족들과 지배인은 갑충으로 변한 그레고르를 발견한다. 지배인은 혼비백산하여 집을 떠나고, 아버지는 “지팡이와 신문을 마구 흔들어 그레고르를 제 방으로 다시 몰아넣으려” 한다.
저녁 어스름에야 무거운 잠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그레고르는 여전히 자신에 대한 염려보다도 가족에 대한 염려가 앞선다. 부모님과 여동생을 좋은 집에서 안락하게 생활하도록 돌봐준 데 대한 자부심을 느끼는 한편으로 “이제 이 모든 안락과 행복과 만족이 끔찍스러운 결말을 맺게 된다면 어떡하지?” 하고 근심한다. 이런 잠자의 태도와 무관하게 가족들은 이미 그레고르의 존재를 부정한다. 하루하루 지나면서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을 잃어가는 잠자. 하지만 가족에게 보내는 잠자의 애정은 변함이 없다.
한편 가족들은 ‘벌레 인간’ 잠자에 대해 싸늘하다. 여동생 그레테는 그레고르의 모습에 기겁을 하고 물러난다. 잠자의 보호 속에 있을 때에는 무기력했던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아버지는 은행 수위로, 어머니는 바느질 일로, 여동생은 상점 판매원으로 살 길을 모색한 가족들.
어느 날 여동생 그레테는 벌레로 살아가는 그레고르의 편의를 위해 방안의 가구를 모두 치워버린다. 가구를 치우는 것이 더 편안하다고 느끼는 순간, 그레고르의 정체성은 잠시 혼란스러워진다. “텅 빈 방안에서 그는 물론 사방으로 자유롭게 기어다닐 수는 있겠지만, 그럴 경우 혹 인간으로서의 과거를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레고르는 문득 자신이 하고 싶어서 했던 유일한 일, 즉 자신이 만든 액자에 넣은 그림을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만이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것인 양 그림에 매달린다.
그런 그를 보고 기절하는 엄마, 그 때문에 주먹을 치켜들고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는 여동생, 그리고 폭탄세례를 퍼붓는 양 사과를 던지는 아버지. 곧바로 날아온 사과는 그레고르의 등에 제대로 맞추어 깊숙이 들어가 박혔고, 결국 치명적인 상처가 된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레테는 선언한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순 없어요. 저런 괴물 앞에서 오빠의 이름을 입밖에 내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오직 한 가지, 우리가 저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거예요.” 마지막까지 감동과 사랑의 마음으로 가족들을 생각하는 잠자는 자신이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을 여동생보다 더 단호하게 한다. 등에 상처는 깊어가고, 마침내 잠자는 공허하고 평화로운 생각에 빠진 채 죽는다. 잠자의 염려에도, 남은 식구들의 삶의 전망은 밝은 편이다.
그레고르 잠자는 소설 속에서 단 한 번도 인간이었던 적이 없었다. 아침에 깨어나니 벌레로 변해 있었고, 인간으로서의 모습은 회상과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다 벌레로서 최후를 맞는다. 인간이 인간이 아닌 흉측한 벌레로 변신했다는 충격적인 설정은 우리들을 그로테스크한 흥미로 이끌어 작품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더 큰 질문이 가슴에 남는다. 왜 잠자는 벌레가 되었을까? 인간이 인간으로 살 수 없는 존재론적 절박감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변신》에 대한 평론가들의 해석을 요약해보면 이렇다.
“《변신》은 현대문명이 낳은 인간성의 상실, 현대인이 느끼는 불안과 소외감, 인간의 실존을 그리고 있으며, 인간이 도구로 전락한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의 소외를 다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변신》을 이해하는 두 가지 코드가 있는데 그 하나가 바로 실존적 위기감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는 근원적 불안감과 절대적 고독.
벌레로 변한 잠자는 어느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었다. 벌레가 된 첫날, 문밖에 있는 회사 지배인과 가족들에게 열심히 말을 건네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레고르는 사람들과 단 한 마디도 소통하지 못했다. 잠자는 인간으로서의 정체성과 벌레로서의 정체성이 경계를 허물며 오가는 절대적 고독 속에 내팽개쳐진다. 그는 딱딱한 등껍질에 싸인 채 홀로 모든 상황을 살피고 분석하다 조용히 숨을 거둔다.
《변신》이 보여주는 인간 실존의 허무와 절대고독은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있다. 이 작품은 1912년에 씌어져 1915년에 출간되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인류는 대공황이라는 초유의 재앙을 맞아 생존의 절박감을 경험했다. 한 조각의 빵을 얻기 위해 인간의 본질을 저당잡혀야 했고, 대공황으로 촉발된 1차 세계대전은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즉 인간은 스스로를 규정할 수 없는 존재론적 불안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고, 절대고독 속에서 자아 정체성을 잃어버린 그레고르 잠자는 당시 인류가 놓인 실존적 위기감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변신》을 이해하는 두 번째 코드는 도구로 전락한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소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작품을 찬찬히 읽다보면, 실존적 위기감을 묘사하는 부분보다 자본주의 사회의 파편화된 인간 소외 문제를 강하게 폭로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출장 영업사원인 잠자는 지배인으로 대표되는 관리자와 사장으로부터, 즉 구조화된 사회로부터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다. 사회는 도구로 전락한 인간에게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를 저버린다. 노동을 강요하지만 노동하는 자들의 권리는 쉽게 무시된다. 그레고르 잠자는 오로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하루하루 고된 생활을 견뎌낸다.
벌레로 변신한 후의 잠자를 보라. 그는 자신이 처한 끔찍한 상황에 대해 탄식하기에 앞서 열차시간에 늦을까 봐 걱정한다. 직장에서 내쳐질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자신의 참혹한 상황에 대한 불안보다 앞선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어떤 사회적 위치에 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또한 그레고르는 자신이 하는 일로부터도 철저히 소외되어 있다. 그는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노동으로부터 어떠한 기쁨도 얻지 못했다.
한편 인간의 가치는 철저히 경제력의 유무에 따라 판단된다.
벌레로 변하기 전의 그레고리의 가장 빛나던 한때는 이렇게 묘사된다. 그레고르는 온 가족을 완전히 절망에 빠뜨린 불행에서 식구들을 구해내기 위해 “동료들보다 몇 배의 열성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여 그야말로 하룻밤 사이에 말단 직원에서 출장 영업사원으로 승진했다. 출장 영업사원은 일에 성공하기만 하면 즉시 커미션의 형태로 현금이 수중에 들어왔던 것이다. 집에 돌아와 그 돈을 식탁 위에 올려놓으면 식구들은 모두 행복해서 입이 벌어졌다. 정말 좋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절은 다시 오지 않았다.
그레고르가 생활비를 버는 동안은 그의 기능과 존재가 인정되지만 그것을 잃었을 때 그의 존재는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그저 한낱 흉측한 벌레에 불과한 것이다. 비단 이것은 그레고르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레고르가 가족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을 때에는 다른 가족들, 즉 아버지, 어머니, 누이는 한없이 무기력한 존재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레고르의 변신 후 가족들은 경제력을 획득하면서 한층 생동감 있는 존재로 거듭난다.
《변신》이 씌어진 시기는 초기 자본주의 발달로 한편에는 부가 편중됨과 동시에 수많은 노동자계급이 열악한 조건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던 때였다. 또한 19세기 말부터 불기 시작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고조되어 사상적으로는 사회주의가 대두되기 시작하였고, 카프카 역시 이러한 조류와 무관하지 않았다. 독일 상층부에 진입한 유태인이라는 신분적 제약을 가지고 있었던 카프카는 사회의 억압적 구조를 혐오하게 만들었고, 억압 없는 이상사회를 꿈꾸었던 그는 노동계급의 권익 향상을 위한 성명서를 만들고, 사회주의 서클에서 활동했던 것이다. 이러한 카프카의 사상은 인간이 벌레로 변신한다는 초현실적인 이야기 속에서도 현실의 문제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데 일조하였다.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를 연결하는 그의 언어의 독창성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초의 그레고르 잠자가 부활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소통의 부재와 소외감, 가족관계의 단절, 사회구조 속에서 개인이 겪는 정체성의 위기 등을 고스란히 겪어내며 변한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지금의 사회구조는 겉으로 보면 자본의 강압도, 사회의 압박도 표면적으로는 늦춰진 것 같다. 그야말로 표면적일 뿐이다. 우리는 더 지능적인 자본의 힘에 내몰려 있다.
우리는 잠자가 아니다. 벌레로 변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의 소통은 원할한가? 스마트폰만을 열면 세상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세상이다. 이 소통은 포만한가? 어떤 의미에서는 가상의 자아 뒤에 현실의 자아가 숨어버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이것은 하나의 소통인가, 아니면 소통 부재의 또 다른 모습에 불과한가?
그레고르 잠자는 벌레로 변해버렸다. 그를 벌레로 변신시킨 것은 현실 자체, 즉 외부적 조건인지, 아니면 도구로 전락한 현실로부터의 탈출 충동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벌레로 변하기 전의 그레고르는 이미 가족과 사회로부터 일정 부분 소외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이 그를 벌레로 만들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으니 그레고르는 인간으로 살든, 벌레로 살든 차이가 없다는 항변 같은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레고르는 벌레로 변한 뒤에야 ‘인간적’이 되었다. 벌레가 되어서야 인간적인 사유를 시작한다. 자신의 삶을 회상하기도 하고, 가족들을 지켜보기도 하고, 정체성의 혼란에 내몰리기도 한다. 액자에 넣은 그림에 대한 그의 애착은 그가 인간임을 보여주는 선명한 대목이다. 그레고리 잠자의 변신 이야기는 다시 꺼내 읽어도 늘 처음처럼 가슴을 울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