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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나 Jun 24. 2016

13. 입센의 <인형의 집>

근대 여성운동의 아이콘, 노라 

노라_과연 당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 응석을 받아 주셨어요. 하지만 우리 집은 놀이터에 지나지 않아요. 저는 친정 집에서 아버지의 인형 딸이었던 것처럼, 당신에게 시집 와서는 당신의 인형 아내였어요. 그리고 이번에는 아이들이 제 인형이 되었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제가 상대를 해서 놀아 주면 기뻐하듯이, 당신이 저와 놀아 주면 기뻐했던 거예요. 여보, 이게 우리의 결혼 생활이었던 거예요. _<인형의 집> 중에서


극이 시작되자 한 마리의 종달새처럼 노라의 밝고 쾌활한 목소리가 쟁쟁 울려 퍼지는 듯하다. 노라가 가꾸어온 가정이라는 공간은 세상의 어떤 어둠도 비껴갈 것만 같다. 남편에 대한 헌신적 사랑, 아이들의 다정한 엄마, 어려움에 처한 이웃에 대한 따뜻한 연민…. 

하지만 ‘사랑’이라는 토대 위에 세웠다고 자부한 노라와 헤르만의 결혼 관계는 예상치 못한 사건에 부닥치자 한순간에 허물어지고 만다. 그리고 노라는 아늑한 보금자리를 박차고 나와 세상 속으로 뛰어든다. 노라는 왜 가출을 감행했으며, 우리는 노라의 가출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근대극의 아버지’로 불리는 헨릭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이 전 세계에 몰고 온 반향은 실로 놀라운 것이다. 


>>>



헤르마 어때, 내 말대로지? 응, 노라?(아내의 허리에 손을 두른다.) 이 놀고 먹는 새는 돈을 무척 많이 잡아먹는단 말이야. 이런 새를 기르고 있으면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돈이 들어. 


제1막은 크리스마스 준비로 분주한 노라와 그의 남편 헤르마의 대화로 시작된다. 처음 몇 장 읽었을 뿐인데, 헤르마가 노라를 지칭하는 말들이 벌써 귀에 거슬린다. ‘언제나 낭비만 하는 새’ ‘놀고 먹는 새’ ‘귀여운 종달새’…. 노라는 마음껏 남편에게 응석을 부리며 사는 고상한 부인이며, 헤르마에게만 허용된, 그의 소중한 물건이며,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아녀자다. 자아의식, 주체적인 삶과는 동떨어진 인물이다. ‘자아’에 대한 의식으로 팽배한 현대인의 눈으로 보기에 노라는 유치한 행동을 일삼는, 미성숙한 존재다. 따라서 노라가 살았던 시대를 감안하지 않는다면, 그 시대성 속에서 ‘노라’라는 인물을 읽어내지 않는다면, <인형의 집>은 문학적 명성에 비해 쉽게 평가절하 될 수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인형의 집>은 입센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을 만큼 놀라운 반응을 일으켰다. 그는 이 작품으로 19세기 말 서구의 근대극 운동사에 선명한 기원을 이룩했던 것이다. 그가 이 작품을 통해 제시한 여성 해방의 문제는 현대에 와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빈틈없는 무대상의 기교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참신하고 사실적인 대화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널리 읽히는 걸작이 되었다. 

‘<인형의 집>은 근대 연극의 텍스트를 넘어서 근대의 교과서로 받아들여진다.’ ‘<인형의 집>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세계사적 격변을 상징하고 여성해방운동의 불꽃을 점화시킨 희곡이다.’

무엇이 <인형의 집>에 이와 같은 영광의 화환을 걸어준 것일까? 

헨릭 입센이 1878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1879년에 세상에 내놓은 <인형의 집>은 그 시대를 대변하는 아이콘 ‘노라’를 세상에 내놓았다. 자신의 삶을 찾아 아이들과 남편을 두고 집을 뛰쳐나온 주인공 ‘노라’는 작품 밖으로 걸어나와 그 시대를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고, 그 순간 노라는 노라 개인의 이름이 아닌, 수많은 ‘노라’들을 출생시킨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자아를 찾아 남편과 자식들을 버리고 가출한 노라. 그의 행위는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으며, 그의 가출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그의 행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지는 당대 지식인들에게 중요한 화두였다. <인형의 집>의 명성과 이후 전 세계적으로 수없이 양산된 수많은 ‘노라’들을 떠올리며, 입센이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드러내려고 했는지, 또한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무엇을 추구하려 한 것인지 알아보자.  


아버지의 ‘인형 딸’, 남편의 ‘인형 아내’

“…저는 친정 집에서 아버지의 인형 딸이었던 것처럼, 당신에게 시집 와서는 당신의 인형 아내였어요.…” 

마지막 제3막의 끝부분, 집을 떠나려 결심한 노라가 남편 헤르마에게 하는 이 말을 들으니, 우리 어머니 세대가 자라며 들었을 성싶은 글귀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婦人有三從之義, 無專用之道, 故未嫁從父, 旣嫁從夫, 夫死從子

<의례>에 나오는 이 글귀를 해석하면 이렇다. ‘부인에게는 세 가지 따라야 할 사람이 있으니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시집가기 전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이미 시집을 갔으면 남편을 따르고, 지아비가 죽었으면 아들을 따라야 한다.’ 

여성이 여성이기 이전에 남성과 동등한 인격을 가진 하나의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글의 서두에서 노라와 헤르마의 행동방식이 구태의연한 옛것인 양 말했지만, 사실 여성 불평등의 뿌리는 생각보다 깊고 질기다. 흔히 삼종지도(三從之道)라고 하는 이 말은 과거 옛 조선 여성들의 삶만을 제한했을까?  아니다. 여러분의 부모님 세대조차 이와 같은 사고방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지금 한국사회의 여성은 자신에게 불리한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고, 그것이 오히려 하나의 사회문제가 될 정도로 여성의 자의식은 노라의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또한 상대적으로 성차(性差)로 인한 차별도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노라가 살았던 1878년은 달랐다. 노라에게는 도덕적 의무는 존재했으되, 법적, 사회적, 경제적 권리는 없었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경제권이다. 당시 여성들에게는 사회적 삶이란 것이 아예 없었다. 여성들이 직업을 갖기 어려운 사회였고, 자기 소유로 상속받은 재산이 없는 한 가정 내에서도 경제권이 전혀 없었다. 노라의 경우를 봐도, 노라는 필요한 때마다 헤르마에게 손을 벌렸고, 헤르마는 ‘놀고 먹는 귀여운 종달새’를 키우는 일이 얼마나 돈이 많이 드는 일인지 모른다면서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돈을 준다. 

게다가 여성은 남편이나 아버지의 보증이 없으면 돈을 빌리는 일조차 불가능했다. 헤르마가 병이 들어 요양이 필요했을 때, 노라는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단독으로 돈을 빌리기 어려웠고, 결국 변호사 크로그스터에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해 돈을 빌렸다. 로라는 남편에게 알리지 않고 그 빚을 갚아나갔는데, 크로그스터는 노라가 아버지 서명을 위조해 돈을 빌린 사실을 남편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한다. 남편을 위한 일이었지만, 남편 몰래 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한 그녀의 행동은 사회적으로 용인받을 수 없는 행위였고, 남편 헤르마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었던 것이다.   

노라는, 몇천 년 동안 여성에게 짐 지워진 도덕적 명령과 의무에 따라 아이를 낳고 기르며, 육체와 영혼을 남성에게 바쳤다. 하지만 사회는 결코 여성의 헌신과 희생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헤르마는 분명하게 보여준다. 요양비를 홀로 마련하고, 그 돈을 갚고, 그 사실이 폭로될지라도 자신이 책임지려 했던 노라에 비해, 헤르마의 행동은 극히 이기적인 것이었다. 노라의 행위가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키리라 판단한 헤르마는 노라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운다. 남성의 명예를 실추시킨다는 행위는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노라의 사랑과 배려, 진심조차 별 의미가 없었다.     

잠시 후, 마음을 돌린 크로그스터가 차용증서를 보내오자 그제야 헤르마는 허겁지겁 상황을 원래의 상태로 돌아놓으려 애쓴다. 


헤르마_귀여운, 겁먹은 작은 새야. 자, 안심하고 쉬는 게 좋아. 내 커다란 날개 밑에 숨겨줄게. … 당신은 아직 사나이다운 마음이란 것을 잘 알지 못하고 있어. 아내의 과실을 용서했다, 마음속으로부터 깨끗이 용서해 주었다는 마음만큼 남자에게 있어 기분 좋은 것은 없단 말야.… 이것으로 아내는 남편의 아내인 것과 동시에, 어린애이기도 한 것이 되지. 이제부터의 당신은 내게 그런 의미가 되는 거야. 세상을 모르는 의지할 데 없는 아기, 이제는 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모든 것을 내게 털어놓고 말해요. 그러면 내가 당신의 의지도 되고 양심도 되어줄 테니까. 


헤르마에게 자기반성은 없다.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위선적인지조차 깨달을 수 없는 사람이다. 헤르마의 달콤한 회유가 노라의 귀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노라는 이 일을 겪으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분명히 깨달았다. 더 이상 헤르마의 ‘인형’일 수 없었다. 노라는 가방 쥔 손을 풀지 않고, 집을 나선다.  


노라의 각성과 자기 혁명

노라가 가꿔온 가정은 밝고, 유쾌하며, 안락했다. 노라는 시종일관 노래하듯 말한다. “아아, 기뻐요.” “네 고마워요.” 한 옥타브쯤 높은 음색으로 말하는 노라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1막에서는 남편도 모르게 그의 병을 요양시켜준 데 대한 노라의 자긍심이 언뜻 보인다. 노라는 그렇게 가정의 위기를 자신의 힘으로 넘겼기에 이제 은행장이 되어 더욱 풍요로워질 미래에 대한 행복한 단꿈에 젖어 있다. 남편을 잃고 세상 속에서 자신의 삶을 이어온 린네 부인의 어두운 삶과 대비된다. 하지만 1막의 끝자락에서 관객, 혹은 독자는 슬쩍 노라의 삶이 어쩌면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받는다. 

1막의 무대는 아늑하고 고상하고 안온했던 방이었는데, 2막에 들어서자 노라는 그 방에서 홀로 초조하게 왔다갔다하며 어쩔 줄 모른다. 1막의 암시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꾸려온 행복을 지키려는 노라의 노력이 안타깝게 그려진다. 독자(혹은 관객)은, 맑은 하늘에 갑자기 몰려온 먹구름을 보듯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노라의 행복이 지켜지길 고대한다. 하지만 노라의 파멸을 막을 길은 쉽사리 보이지 않는다. 마침내 노라의 염려는 현실이 되어 상황은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린데 부인의 활약으로 절망적인 파국은 면할 듯 보였지만(채무자 크로그스터가 차용증서를 돌려준다), 노라의 가출을 막지는 못한다. 행복의 단꿈을 지키려 했던 노라의 염원이 강렬한 만큼, 갑작스런 노라의 가출 선언은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헤르마의 용서도 구했고, 모든 상황은 일단락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노라는 하나의 깨달음에 도달한 것이다. 

가정도, 남편도, 아이들까지 뿌리치고 가는 것은 신성한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라고 헤르마가 말하자 노라는 단호하게 말한다.


노라_헤르마, 제게는 그 외에도 마찬가지로 신성한 의무가 있어요.

헤르마_그런 게 있을 턱이 있나. 대체 어떤 의무야?

노라_저 자신에 대한 의무예요.

헤르마_당신은 우선 첫째로 아내이기도 하고, 또 아이들의 어머니란 말이야.

노라_그런 것은 이제 믿지 않아요. 무엇보다도 첫째로 저는 하나의 인간이에요. 당신과 마찬가지로…. 적어도 인간이기를 바란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세상의 어떤 의무와 역할이 그 본연의 존재를 앞선다면 어떤 기분일까. 아이들의 어머니이며, 남편의 아내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재하고 싶다는 노라의 이 선언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었는데도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여성의 독립선언이었던 것이다. 자신 안에 숨죽여 있던 자아가 각성되는 순간, 종교와 도덕, 법률로도 자아를 찾아 나서는 노라의 길을 막을 수 없다. 노라는 비로소 자신으로 돌아가 참다운 인간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그래야 허울 좋은, 위장된, 위선적인 사랑이 아닌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실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집을 나선 노라의 첫걸음은 여성해방의 물꼬를 텄고, 노라는 근대 여성운동의 ‘아이콘’이 되었던 것이다. 


노라의 가출을 어떻게 볼 것인가

헤르마 (문 앞의 의자에 쓰러지듯이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노라, 노라! (주위를 둘러보고 일어선다.) 없어. 가 버렸어. (한 가닥 희망이 떠오른다.) 그렇다, 기적 중의 기적이!

헤르마의 마지막 대사다. 헤르마는 노라의 각성을 과연 깨달았는가? 

분명 노라의 가출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갑작스러운 것이며, 납득하기 어려운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노라는 그녀를 동등한 자격을 가진 인간이 아닌, 그저 귀여운 인형으로밖에 보지 않는 헤르마와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한 일임을 이미 깨달았다. 그리고 이런 자신의 깨달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은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린데 부인과 행복한 삶을 시작하기로 한 크로그스터가 사실을 은폐하여 노라의 행복을 지켜주려 하자, 린데 부인은 말한다. 


린데 부인_ 네, 처음에는 너무 놀라는 바람에 그랬죠. 그러나 그때부터 벌써 꼬박 하루가 지났잖아요. 그 동안에 저는 이 집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발견했어요. 헤르마 씨는 이 모든 것을 아시는 게 좋아요. 이 불행한 비밀을 세상 밖으로 드러내놓고 두 사람이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 돼요. 언제까지나 거짓말이나 잔재주를 부릴 수는 없으니까요. 


사실 서로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지 않은 사랑이 어떻게 진정한 사랑일 수 있겠는가. 

노라의 가출은 결국 당대 사회에 큰 파문을 던진다. 당시의 결혼생활이 어떤 모순을 안고 있는지, 그리고 그 모순을 극복하고 보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후대 사람들은 노라의 의문에 이렇게 답한다. 진실한 결혼생활을 위해서는 양성평등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양성평등’은 당시의 노라에게는 생경한 개념의 말이었겠지만, 노라의 가출로부터 제기된 이 개념은 현재의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화두다. 

노라는 헤르마의 만류를 뿌리치고, 결국 집을 떠났다. 책을 덮고 나니, 긴 여운이 남는다. 노라는 꼭 그렇게 가출해야만 했을까? 집을 떠난 노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노라 이후의 수많은 ‘노라’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는 21세기 ‘노라’를 양산하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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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노라, 나혜석

<인형의 집>이 한국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20년대였다.(1921년 <매일신보>에 ‘인형의 가(家)’란 제목으로 번역 연재되었고, 제일 마지막회에 나혜석이 지은 노래가사 ‘인형의 가’가 김영환이 작곡한 악보와 함께 실렸다.) 

당시의 한국 사회에서도 바람직한 남녀 관계 그리고 가정에 대한 논의의 지평이 열리기 시작했지만, 여성의 존재는 노라가 집을 나갈 당시의 상황에 머물러 있는 형편이었다. 새로운 자각을 얻었으되 현실적인 힘(경제력)을 얻지는 못했으며, 자유 연애의 실천은 흔히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함정이 되곤 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많은 여성들은 노라를 동경하며 가출을 꿈꾸었고, 실제로 그들 실행하는 여성들도 드물지 않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나혜석이었다.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기뻐하듯/아버지의 딸인 人形으로/남편의 아내 人形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慰安物되도다./노라를 노아라/最後로 순순하게/嚴密히 막아논/

障壁에서/堅固히 닫혔던/門을 열고/노라를 놓아주게

-1921년 4월 <매일신보>에 발표된 나혜석의 <인형의 가>

1896년 태어나 1949년 행려병자로 사망한 화가 나혜석의 삶은 20세기 초 여성해방운동의 기폭제가 된 노라의 그것과 거의 동일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적극적이며 실천적인 것이었다. 나혜석은 동경 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한 재원이었고, 새로운 신사조와 신문물을 흡수한 신여성이었다. 나혜석은 당연히 결혼의 속박을 타파하고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꿈꾸었으며, 근대적 여성의 사고를 존중할 뿐더러 나혜석을 열렬하게 사랑한 김우영은 그의 꿈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인물로 보였다. 김우영은 임신한 나혜석이 동경에서 그림공부를 하고 오겠다고 청했을 대 선뜻 응락한 적극적인 후원자이기도 했다. 

나혜석은 김우영과의 결혼으로 사회적, 경제적 안정과 더불어 세계 일주 여행 등  화가로서 빛나는 명성을 누렸지만, 파리 체류 시절 최린과의 연애 사건으로 이혼에 이르게 된다. 조선 최고의 여류명사가 되기에 충분한 재능을 가진 나혜석이었지만, 이혼과 원인모를 화재로 그림을 잃고, 이후 수전증에 시달려 화가로서 치명타를 입고, 몰각의 길을 걷는다. 

1934년 삼천리에 발표한 <이혼고백서>에서, 나혜석은 결혼과 관련하여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제도와 인습을 서슴없이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글들은 나혜석이 전 조선의 남성들과 구습에 젖어 있는 조선 사회에 던진 대결의 도전장이었으며, 나혜석이 동경 유학시절부터 가졌던 여성해방의 구체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잇다.  

도덕이나 법률을 부정하고 여성해방을 선언한 노라의 발언은 바로 나혜석이 구습에 얽매인 조선사회에 대해 던지고 싶은 발언이었다. 그런 점에서 나혜석은 한국의 노라이면서, 어쩌면 그보다 더 대담한 페미니즘적 결단을 선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헨릭 입센(Henrik Ibsen 1828~1906)

노르웨이의 극작가. 열다섯 살 무렵부터 운문극과 서정시를 쓰기 시작해 스물네 살 되던 해인 1851년에는 신설한 노르웨이 극장의 작가 겸 무대 감독이 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대표작 <페르 퀸트><황제와 갈릴리 인><인형의 집><유렵><민중의 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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