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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나 Oct 07. 2016

경쾌한, 소통

키스 해링의 그래피티 아트

밝고 선명한 색채, 단순하고 역동적인 선…. 쉽고 친숙한, 꼭 어린애 장난 같은 그림이 생활 속으로 스며든다. 자전거에도, 유니클로 티셔츠에도, 아이폰 케이스에도. 심지어 딸아이가 편의점에서 사들고 온 비닐 우산에도. 

누구보다 소통의 예술을 바랐던 키스 해링, 묵직한 사회적 메시지를 경쾌하게 그려낸 그의 마법 같은 능력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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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낙서처럼 휘갈겨놓은, 또 스프레이 페인트로 분방하게 그려진 그림과 문자들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즉흥적이고, 충동적이고, 장난스러워 보이는 이 그림들은 보수적인 시선으로는 불안정하고 위험해 보이겠지만, 대단히 젊고 자유롭게 느껴진다. 갑갑한 틀을 확 벗어던진 날것 같은 상상력도. 이것이 바로 그래피티 아트다. 

반항적인 청소년들, 흑인, 마이너한 소수인종들이 거리의 벽이나, 경기장, 지하철 전동차 등에 닥치는 대로 그렸던 이 그림들은 한때 도시의 골칫거리였다. 이 골칫거리 낙서를 공히 그래피티 아트로 자리잡게 한 데에는 장 미셸 바스키아와 키스 해링의 공이 컸다.  

키스 해링은 미국이 대격변기를 겪던 60, 70년대 사춘기를 보냈다. 눈부시게 발전하는 테크놀로지, 젊은이들의 반전운동, 보수적인 성문화의 와해…. 해링은 이 변화를 그대로 흡수했고, 미국사회가 안고 있는 불안정한 고민들을 놓치지 않았다. 


80년 겨울, 거리로 뛰쳐나오다

타고난 재능으로 예술가의 길을 걷던 키스 해링이 80년 겨울, 문득 뉴욕의 지하철 벽의 빈 광고판을 보고 분필을 사와 그림을 그리면서 거리로 뛰쳐나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그는 사람들이 이해 못하는 작품을 그리고 싶지 않았다. 또 예술이 뭐고, 자신의 예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고민했다. 다운타운의 낡은 거리와 지하철 벽, 이스트 빌리지의 나이트 클럽에 그림을 그리면서, 키스 해링은 스스로 답을 찾아냈다. 그림 작업을 하는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들과의 소통. 그가 찾은 답은 소통이었다. 그의 작업은 가난하고 배고픈 반항심에 낙서하듯 휘갈긴 것이 아니었고, 미술관이라는 딱딱하고 차가운 제도 자체에 등을 돌린 것이다. 사람들 속에서,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이러한 소통이야말로 그가 작업을 하는 이유였고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해링의 작업은 다른 그래피티 아트 작가들과 조금 달랐다. 가벼워 보이는 그래피티 아트에 무거운 사회적 메시지를 주제를 절묘하게 담아낸 것이다. 인종차별 반대, 반핵 운동, 동성애자 인권운동, 에이즈 교육 등등. 오노 요코는 그런 키스 해링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앤디 워홀은 가벼운 주제를 무겁고 심각하게 표현한 반면, 키스 해링은 정반대로 무거운 주제를 가볍고 밝게 그려낸다”고.

1989, Retrospect

강렬한 원색의 배경 위로 아이콘 같은 인물이 뛰고, 뒹굴고, 재주도 넘는다. 어깨도 곁고 사랑도 나누고 춤도 춘다. 이 역동적이며 단순하고 경쾌한 작품들은 보는 이들을 밝게 만든다. ‘해링의 세계화’. 키스 해링의 작품은 거리와 지하철을 벗어나 티셔츠로 배지로, 벽화로, 공익광고와 포스터 등으로 제작돼 전세계적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그림이 사람과 세상을 하나로 묶어준다는 그의 소신이 낳은 놀라운 결과다.


“나는 예술가로 태어났고, 따라서 예술가답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그 책임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무척 애를 썼다. … 나는 가능한한 많은 사람을 위해 그림을 그릴 생각이다. 그림은 사람과 세상을 하나로 묶어준다. 그림은 마법처럼 존재한다.”(키스 해링)




>>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  

미국의 그래피티 아티스트. 뉴욕 거리의 벽면과 지하철 플랫폼에 그려져 있는 낙서 스타일의 그림을 보고 깊은 영감을 얻은 그는 길거리, 지하철, 클럽 등지의 벽을 캔버스로 삼았다. 빈번히 공공기물 훼손혐의로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해링의 독특한 이미지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딜러 토니 샤프라치가 그의 개인전을 기획, 스타 작가로 부상,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게 되었다. 만 서른한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에이즈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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