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두 개의 마음

사는 데 필요한 마음 하나, 영혼의 마음 하나

by 김지나

“할머니는 사람들은 누구나 두 개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하셨다.

하나의 마음은 몸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꾸려가는 마음이다. 몸을 위해서 잠자리나 먹을 것 따위를 마련할 때는 이 마음을 써야 한다. (…)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것들과 전혀 관계없는 또 다른 마음이 있다.

할머니는 이 마음을 영혼의 마음이라고 부르셨다.”

-포리스트 카터, <내 영혼이 따뜻한 날들>




4월의 어떤 일요일, 저녁이 밤으로 막 옮겨 가려던 순간. 만만한 가루비(가루처럼 포슬포슬 내리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주말 내내 웅크리고 있었더니 몸이 찌뿌둥해서 막 산책을 나서려던 참이었는데…. 잠깐 망설이다 비의 기세가 우악스럽지 않아 우산을 챙겨들고 나섰다. 만만하던 빗줄기는 금세 드세졌지만 걸음을 돌리지는 않았다.

도시의 비는 유혹적인 색감을 선물한다. 가로등, 네온사인, 빨갛고 노란 신호등이 뿜어내는 색색의 빛을 선명하게 반사해놓는 빗물. 그 풍성한 색감에 조금 들뜬 마음으로 걸음을 옮긴다.

실내의 화초는 해를 향해 늘 기운다. 내 발걸음은 어릴 때 살던 동네로 기운다. 지금 사는 곳에서 내가 나고 자란 곳이 지척이다. 걸어서 이십여 분이면 닿는다. 고향인 셈인데, 이런 서글픈 고향이 어디 있으랴. 함께 자란 형제자매도 뿔뿔이 흩어져 살고, 집터는 흔적 찾기도 어려워 지번을 봐도 가늠이 안 되고, 함께 뛰놀던 동무는 누구 하나 연이 닿지 않으니, 헛헛한 걸음이다.

그래도 홀로 가물거리는 추억을 곱씹으면, 어릴 때 동무에게 얻어 씹던 달고 알싸한 칡뿌리 맛이 난다. 바람은 불고, 바람에 섞여 비 냄새는 전해오고, 익숙한 노래는 가만히 귀에 감긴다. 학교로, 성당으로, 친구들과 몰려다니던 골목길을 더듬다가 ‘이제야 외로움을 친구 삼을 만하게 되었구나’ 하는 묘한 충만함을 느낀다.

무심히 골목길을 돌다 우람한 나무 한 그루를 만났다. 세찬 빗줄기가 잔가지를 뒤흔드는 걸 잠시 바라본다. 세상에나, 세월이 이렇게나 흘러버리다니. 문득 그동안 나를 스쳐간 수많은 친구들, 사람들이 떠올랐다. 어느 구비에선가 만나서 한 시절을 보내다가 이별도 의식하지 못한 채 떠나오고, 떠나간 사람들이. 그들도 나처럼 어딘가에서 이렇게 저렇게 살아가고 있겠지 하는 생각이 비처럼 내 가슴에 쏟아져 들어왔다.



사는 일은 사람을 겪는 일인데


과거의 한때 중에는 아직까지도 부끄러운 기억이 꽤 있다. 이런 기억들은 대개 사람들과의 관계와 연관돼 있다. 나는, 나의 국민학교 시절이 제일 처음 부끄럽다. 꽤 영리한 편이었고, 눈치도 발달해서 어른스럽다는 평을 들었는데, 돌이켜보면 참 영악한 아이였다. 순진하고 순둥하던 친구, 얌전하고 말이 없던 친구들을 제멋대로 쥐락펴락했던 것도 같고, 교묘하게 나를 위하는 방향으로 분위기를 이끌었던 것도 같다. 그때를 떠올리면 그냥 이렇게 위무한다. ‘눈치가 빨라 현실은 잘 보이는데 인격은 그보다 덜 자라서 그런 거였어….’나는 영리한 아이가 아닌, 영악한 아이였던 것 같고, 그게 아주 오랫동안 부끄러웠다.

그후 다들 그렇듯 오랫동안 사람을 겪으며 살아왔다. 사는 게 본래 사람을 겪는 일일테지. 사람 사이가 엇나가면서 벌어지는 상처는 늘 지독히 쓰렸고, 도무지 어떻게 풀어야 할지 쉽게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학창시절에 만난 선후배, 친구는 그래도 상대적으로 수월한 관계다. 아무 이해관계도 없었고, 그래도 순진한 나이에 쌓은 친분이라 그럴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이십대 초반이면 학교를 떠나 사회라는 야생의 공간에서 살게 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과 민감한 이익을 다투며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생존이라는 과제는 또 얼마나 어마무시하던가. 내 앞가림하기에도 바빠 헉헉대며 지내느라 다른 사람에게 마음의 자리를 내주는 게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지나쳐왔다. 그러면서 미숙하고 서투른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기도 하며 세월을 보냈다.

인격이 덜 갖춰져 영악하게 군 게 국민학교 때의 일만은 아니었다!


네가 내준 마음 자리 덕에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어리석음을 확연히 드러내 보여주는 거울 같다.

나는, 내 외로움에 짓눌려 준비도 안 된 사람에게 허겁지겁 위안을 받으려 허둥대다 제맘대로 실망했고, 상대의 마음과 말을 들으려 하기보다 내 허기진 마음을 벗고자 상대를 쉽게 소비하곤 했다. 그저 취향이 다를 뿐인 걸 가지고 호불호를 가르려 했는가 하면 작고 좁은 나의 렌즈로 상대를 재단했으며, 믿을 수 없는 선입견으로 쉽게 상대를 간파하려고도 했다.

그러는 동안 수많은 일들이 지나갔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내 옆에 건재해 있고 누군가는 쉽게 잊혀졌으며, 누군가와는 아쉬운 이별을 해야 했다.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촌스러워서 좋아하지는 않지만 부정하기가 어려웠다. 사람도 시간처럼 속절없이 왔다가 속절없이 흘러가더라. 시절따라 인연을 맺었다가 어느 순간 가뭇없이 사라졌다가 갑자기 다시 앞에 나타나기도 하는 일이더라.

눈 감고 떠보니 어느덧 나는 어른의 시간에 들어서 있다. 나는 이제야 겨우 사람을 만날 때 예전보다는 더 마음의 자리를 넓게 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에게 더 정성스럽게 공을 들이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이렇게 저렇게 헤쳐나와 보니 이놈의 세상,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어찌나 버겁던지. 나를 스쳐가는 그 사람들이 모두 이생에서 저생으로 한 세상 함께 넘어가는 동료 같은 애틋함이 커져 갔다. 그러자 사람 사이의 작은 차이 같은 게 눈에 덜 들어오고 덜 거슬리게 됐다.

포리스트 카터는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게는 두 개의 마음이 있다고. 밥 먹고 사는 일에 쓰는 마음 하나와, 이런 일과 무관한 일에 쓰이는 또 하나의 마음, 영혼의 마음이 있다고. 두 개의 마음 중에서 몸을 꾸려가는 마음만 자꾸 쓰면 영혼의 마음이 작아져 사라져 버리는데, 이 영혼의 마음은 근육과 같아서 자꾸 쓰면 더 커진다고 했다.

영혼의 마음이란 게 뭘까? 나는 연대감 같은 걸로 읽혔다. 함께 살아가는 서로에 대한 공감과 동감과 이해와 연민 같은. 영혼의 마음을 가꾸는 비결은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마음을 쓰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금의 나는 나 아닌 이들이 내게 내준 마음의 자리 덕에 무탈하게 여기까지 온 것이리라. 그러니 나도 그대들에게 더 너른 마음의 자리를 내주어 빚을 갚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4월 비오는 그 봄밤에, 친구들이 모두 떠난 아무도 없는 빈 골목에 서 있는, 쉰 살이 넘은 나는 아마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와 한 시절을 공유했던 수많은 당신들에게, 고맙다고, 부족해서 미안했다고, 지금 만나면 더 잘해주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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