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설핏, 대충 보며 얼버무리기
*깨단하다_오랫동안 생각해내지 못하던 일을 어떤 실마리로 말미암아 깨닫다.
새벽 산책을 시작한 지 한달 남짓 지났다. 폭우만 아니면 우산을 들고라도 나서는 걸 보니 제법 습관으로 굳어질 모양이다. 산책이라고 해봤자 고작 40여분에서 한 시간 남짓 동네 한 바퀴 도는 일. 이 일을 벌인 건 체력이 달려 빌빌대며 살기 지쳐서다. 50년 넘게 몸이라는 기계를 쓰면서 기름칠도, 정비도 제대로 안했더니 여기저기 고장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배터리다. 문득 아이폰 배터리 생각이 난다. 아이폰 연식이 3년이 다 돼 가는 데 배터리가 말썽이어서 오늘내일 교체하려고 벼루는 중이다. 스마트폰 배터리야 통째로 갈아치우면 되지만, 사람 몸은 어디 한 곳 골라서 교체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니….
체력을 키워야 하고 그러려면 뭔가를 꾸준히 해야 하며 더 미뤘다간 큰일 나지 싶었다. 뭘 해야 할지 한참 고민하다가 당장 새벽에 일찍 일어나 걷기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요가니 국선도니 안 해본 건 아닌데 습관을 붙이려니 고려할 게 많았다. 무엇보다 시간을 빼는 게 어려웠다. 출퇴근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다 저녁 약속도 만만치 않아 느긋하게 운동할 짬을 내기 쉽지 않았다.
새벽 산책이 한 달이 돼 간다. 산책의 이점은 애초 생각한 것 이상이다. 걷는 동안 곰상곰상 찾아오는 이런저런 생각들, 하늘과 구름, 나무와 바람과 태양, 공기의 밀도에 집중하게 되는 순간의 작은 경외감…. 실제적인 이점도 많았다. 잠도 훨씬 수월하게 들고, 묵직하던 허리통증도 덜한 것 같고, 만성 피로감 같은 무거움도 나아졌다. 더구나 새벽 산책은 번거롭고 부담스러운 게 하나도 없었다. 그저 미련처럼 남은 잠을 툭 털고 나서면 되니.
처음에는 매일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곳을 다니면 지루해질까 봐 걱정이었다. 그러나 기우였다. 같은 길, 같은 공간인데도 매번 달랐다. 빛의 차이, 바람의 방향, 구름의 모양, 여명의 농도에 따라 다른 느낌이었다. 뿐만 아니라 매일 새로운 주인공이 등장했다. 어느 날은 유난스레 모여 앉은 까치가, 다른 날은 돌 틈의 작은 채송화가, 가지런한 텃밭이, 아침이 온 줄 모르는 가로등이 내 눈에 들어왔다. 비 오는 어느 새벽에는 진한 보라색 우비를 입은, 한 손에 우산을 받쳐들고 투박한 자전거로 달리는, 중년 사내의 모습이 각인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저 멀리 떠오르는 태양을 보았다. 일출은 늘 그 기상이 늠름하여 멋진 장관을 본 적도 여러 번이다. 그런데 그날은 희안하게 맑고 열정적인, 붉은 기운으로 솟구쳐 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기세등등하게 솟구쳐 오르는, 눈부시게 찬란한 태양의 뜨거운 열기가, 그 열정이 내 가슴에 똑같이 차올랐다.
나는 가만히 작은 산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후 작은 산모퉁이를 돌아나오니 어느새 태양은 온순해져 있었다. 뜨겁게 솟구치던 그 열렬한 기상이 잔잔한 아침 햇살로 번져 있는 것을 보면서 작은 감동이 일었다. ‘태양이 모두의 가슴에 하루를 살아갈 연료를 고루 심어놓았구나, 모두의 가슴속에 불씨를 지펴두고 햇살이 되어 우리를 감싸고 있구나.’
우리 모두가 어떤 새벽, 어떤 아침을, 어떤 모습으로 맞이하고 있든, 그렇게 태양은 듬직하게 우리를 지키고 있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해가 바뀌면 사람들은 바다에서 막 태어난 태양을 맞으러 부지런을 떤다. 정동진으로 향하는 길은 해마다 인파로 가득하다. 하지만 나는 새해의 주인공처럼 우람한 태양보다, 이렇게 시나브로, 매일, 내게 오는 태양을 자주 만나는 게 너무나 좋아졌다. 비로소 처음으로 태양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날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책을 뒤졌다. 이 구절을 꼭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_박제가의 ‘위인부령화’
무엇을 본다는 것, 발견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숙고하게 됐다.
우리는 새로움을 갈구한다. 새로움이 주는 신선함이 일상의 윤활유라고 믿는다. 그래서 여기저기 소문난 곳을 찾아다닌다. 그런데 새벽 산책을 다니면서 익숙한 것에서 새로운 것을 찾는 재미를 알게 됐다. 같은 장소, 같은 사물인데도 새로워 보이고 달라보였고, 그게 참 신기했다.
작은 산언덕을 내려오면 사거리다. 산등성이 위에서 본 낡은 연립과 비오는 날 신호등을 기다리며 마주 본 낡은 연립은, 같은 연립인데 같지 않다. 집 앞 골목길에서 만나게 되는 사물들도 가끔 내게 말을 건넨다. 대문 앞 깨진 화분 위에 수북하게 피어 있는 과꽃은 마당에서 고무줄 놀이하던 어린 나를 떠올리게 한다. 나는 이제 나를 둘러싼 것들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이 하늘과 태양, 나무와 구름, 골목 안의 집들과 가게들은 늘 곁에 있었는데, 나는 그것들을 알지 못했다.
우리는 수많은 사물, 수많은 사람, 수많은 일들을 만나며 살아간다. 우리는 꼭 자동인형처럼 관성에 따라 무자각적으로 일상을 영위한다. 늘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같은 곳에 가서 일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내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보는지, 누구를 만나서 무엇을 하는지 크게 자각하지 않는다. 언뜻 보고, 설핏 스치고, 대충 얼버무리며 살아간다. 그래서 그날이 그날 같이 단조롭고 지루해 종종 공허한 기분에 사로잡히고는 한다.
요즘 잠자리 옆 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두툼한 책은 잠 안 오는 밤에 읽으려고 중고서점에서 사온 <셜록 홈즈 추리소설집>이다. 며칠 전 책을 읽다가 이 대목을 만났다.
왓슨이 마치 우리의 맘을 대변하듯 셜록에게 말한다.
“자네의 설명을 들을 때면 추리란 게 터무니없이 간단하게 여겨져서 나도 쉽게 추리할 수 있을 것만 같네. 물론 여태까지의 일들을 보면, 추리 과정에 대한 자네의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뭐가 뭔지 모르긴 하지. 그러나 내 눈도 자네 눈 못지 않게 좋다고 보네.”
셜록이 왓슨에게 아래층 홀에서 지금 둘이 있는 방까지 올라오는 계단을 얼마나 자주 봤냐고 묻는다. 왓슨은 아마 몇백 번은 봤을 거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셜록이 계단이 몇 개냐고 묻는다. 물론 왓슨은 모른다. 그러자 셜록이 말한다.
“거보세! 자넨 관찰하지 않았어. 다만 보기만 했지. 이게 내가 말하려는 핵심이네. 보게. 계단은 열일곱 개 있네. 내가 그걸 아는 건 보기도 하고 관찰도 하기 때문일세.”
책을 읽다 이 부분에 ‘보기와 관찰하기’라고 적어뒀다. 물론 그렇다고 매일 출근하는 전철역 계단이 몇 개인지 셀 생각은 없다. 탐정이 되고 싶은 건 아니니까.
하지만 새벽 산책을 하면서 관찰의 이점 두 가지는 말할 수 있게 됐다. 첫째, 관찰은 돋보기와 같다. 평범하고 작은 것을 관찰이라는 돋보기로 확대해 볼 줄 알게 되면, 그것이 온전히 내 것이 되는, 신선한 느낌을 갖게 된다. 무언가 풍성하고 풍요로워진 기분도 든다.
둘째, 언뜻 지나치지 말고 잠시 멈춰 서서 살펴보면 그 대상이 더 좋아진다. 매일매일 떠오르는 태양이 요즘 새삼 좋아진 것처럼 말이다.
떠오르는 해를 지고 돌아오는 길에 소박한 것, 작은 것, 평범한 것일망정 그것들을 눈여겨보면 귀하게, 소중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깨단했다.*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