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작은교양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나 Apr 21. 2016

01. 통섭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소통?

인문과 과학의 괴리는 뿌리깊다. 인문학자는 초보적인 과학적 지식을 외면하고, 과학자는 대중적인 문학조차 읽으려 하지 않는다. 인문적 성찰 없는 과학기술은 맹목이요, 과학기술적 합리성 없는 인문학은 공허한 것이다. 현재 인류가 겪는 숱한 난제들은 과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두 학문의 통섭은 4차혁명 시대를 살아갈 우리의 절박한 요구다.


태생적으로 문과 취향인 사람들에게 과학 분야는 그야말로 ‘넘사벽’일 뿐더러 별 관심도 없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이들도 과학 분야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기 어려워졌지요. IT 기술혁명이 사회 전반에 본질적이고도 전방위적인 변화를 몰고 온 까닭에 과학적 담론을 무시하다간 밥그릇 보존도 힘든 상황이 왔으니까요. 인문학적 담론만으로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설명하는 게 불가능해졌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지식계는 커다란 화두를 안게 되었지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 혹은 소통을 어떻게 이뤄낼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동안 인류의 학문적 발전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학문간 구분이 없다가 점차 세분화되었고, 그 결과 더 깊이 있고 전문적인 연구를 이끌어내 혁혁한 성과를 거둬들입니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을 눈앞에 둔 지금에 와서는, 어떤 의미에서 학문간의 경계가 느슨해지고 있습니다. 크게 봤을 때 자연과학적인 지식, 혹은 인문학적인 지식만으로는 가치를 창출해내기도 어렵고, 인류가 당면한 과제들을 해결하는 데도 역부족이라고 판단하게 된 것이지요. 다시 말해 과학과 인문학의 소통에 대한 필요성이 커진 것입니다.   

‘과학과 인문학의 소통’에 대한 문제의식을 집약한 말이 ‘통섭’(統攝, Consilience)입니다. ‘통섭’이란 말이 등장했을 때 참 낯설었던 기억입니다. 통섭에 관해 처음으로 학문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에드워드 윌슨인데, 그이  ‘컨실리언스(Consilience)’는 20세기 말까지 세간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요.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윌슨의 제자인 최재천 교수가 그의 책 《컨실리언스(Consilience)》를, 《통섭, 지식의 대통합》이라고 번역, 소개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통섭이라는 말은 성리학과 불교에서 사용하던 용어로  ‘큰 줄기를 잡다’는 뜻의 단어인데, 물론 일반 사람들에겐 생소한 말이었지요. 

그러나 통섭이라는 말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통합’이라고도 하고,  ‘융합’이라고도 해서 뭐가 뭔지 헛갈리기도 하지요. 통섭이라는 개념을 찬찬이 들여다보면 이 용어가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높은 담을 허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통섭이라는 말은 개념 정리도 분명하지 않은 채 다의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여러 논쟁점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요. 자연과학의 우위에서 인문 사회과학을 흡수하려고 한다거나, 자연과학에서 비롯된 개념을 인문 사회과학이 개념적 근거도 불분명한 채 사용한다는 등이 그것입니다. 이 때문에 한편에서는 ‘통섭’은 일종의 지적 사기요, 과학과 인문학을 배신하고 있다고 비판의 칼을 들이대는 것이지요.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인류의 지적 흐름을 보면 고대, 중세까지 학문은 미분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지식이 축적해가면서 분화의 과정을 거치는데, 크게 보면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 두 갈래로 가지를 뻗습니다. 특히 16세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그의 우주론을 부활시키고 다듬어낸 케플러를 비롯한 일련의 과학자들이 일으킨 과학기술 혁명은 세상의 모든 이치를 수학적, 과학적으로 규명해낼 수 있다는 과학적 사고를 확산시키는 한편, 근대 자본주의를 촉발하는 팡파르였습니다. 이후 과학기술은 나날이 발전을 거듭해 인류의 문명을 일으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고, 인문학은 또 그 나름대로 더 정밀하게 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두 학문 간의 거리는 더 멀어지고 심지어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하지요.  

이 갈등의 뿌리는 제법 깊고, 이를 캐는 일은 전문적이고 이론적인 영역이라 여기서는 대체적인 흐름만 살펴보겠습니다. 이와 더불어 통섭의 대표주자인 윌슨의 ‘통섭’이 무엇이고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도 훑어볼 생각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소통이 절실한 이유가 무엇인지, 과연 두 분야의 소통이 가능한지도 고민해보고, 만일 가능하다면 우리 지식사회가 어떻게 움직여가야 할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스노의 ‘두 문화’, 과학자와 문학가 사이의 소통 부재를 드러내다

오래전의 지식계를 떠올리면 불가사의하다 싶습니다. 기원전 6세기의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주장한 철학자인데, 역사, 정치, 철학뿐 아니라 천문학적 지식도 높아 일식(日蝕)을 예언하는가 하면 수학에서는 ‘2등변삼각형의 두 밑각의 크기는 같다’, ‘두 직선이 교차할 때 맞꼭지각의 크기는 같다’는 ‘탈레스의 정리’를 발견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모든 학문과 지식의 시조로 꼽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떻고요? 《시학》은 문학비평의 효시였고, 논리학과 삼단논법을 창시했으며, 윤리학의 기초를 닦았고, 생물학․화학․기상학․동물학․식물학 같은 자연과학 분야에서도 학문의 조상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그 많은 분야의 연구를 할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물론 이는 축적된 지식의 양과 관련이 있습니다. 자연과 세계, 인간과 사회에 대한 원리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고 이론 정립도 체계적이지 않았으며 그만큼 지식의 양이 크지 않았기에 가능했을 일입니다. 이처럼 하나의 몸통에 속해 있던 인류의 지식은 지식의 양이 축적되면서 자연스레 분화하게 됩니다. 학자들 또한 전문 직업인이 되면서 개별 학문 간의 경계가 분명해지고요. 신의 영역에서 모호하게 논의되던 과학은 16~17세기에 오면서 자연현상을 규명해내고 기술 혁명을 선도하였고, 인류는 이에 힘입어 자본주의의 서막을 열어갑니다.  

이제 개별 학문들 사이의 경계는 엄격해져 넘나들기 어렵게 됐고,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 사이는 점점 벌어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20세기 중반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새로운 문제들이 드러나면서 과학의 본질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한편, 그동안 소원해왔던 인문학 분야와 자연과학 분야의 갈등과 반목이 격화됩니다. 이런 현상을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 사람이 찰스 퍼시 스노(Charles Percy Snow, 1905~1980)입니다. 스노는 1959년 케임브리지대에서  ‘두 문화와 과학혁명’이라는 제목으로 대중강연을 했는데, 여기서 그는 과학문화와 인문문화, 즉 두  문화 사이의 괴리현상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특히 스노는 문학가와 과학자 사이의 문화적 단절을 문제 삼았는데, 이렇게 예를 들었습니다. 

아이들의 동화로도 읽힐 만큼(<크리스마스 캐롤>) 천부적인 이야기꾼인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작품을 두고, 과학자들은 “글쎄요, 디킨스를 좀 읽어보려고 했습니다만”이라고 하면서 마치 그의 작품이 난해한 문학인 양 취급한다는 것이지요. 반면에 문학가들에게 “열역학 제2법칙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하고 질문을 던지면 싸늘한 반응을 보이며 아주 기초적인 과학지식에도 냉담하다는 지적입니다. 

스노의 이 대중강연 내용을 토대로 한 책이 《두 문화》로, 이후 ‘두 문화’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갈등과 반목을 지적한 개념어로 자리잡게 됩니다. 


스노가 말한 두 문화란 문학적 지식인들과 자연과학자들의 문화인데, 스노는 이들 사이에는 몰이해와 적의와 혐오로 틈이 크게 갈라지고 있으며, 그 결과 세계적인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과학기술을 적용할 수 있는 희망에 장애가 된다고 주장했다. 스노는 비과학자들은 과학자가 인간의 조건을 알지  못하며, 천박한 낙천주의자라는 뿌리 깊은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과학자들은 문학적 지식인은 전적으로 선견지명이 결여되어 있으며, 자기네 동포에게 무관심하고, 깊은 의미에서는 반지성적이라고 믿고 있다._이영희, <두 문화, 사회생물학, 그리고 통섭>, 《통섭과 지적 사기》


그러나  스노의 ‘두 문화’는 과학문화의 우월성에 기반해 있는데다, 인문학이 과거 회귀적이라는 비판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공평하고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스노가 두 문화의 단절현상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지만, 그가 보다 비판적으로 바라본 것은 문학가 문화의 과학 경시 풍조다. 스노는 서구 지식인이 산업혁명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산업혁명을 원하지도 않았으며, 또 산업혁명을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 점에서 지식인, 특히 문학적 지식인은 ‘타고난 러다이트’(luddite)라고 부른다. 러다이트란 19세기 산업혁명 당시 기계가 실업의 원인이라고 오해해서 기계를 파괴한 공장 노동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_정재영, <두 문화-과학혁명/스노우> 


스노의 《두 문화》는 대중적 담론에 지대한 영향을 준 책이라는 평가도 받았고, 학계에서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만, 어찌됐든 스노의 문제제기는 갈등과 반목으로 장벽을 높이 세운 두 학문 진영 사이의 통합을 바라는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 것임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 윌슨의 컨실리언스(Consilience), 최재천의 ‘통섭’

21세기에 접어든 인류는 가공할 기술혁명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NBIS(나노기술, 생명공학, 정보통신기술, 인지신경 과학), 인공지능 등으로 대표되는 최첨단 과학기술은 발전 속도도 빠른 데다 가공할 위력을 앞세워 인간과 사회, 세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고 있지요. 특히 산업적으로는 융합과 통합을 통해 ‘완벽하게 새로운 상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확실하고 검증되지 않은 기술 확산이 인류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는 터라 불안정한 위험성도 증폭되고 있고요. 또한 인문영역, 자연과학 영역 모두 개별학문의 탐구가 진전된 상태라 둘 사이의 경계를 넘나듦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인문학적인 성찰이 없는 과학기술은 사회 혼란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고, 과학적 담론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인문학은 빈 껍데기에 불과하게 된 것이지요. 가상현실이나 생명공학의 발달, 인공지능에 힘입은 로봇의 출현이 인간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등에 관한 철학적 난제들은 기술에 대한 이해 없이는 합리적인 해결방법을 도출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미국의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두 학문 간의 괴리에서 비롯된 실제적이고 다양한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식의 통섭(Consilience)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스노가 말한 두 학문 사이의 문화전쟁을 끝내고, 새롭게 인류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려면 과학과 인문학, 문학 간의 경계를 국경으로 보지 말고 협동작업을 기다리는 미개척지로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컨실리언스(Consilience)는 ‘(추론의 결과 등의) 부합, 일치’를 뜻하는 보통명사로, 윌슨은 《컨실리언스》에서 모든 학문의 경계를 허물고 모든 학문을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는 지식의 대통합을 주장합니다. 

2000년대 초반 윌슨의 《컨실리언스>를 최재천 교수가 《통섭》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판하면서 ‘통섭’은 우리 지식계의 진지한 화두가 되었지요. 통섭을 주제로 심포지엄이 열렸고, 대학과 기업에 ‘융합’ 혹은 ‘통합’의 바람이 거세게 일었습니다. 사회생물학뿐 아니라 진화경제학, 행동경제학 등의 학문이 생겨났고, 융합학과를 개설하는 등 새로운 시도들이 등장합니다.  


사회학과 기타의 사회과학들은 여러 가지 인문과학들과 마찬가지로 머지않아 현대적 종합에 포함됨으로써 생물학에서 파생되는 분과들 중 마지막 분과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회생물학이 할 일 가운데 하나는 사회과학들의 기초를 다시 체계화하여 이들의 주제를 현대적 종합에 끌어들이는 것이 될 것이다. _윌슨, 《컨실리언스》


그러나 인용 글에서도 드러나듯 윌슨의 컨실리언스는 생물학을 중심으로 모든 학문을 통합하려는 시도였고, 당연히 자연과학 중심의 혹은 자연과학을 우위에 두고 인문․사회학을 하나의 분파로 보려 함으로써 인문학계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습니다. (윌슨이 주장하는 지식 대통합의 문제점을 파헤치는 이론적 분석을 위해서는 사회생물학과 물리적 환원주의 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또한 윌슨식 지식 대통합을 뜻하는 고유명사인 ‘통섭’을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융합을 의미하는 보통명사로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그리고 통섭이라는 미명 아래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 자연과학의 개념을 도입하면서 최소한의 개념적 근거나 경험적 근거를 밝히지 않는 것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소칼의 유쾌한 속임수**, 스노의 두 문화, 윌슨의 ‘컨실리언스’, 과학의 진보가 누적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의 변환을 통해 혁명적으로 성취한 것이라는 토머스 쿤의 지적 등, 과학기술과 인문․사회과학 진영의 논쟁은 뜨겁습니다. 이 논쟁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보면서 느낀 점은 하나입니다. 인문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사이에 봉합선 없이 ‘통섭’하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윌슨의 관점이 자연과학 우위라는 비판,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소통은 불가능하다는 관점, 고도로 진화한 현대 학문의 전문성 등을 감안하면 통섭이 어쩌면 지적 사기요, 과학과 인문학을 배신한 것이라 비판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통섭의 논의가 확장되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인문학적 성찰 없는 과학기술은 맹목이요, 과학기술적 합리성 없는 인문사회는 공허한 것이고, 현대의 숱한 난제들은 과학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학의 힘뿐 아니라 인문 과학적 통찰이 절실히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통섭에 대해 우리 학계에서 더욱 풍부하게 논의되길 기원합니다.



>>>>>

4차 산업혁명

1차(증기기관), 2차(대량생산), 3차(컴퓨터와 IT)에 이은 4차 산업혁명은 로봇,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등을 통한 기술융합을 말한다. 1차 산업혁명이 기계화 과정에서 물과 증기의 힘을 사용했다면, 2차 산업혁명은 전기 에너지를 이용해 대량생산 체제를 만들어 냈다. 뒤이은 3차 산업혁명에선 전기기술과 정보기술을 이용해 자동화된 생산체계를 만들어냈다. 4차 산업혁명은 아직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고 있지만 제품, 설비, 인간이 연결되는 사물인터넷 혁명이 핵심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인공지능, 3D프린팅, 자동차의 자율 주행기능, IoT, 바이오 테크놀로지 등이 4차 혁명으로 태어나게 될 주요 기술의 예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고 일하고 있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기술 혁명의 직전에 와 있다. 이 변화의 규모와 범위, 복잡성 등은 이전에 인류가 경험했던 것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클라우스 슈밥 세계경제포럼 회장이 ‘제4차 산업혁명’을 얘기하면서 한 말이다. 2016 다보스포럼은 올해 중요 논의 과제로 4차 산업혁명을 꺼내들었다. 


소칼의 유쾌한 속임수

 정기 간행물 <소셜 텍스트>는 1996년 봄/여름호에 뉴욕대학 물리학 교수인 앨런 소칼의 논문 <경계 넘기: 양자 중력의 변형해석학을 위하여>를 게시했다. 소칼은 이 논문은 아무렇게나 늘어놓은 말로, 의도적인 장난이라는 게 분명해서 물리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정도라도 금세 알아차릴 만한 것이었다고 했다. 그가 이런 엉터리 논문을 게재한 것은 “만약 어떤 논문이 (a) 겉이 그럴싸해 보이고 (b) 편집자의 이념적 편견에 동조하는 내용일 경우 문화연구의 주도적인 간행물이 헛소리로 꾸며낸 논문을 게재할 것인지 여부를 알기 위해서 벌인 장난이었다.”고 했다. 

소칼은, 미국 학계의 인문학 영역에서 지적 엄격성에 대한 기준이 쇠퇴한 현상에 당혹감을 느껴, 이에 대해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밝혔다. 즉 인문학자들이 하찮은 지식을 과시하기 위해 의미도 모르는 과학개념을 멋대로 남용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모호한 주장을 펼쳐 학문을 우롱하는 사기극을 벌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소칼의 장난은, 우리가 강하게 믿고 있는 사실들에 대해 얼마나 자발적으로 속기 쉬운지를 보여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