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1> 첫단추를 잘못 끼웠다 #일제식민지과거사청산
한 장의 사진을 본다.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 청사 앞 광장에서 미군들이 일장기를 끌어내리고 성조기를 게양하는 모습. 두 가지 의문이 고개를 든다. 8월 15일에 해방을 맞이했는데, 그 지긋지긋한 일본의 국기를 당장 내릴 수 없었던 이유가 뭘까? 두 번째 의문, 왜 태극기가 아니고 성조기였을까?
이 물음에 대한 역사적인 대답은 이 옹색한 지면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 조선은 조선의 힘으로 일제를 몰아내지 못했다. 해방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고 이 땅의 주인이 되지 못하란 법은 없다. 해방 후의 정치적 혼란과 무질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나라를 새롭게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북쪽 지역에 당도한 소련군과 남쪽 지역에 밀려들어온 미군을 고마운 해방군이라며 반기고 환영했다. 그러나 민족의 지도자들은 알고 있었다. 함석헌은 해방이 ‘도적같이’ 찾아왔다고 말했고, 중국에 있던 김구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라고 했다. 당시의 국제관계를 고려할 때 조국의 앞날이 순탄치 않음을 직시한 탓이다.
조선총독부 성조기 게양은 하나의 상징이요 명백한 선언으로 읽힌다.
우선 미국은해방 이전부터 임시정부를 비롯한 조선의 자치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해방은 되었지만 한반도는 주권정부가 부재한 상황이 됐고, 이 상황에서 미군정은 ‘사실상의 정부’를 자임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은 평화롭게 한반도를 점령하였고, 결코 조선에 해방국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다.
1945년 8월과 9월, 이 땅에는 ‘해방’의 기쁨과 ‘38선 분할과 미군과 소련의 점령’이라는 비극이 함께 찾아왔다. 분단은 미국과 소련 냉전체제가 만들어낸 국제 정치의 산물이어서 독립운동이나 해방 후의 국내 정치가 끼어들 빈틈조차 없었다. 해방정국이라고 말하는 1945년부터 1948년 사이에 벌어진 한국 현대사의 수많은 사건들은 이후의 정부의 성격을 규정하고 한국전쟁으로까지 이어졌으며, 결국에는 분단이라는 비극에 이르게 한,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결정짓는 분수령이었다.
**조선총독부
일본 제국이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일부터 1945년 9월 2일까지 한반도 통치를 위해 운영하던
직속기관. 조선총독부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공식적으로 패전한 이후에도 한반도 지역을 계속 통치하다가1945년 9월 3일부로 38도선 이남 지역을 미군정에게 인계하며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