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조약:
미국, 일본을 파트너로 삼다

한국과 일본<2> 첫단추를 잘못끼웠다 #식민지과거사청산

by 김지나


1951년 9월 8일, 태평양전쟁의 전후 처리를 위해 승전국 연합국과 패전국 일본이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마주앉아 평화조약을 맺었다. 미국과 영국이 주도한 이 조약에서는 일본의 영토, 군사력 범위, 일본이 침략한 나라에 대한 배상 등을 다뤘다. 본래 회의 초청장은 55개국에 발송했는데 인도와 버마, 유고슬라비아가 조약

내용에 불만을 품고 불참, 52개국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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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가 짚어야 할 지점은, 피해당사자인 한국은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은 일본과 전쟁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연합국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속내는 따로 있었다. 나중에 미국과 일본이 한국을 조인국에서 배제한다는 내용의 비밀 각서를 미리 체결했다는 사실이 공개됐다. 일본은 한국이 조인국이 되면 재일 조선인과 한국인들이 연합국 시민들과 동등하게 재산과 보상금 권리를 주장할 것이므로 어떻게 해서든 혼란을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전후처리의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없었던 한국은 일본에 강력하게 배상을 요구할 기회를 상실하고 만다. 한국 내 친일파들이 식민지였던 조선은 패전국의 식민지였으므로 배상을 요구할 도리가 없었다는 논리를 펼치는 데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하지만 이는 핑계에 불과하다. 다른 나라가 자국에 저지른 잘못에 대해 사죄를 받고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정부라면 당연히 했어야 할 일이다. 조약 비준을 국회에서 부결시켰거나, 배상청구권을 포기하지 않았던 미얀마, 인도네시아, 필리핀, 남베트남은 정식으로 배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미국의 입장은 뭐였을까? 2차 대전 후 세계질서는 냉전시대를 맞는다. 미국을 필두로 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진영이 말 그대로 냉전冷戰을 벌였다. 미국은 소련을 필두로 한 사회주의 세력에 대항할 대소 반공체제를 구축해야 했고, 일본을 파트너로 삼았다. 따라서 전쟁에 대한 책임,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 등을 일본에 추궁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미국 주도의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그 신호탄이었다. 한일 관계의 대립과 갈등은 근본적으로 일본의 책임이지만, 미국 주도의 ‘세계전략이라는 장기판에 놓인 말’이었던 이유로, 또 한일 양국의 민주주의 성숙이 부족했던 이유로, 지금껏 한일 관계의 매듭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냉전시대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 1991년까지 미국과 소련 연방을 비롯한 양측 동맹국 사이에서 갈등, 긴장, 경쟁 상태가 이어진 대립 시기. 미국과 소련 간의 전후 긴장 상태를 뜻하는 말로 주로 쓰인다. ‘냉전’이라는 표현은 버나드 바루크가 1947년 트루먼 독트린에 관한 논쟁 중 써서 유명해졌다. 무기를 들고 싸운다는 의미의 전쟁인 열전熱戰과 달리 직접적인 충돌은 없다. 그러나 두 세력은 군사 동맹, 핵무기, 군비 경쟁, 첩보전, 대리전, 우주 경쟁 같은 기술 개발 경쟁의 양상을 보이며 서로 대립했다. 1990년 냉전체제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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