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3> 첫단추를 잘못 끼웠다 #일제식민지과거사청선
정부를 수립한 한국은 일본과 국교를 수립하기 위해 1951년 회담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순탄치가 않았다. 상식적인 관점에서 보면, 일본은 과거 35년여의 식민 지배 동안 한반도에서 저지른,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한 만행을 사과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일본의 입장은 처음에도, 지금까지도 완강하다.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는 1910년 한일병합조약에 의한 합법적인 행위이며, 따라서 배상의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일본이 식민 지배와 전쟁에 대해 일관되게 책임을 회피하는 이유는 배상 등 경제적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1951년 시작한 회담은 13년 8개월을 끌다가 1965년에야 정식으로 마무리됐다. 협상 기간이 길었던 데는 일본의 노림수가 있었다. 일본은 법률주의와 증거 논쟁을 내세우며 시간을 끌었고, 이렇게 함으로써 교섭력을 높였으며, 배상 시기를 1960년대 일본의 경제 성장기까지 늦춤으로써 재정 부담도 줄일 수 있었다. 한일협정은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기본조약’ 외에 청구권협정 등 네 개의 부속 협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1965년 두 나라의 국교 정상화를 위한 회담을 한일조약이라고도 하고 한일협정이라고도 부른다.
1964년 협정 타결 일년 전, 한일회담 반대 시위6.3항쟁가 크게 일어났다. 사죄와 보상 없이 일본과 수교하는 것은 굴욕적인 일이며, 국민적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정부가 회담을 성사시켜서는 안된다는 여론이었다. 한일회담 반대 투쟁이 거세지자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시위 금지와 진압, 언론검열, 대학휴교 등을 단행했으며, 주동자 검거에 돌입했다. 한편 지리멸렬하던 대일 협상은 미국의 주도에 따라 속도를 냈다.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자 미국으로서는 동아시아 냉전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한일회담을 빨리 마무리 지어야 했다. 미국은 직간접적으로 한국과 일본 양쪽에 협정을 채근했다. 실제로 한일 양국 관계자의 교섭을 통해서가 아니라 워싱턴의 미국 정부를 통해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한일조약은 한일관계를 규정하는 기본 틀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역사인식, 피해자 보상, 독도 영유권 등 첨예한 문제에 대해 양국의 편의적 해석 여지를 남겨 ‘과거사’가 지금까지 현재진행형으로 남게 한 결함을 안은 채, 타결되고 말았다.
******미국은 한일협상의 선의의 중재자가 아니다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한 해외수집자료 가운데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의 문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했다. 관련 문서들은 1965년 한일협정을 전후하여 전개된 한·미·일 3국 간의 비밀협상 과정과 불법 정치자금 수수, 독도문제 등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중략)
미국은 극동 전략상, 그리고 원조 부담을 줄이기 위해 노골적인 외교 간섭을 서슴지 않았다. 미국은 한국에 배상의 의미가 있는 청구권을 강조하지 말고 총액도 축소할 것을 강요했다. 구체적 액수를 조정하고 한일 양국에 협상 문안까지 제시했던 미국은 선의의 중재자라기보다는 고압적 지배자였다. 《군함도》 445~4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