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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나 Oct 02. 2019

03 경희궁,
98채의 전각이 사라지고 달랑 3채만

#경희궁 #돈의문박물관마을 #경교장

현재는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인 숭정전까지 달랑 세 채 남아서 궁궐의 자취를 애써 지키고는 있지만, 본래 경희궁은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3대 궁으로 꼽힐 만큼 큰 궁궐이었다. 아흔여덟 채나 있던. 
서글프게 궁터를 지키고 있는 홍화문의 원래 위치를 알면 서궐이었던 경희궁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덕수궁 근처 구세군회관 자리다! 
어떻게 이렇게 싹쓸이하듯 궁궐이 사라질 수 있었을까? 



나는 매일 ‘경희궁의아침’으로 출근한다. 버스를 타고 경복궁 역에서 내려 새문안로를 걸으면 가로수가 반겨 맞아준다. 오피스텔 건물들이 하늘을 향해 곧게곧게 뻗어 있다. 그 건물들 몇몇의 이름이 ‘경희궁의아침’이다. 

어느 날 문득 궁금했다. ‘근데 경희궁이 어디 있지?’ 일상적으로 친숙한 이름으로 자리잡았는데 정작 경희궁이 어딨는지도 모르겠고, 가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와, 참 신기한 일일세…. 몇 번 검색을 해보니 또 다른 궁금증이 생긴다. ‘어, 거기 가봤는데. 근데 궁은 없었는데….’

사무실에서 걸으면 십여분 남짓이니 내 눈으로 확인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근처 삼성병원 안에 ‘경교장’이 있다는 말도 들은 터라 겸사겸사 둘러보기로 했다.      



서울역사박물관문인석이 소환한 어린시절


서울역사박물관 인근은 무진장 지나다녔지만 들어가본 적은 없다. 본래 그런 법이다. 제주에 산다고 다 정방폭포를 가보는 건 아니다. 혜화 근처에 살아도 연극 한 편 안 볼 수 있고, 수원에 살아도 수원화성을 안 가본 사람이 많다. 둘러 보리라 마음 먹고 앞마당에 들어서니 모두 색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눈여겨보다, 라는 뜻이 이런 거겠지. 

서울역사박물관 앞마당의 문인석.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의 묘소에서 옮겨온 것으로.  문인석은 묘소를 수호하는 석물이다. 

첫 눈길은 문인석에 꽂혔다. 9월의 맑은 오후 햇살이 비껴드는 곳에 두 기의 문인석이 서 있었다. 나는 속으로, ‘아 비석이다’라고 외쳤다. 어린 시절 맨날 뒷산인 ‘비석산’에서 놀았다. 그 산에는 문인석이 지키는 묘지가 군데군데 있었다. 명문가의 묘지였던 모양이다. 나와 친구들은 그 문인석에 낑낑대며 올라가거나 아니면 그곳에 기대 술래잡기를 하며 놀았다. 문인석이란 말을 몰랐으니, 그것들이 모두 비석이라고 생각했다. 까마득하게 크고 우람해 보이던 것들이 이렇게 아담하다니. 어른이 되면서 종종 느끼곤 하는 격세지감! 

박물관 문을 밀고 들어갔다. ‘북촌 열한집의 오래된 기억’이라는 기획전시가 열리고 있다(박물관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다음 기획 전시는 ‘겸재가 그린 창의문’). 전시장을 둘러볼까 하는 생각이 스쳐가기도 전에 저절로 발길이 뒷마당을 향한다. 저토록 푸르른 정원이 넓게 펼쳐져 있을 줄이야. 햇살이 거드니 초록 잔디가 싱그럽다. 커피 한 잔을 사들고 뒤뜰로 나가보았다. 

고려시대의 석상이 서 있다. 맥락이 없군, 하며 두리번거리는데 돌무더기 둥근 터에 산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든다. 가까이 가서 보니, 경희궁에서 사용했던 우물이라는 설명이 있다. 경희궁 창건 당시(광해군 때인 1617년에 짓기 시작했다) 만든 것으로 추정된단다. 발굴 석재를 활용해서 복원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니까 500여년 전에는 사람들이 이곳에 물동이를 이고 와서 물을 길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이 경희궁 터란 얘기겠다.   

경희궁에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터가 서울역사박물관 뒷마당에 있다. 그러니까 이곳은 전각들이 있던 자리였다.


   

경희궁아흔여덟 채의 전각은 사라지고 달랑 세 채만 


서울역사박물관 뒤뜰은 고즈넉하다. 길이 이어져 예전 서울고등학교가 있던 곳으로 걸으니, 경희궁이 등장한다. 이곳에 있던 서울고가 1980년 자리를 옮기고 80년대 중반 무렵 복원작업을 시작해 2002년 지금의 모습으로 일반인에게 선을 보였다니 그곳에 간 적은 있지만, 본 적이 없는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됐다. 현재는 정전인 숭정전이 남아 있어 궁궐의 자취를 애써 지키고는 있지만, 내 눈엔 조금 큰 사찰 정도의 규모로 보였다. 정문 흥화문까지 포함해서 달랑 세 채가 남아 있는데, 본래 경희궁은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3대 궁으로 꼽힐 만큼 큰 궁궐이었다. 아흔여덟 채나 있던. 

서글프게 궁터를 지키고 있는 홍화문의 원래 위치를 알면 서궐이었던 경희궁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덕수궁 근처 구세군회관 자리다! 

어떻게 이렇게 싹쓸이하듯 궁궐이 사라질 수 있었을까? 안내된 브로셔에 보면 “일제강점기에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건물 대부분이 헐렸고, 면적도 절반 정도로 줄어들어 궁궐의 모습과 위상을 잃었다”고 돼 있지만 그 이전 흥선대원군 시절, 경복궁 중건에 자재가 필요해서 경희궁 전각의 대부분이 헐렸다는 얘기도 있다. 무조건 일제 탓하기는 어려운데, 왜 이 부분의 얘기를 감췄는지 의아하다. 사실 여부도 모르겠고. 

서궐도 경희궁. 1번은 지금 구세군회관이 있는 정물 홍화문 자리. 12번은 현재 남아 있는 정전. 경희궁이 얼마나 넓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경희궁을 둘러보고 나자 자꾸 역사박물관 뒤뜰의 우물터가 애잔하게 마음에 남는다. 

1980년 서울고등학교가 이전하면서 경희궁지 복원 계획이 나왔고, 85년에 발굴 조사를 시작하면서 경희궁 전각 복원 사업도 시작했다. 이번에야 알게 됐지만 경희궁 복원 사업은 지금도 계속 논의 중이다. 최종 목표가 경희궁의 전체 복원이라는데. 2035년 전체 복원이 쉬워보이지는 않는다. 돈의문 복원 문제도 까다롭고, 무엇보다 이미 경희궁 터에 수많은 공공기관과 민간 건물이 우후죽순 들어서 있는 상황이다. 

갈 길이 까마득하다. 발굴과 복원을 위해 확보해야 할 경희궁 터에 복원 사업과 무관하게 큰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서울시교육청, 기상청,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립미술관 등의 공공기관과 성곡미술관, 일조각출판사, 내수동교회, 구세군회관 등의 민간 건물이 들어서 있는 상황. 자료를 찾아 읽으며 아이러니하게 느꼈던 것은, 복원 사업을 하는 동안 마치 선점하듯 건물들이 들어섰다는 점이다. 1997년 신축된 서울역사박물관도 그중 하나다. 해방 이후, 경희궁 유적의 훼손과 파괴는 멈추지 않았으며, 복원의 걸림돌이 될 건물들의 신축도 막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의 복원 계획 안에는 이들 공공기관의 이전도 들어 있다.

성곡미술관 앞 일조각출판사 건물 1층에 자주 가는 카페가 있다. 커피 맛이 좋기로 유명한데 그곳 화장실 앞 지하에는 유물 유적이 발굴돼 있고 그 위를 유리로 덮었다. 난데없는 유적지가 왜 여기 있지, 했는데 경희궁 터였던 것이다! 

성곡미술관 앞 일조각 건물 1층 화장실. 이 건물에 있는 커피스트에서 종종 비엔나커피를 마신다. 


서울역사박물관 뒤뜰의 우물, 일조각출판사 지하의 유적들. 이렇게 저렇게 버려지고 파괴된 채 500년 조선의 역사들이 함부로 방치돼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맥락없이 점점이 있다고 생각한 유적들은 사실 맥락 있게 그곳에 있었던 거다. 경희궁이 사라진 것을 그저 일제만 탓할 일이 아니구나 싶어서 쓰고 맛없는 커피를 들이마신 기분이었다.      



레트로의 진수은근 즐거운 돈의문박물관마을


말없이 서 있는 회한의 홍화문으로 나오자마자 오른쪽 골목길로 꺾어 들었다. 기대감 없이. 언뜻 골목길 정취를 보니 레트로풍이다. 너무 대세이고 유행이라 덜 매력적이라는 삐딱한 생각을 가진 채. 

산보 여행의 최고 강점은 기대가 크지 않아 오히려 작은 것에도 크게 충족한다는 점이다. 옛날 이발소로 꾸며놓은 곳에 들어가 어린 시절 봤던 고데기도 구경하고, 사진관에도 가봤다. 실제로 옛날 사진처럼 찍어서 현상해주는 데 값은 5000원. 상주한 사진사가 막 한 팀을 촬영 중이다. 재미있다. 70년대 8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어른 세대에겐 ‘추억 돋게’ 하는 장소다. 


몇 보 걸으니 오락실과 만화가게가 나온다. 1층 오락실에 들어갔는데, 아마 이곳이 가장 인기가 많은 것 같다. 팩맨, 테트리스, 슈퍼마리오 등의 오락기가 준비돼 있다. 동전이 없어도 누구나 그냥 자리에 앉아서 플레이하면 된다. 팩맨도 해보고 테트리스도 해보는데, 몇십 년 만에 오락실 손맛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아까부터 부모님 한 분이, 제발 이제 좀 가자고 성화다. 사무실에서 일하다 심심하면 산책 와서 테트리스 실력을 예전 수준으로 끌어올려봐? 하는 생각이 스친다. 추억의 교실도 들어가봤다. 연상되는 모든 것들이 있다. 엄마와 딸로 보이는 한 팀이 세일러복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다. 옷도 빌려준단다. 

옛날 집 부엌과 안방과 자녀방도 만들어져 있었다. 노란색 비닐장판이 안방에 깔려 있다. 서로 방 훔치기 싫다고 언니랑 싸우며 닦던, 그 장판이다. 문을 여닫을 수 있는 텔레비전도 있고 요강도 있고 재봉틀도 있다. 내 어린시절의 안방 모습과 판박이로 닮았다. 

구경하는 내내, 걷는 내내, 웃고 있는 나를 느낀다. 슬며시 짓는 이 웃음은 행복하던 유년의 기억이 소환된 탓일 것이다. 잊고 지냈던 까마득한 개인들의 역사가 한꺼번에 떠오른 것이다. 

조그만 극장도 있다. 우리의 설까치와 엄지가 나오는 만화영화 <공포의 외인구단>을 상영중이었는데 기가 막히게 재밌다. 그 말투, 표정, 하는 짓들이 지금의 눈으로 보니 유치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고 같잖기도 하고. 슬그머니 웃던 미소가 더 커졌다. 물론 영화도 공짜다. 은근 놀거리와 볼거리가 많은데 사람도 많지 않아서 아이들과, 아니다, 오히려 친구들과 놀러와볼 만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의문박물관마을’은 생각했던 것보다 넓다. 빌딩 숲 사이에 이런 공간이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꽤 괜찮은데 사람이 안 다니는 게 좀 아깝기도 하고. 돌아와서 자료들을 찾아보니 이유가 있었다. 

이 마을은 돈의문 1구역 도시정비 사업 때, 지금의 ‘경희궁자이’(신축 아파트단지)를 짓게 아파트 조합측에 허가해준 대가로 이 부지를 기부받았다. 서울시와 종로구는 이곳에 있던 집들을 그대로 살려 박물관마을로 재탄생시켰다. 1920년대에 지어진 한옥들도 남아 있어서 서울의 정취를 살리기 위해 보존하기로 한 것. 무려 300억 원을 투자해서 조성했는데 이렇게 한산한 유령마을로 변한 이유는, 서울시와 종로구가 소유권 분쟁을 하기 때문이다. 마을은 조성해뒀는데 분쟁을 하니 추가 공사도 못하고, 변변한 문화행사도 못해 마을 활성화가 안 되고 있는 모양이다. 

그 속 시끄러운 거야 우리들이 알 바가 못되고, 어찌 됐든 의외로 근사하니 소풍길 삼길 추천한다. 

     


경교장을 나와 행촌동을 걷다


어느 날이었다. 후배들과 경향신문 앞 대로를 걷고 있었다. 그때 막 서울나들이 코너를 구상 중이었는데, 괜찮은 것 같다면서 “삼성병원에 *경교장 있는 거 아시죠?”라고 했다. 경교장? 단박에 뭐하는 곳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해방 이후 서울로 돌아온 김구의 사저였고, 그곳에서 암살당했다1949년고 설명해줬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김구 암살은 손에 꼽히는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나라의 갈 길을 좌우하는 큰 사건이었다. 조선을 점령하던 일본이 패망했는데 정작 권력을 세울 힘이 없던 시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김구는 분단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한 인물이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죽음 이후 10여 일 동안 다녀간 조문객이 120만여 명이고 장례식에는 40~50만 명이 참여했다니, 그런 사실이 구태여 등장하지 않아도 우리 역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을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김구가 살고 마지막을 보낸 곳이 이렇게 시내 한복판에 있는데 그 존재조차 모르고 수십년을 살았다. 이십여 년 전 굳이 유명하다는 김치찌개 집을 찾아 이 근처까지 와서 먹은 적은 있지만, 경교장을 찾은 적은 없었다. 그렇게 숱하게 지나다니면서 ‘경교장’이 삼성병원 안에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으니. 오늘 산보의 또 다른 목적 중에 하나였다.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나와 길을 건너니 바로 삼성병원이다. 병원 출입문을 들어서면 응급센터 바로 옆에 일본식 건물이 보인다. 그곳이 경교장이다. 평일 오후라 고요하다. 딱히 다른 시간이라고 해도 사람이 많을 것 같지는 않다. 혼잡한 병원 초입에 있다는 게 영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역사를 취급하는 방식이 그러니 어쩌겠는가. 전쟁을 겪고 먹고 살기 바빴으니 역사고 보존이고 정신이 없었을 것도 같지만, 착찹한 해방정국의 정치상황과 겹쳐 이래저래 가벼운 마음은 아니었다. 

단아하게 정리된 접대실, 집무실, 침실 등을 금세 둘러보고 나왔다. 경교장 안과 밖의 에너지가 대조적이란 생각도 스쳤다. 역사적 유물들에 사적 몇 호라고 이름을 붙여 국가가 관리하는 이유는 뻔한 것이다. 역사로부터 배우자는. 잘못된 점이 있었다면 현재와 미래에 같은 잘못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경계하자는.      

경교장을 나오니 깔끔하고 멋스럽게 정돈된 길이 펼쳐졌다. 이 길을 따라 빙그레 돌아가면 다시 사무실이 나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길은 소담하여 걷고 싶게 생겼다. 앞의 걸음이 천천한 잔 걸음이었다면, 여기서부터는 속도를 내도 될 것 같다. 서대문역 인근의 가난한 동네는 ‘경희궁자이’라는 브랜드의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확 변신했다. 이 아파트값은 고공행진 중이라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예상했던 것보다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이 길에도 많이 숨어 있다. 인왕산으로 향하는 둘레길이 어이지고, 홍난파의 생가도 나오고, 한참 행촌동을 가다보면 **딜쿠샤도 나온다(딜쿠샤는 공사중). 

하지만 내겐 그런 구경거리보다는, 서울의 한 귀퉁이에서 여전히 삶을 이어가는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이어진 골목길이 훨씬 정이 간다. 행촌동이란 이름답게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마을 한 귀퉁이에 터줏대감처럼 묵직하게 자리잡고 있더라. 나무의 그 기운이 가난하고 힘든 이들을 보듬어주면 좋겠다는 기도를 드렸다. 이래저래 골목을 쏘다니다 나오니 사직공원이 보였다. 짧은 여정이었지만 볼거리가 풍성한, 만족스런 산보였다. (끝


          


*경교장(사적 제465호)

일제 강점기에 건축된 일본식 주택 경교장(京橋莊)은 그 당시 금광업자 최창학의 별장이었다. 1938년 완공 당시에는 죽첨장(竹添莊)이라는 이름이었는데, 8·15 광복 후 최창학이 김구의 거처로 제공했다. 김구는 죽첨장이라는 일본식 이름 대신 근처에 있는 경교(京橋, 경구교(京口橋)의 약칭)라는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김구는 1949년 2층 집무실에서 암살될 때까지 이곳에서 살면서 집무를 봤다. 그후 주한중화민국 대사관저로 쓰였고, 6·25전쟁 때에는 미국 특수부대가 주둔하는 등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1967년 삼성재단에서 매입, 건물 뒷면에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 본관을 붙여 오랜 기간 병원 현관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다 2009년 8월 경교장을 복원하기로 하여, 병원 시설들을 모두 옮기고 2011년 3월부터 공사에 들어가 2013년 3월 1일 개관했다. _위키백과 참조     


**딜쿠샤

딜쿠샤(Dilkusha) 또는 앨버트 테일러 가옥. 종로구 사직로2길 17(행촌동 1-88번지)에 자리잡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건축된 지상 2층 규모의 서양식 주택으로, 대한제국 및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활동하던 미국의 기업인 겸 언론인 앨버트 테일러와 그의 아내 메리 린리 테일러가 살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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