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화려한 도심의 이면 #을지로3가공구상가철거
어느 주말이었다. 후배 커플과 대한극장에서 공전의 히트 중인 영화 <알라딘>을 보고, 진양상가가 보이는 길거리에서, 유명한 을지로골뱅이를 시켜놓고 맥주 한잔을 나누며 수다를 떨었다. (충무로역 인근이다. 진양상가는 1970년대 초반에 건축한 대형상가로 꽃상가로 유명하다. 많이 낡아서 도시 재생 관련 이슈가 있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나이가 이만큼이니 어느 골목 어느 장소인들 인연이 왜 없겠는가? 대한극장은 중고등 시절 시험 끝나고 우르르 몰려가 단체관람 영화를 보던 곳이고, 충무로는 출판계 인생 30여 년이니 젊은 시절 누비던 곳이다. 하지만 그곳 그 장소에 앉아 노는 게 거의 20여 년은 된 것 같다. 낡고, 어둑하고, 깨끗하지 않고, 냄새도 시큼한. 그동안 늘 반질거리는 곳에서만 지내와서 퍽 낯선 느낌이었다. 내 근육과 관절이 낡아가듯, 그곳도 그렇게 늙어가고 있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애매해서 그날 택시를 탔다. 을지로 3가를 향하던 택시는 차가 붐비는 게 성가셨는지 오른쪽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그날의 골목 정경은 너무나 생경해서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았다. 골목은 아주 비좁았고, 낡았고, 허름했는데 중간중간 붉은 스프레이로 철거라는 글자들, 붉은 X 표시, 그래피티들로 담벼락이 어지러웠다. 한쪽은 이미 허물어져 있었고, 다른 상점들은 굳게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초여름 토요일, 늦은 저녁의 어스름한 기운이 쇠락해가는 골목에 내려앉고 있었는데, 잠시 후 대로로 빠져나오니 휘황한 도심의 불빛이 눈부시게 화려했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내 세대 역사의 한 귀퉁이를 그곳이 떠받치고 있단 자각이 들었다. 그 골목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는 듯 보였다. 사라지기 전에 사진도 글도 서툴지만, 꼭 다시 와서 담아내리라 마음 먹었다.
본래 다음 주에나 가려 했는데 비소식 때문에 급히 사무실을 나섰다. 37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의 정점. 오후 4시가 지났지만 태양의 기세는 누그러질 기세 없이 날카롭다. 오늘 여행의 에피타이저는 명동성당이다. 을지로입구에서 내려 명동성당까지 걸을 엄두가 안 나 택시를 탔다. 명동성당에서 걸어내려오면 금세 을지로 3가이니 맞춤한 것 같았다.
엉겁결에 따라 나선, (그러고보니 그녀와 나는 나이 차가 30년이다) 꼬맹이 기자 P는 명동성당이 처음이라며 신기해했고, 나는 내가 네 나이 무렵일 때 이곳은 가난한 자들, 폭압받는 자들을 품는 성지였다고 설명했다. 그 마당은 거의 농성장 차지였고, 성당을 향하는 계단에는 그들과 연대하고 지지하는 청년들로 가득 찼다고. 성당 뒷마당으로 향하니 누군가 성모상 앞에서 무릎을 끓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평온하고 호젓한 기운이 전해졌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평온의 기운이 조금 더 가난한 자들에게로 은총처럼 퍼져나가길 바랐다.
아스팔트의 열기가 얼마나 매섭던지 샌들을 신은 P기자의 발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나는 정확하게 그날 택시를 타고 지난 곳이 어딘지 몰라 헤맸다. 그러다 오구반점이 눈에 들어왔다. 을지로 59번지에 있는, 화교가 하는 이 중국집은 53년에 개업해서 지금껏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터줏대감이다.
그곳으로 일단 ‘피서’를 했다. 아직 본격적인 식사 시간이 아니니 제일 유명한 튀김만두 한 접시를 시켰다. 세월의 흔적이 덕지덕지 앉은 게 신기했는지, P기자는 핸드폰으로 내부를 열심히 찍었다. “이런 천장 무늬도 신기해요~” 예전의 맛은 아니라지만 여전히 만두 속은 실했다. P는 튀김만두를 서비스가 아닌, 하나의 요리로 시킨 것도 신기하다고 했다.
자, 이제 어디로 간다지? 그때 그곳이 어디였는지 머릿속으로 지도가 그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오구반점 사장님에게 수표동, 입정동 공구상가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바로 나가서 오른편으로 가면 된다고 했다. 젊은(?) 처자 둘이 목에 카메라를 매고 있으니 기자나 활동가 행색이 나서였는지, 철거문제 때문에 가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저간의 사정을 설명해주었는데, 대략 요약하면, 대책위원장이 도장만 찍으면 끝이 나는 상황이며, 한참 전에 이들에게 이주 대책으로 문정동 단지에 입주할 자격을 주었는데 분양가가 비싸고 여의치 않아 못 간 사람이 많다고 했다. 저마다 입장에 따라 철거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테고 구경꾼이 아는 체하기 어려운 문제라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오구반점을 나와 수표교 쪽으로 걷다보니 공구 상가들이 도로변에 늘어서 있는데, 그날 내가 지났던 그 골목은 아니었다. 앳된 P기자의 여린 발이 자꾸 신경이 쓰였지만 취재를 해야 하니 도리가 없다. 혹시나 짐작으로 걸어들어간 골목은, 을지로 노가리 맥주 거리였다. 활활 타오르는 아스팔트의 열기를 못 견뎌 우리는 그곳의 명물 만선호프로 다시 ‘피서’를 했다.
큼지막한 노가리 하나에 천원! 만선호프는 안주가 싸고 나름 멋스러워서 옛날부터 유명했는데 한두 해 전부터 더 유명세를 타게 됐다. 해 지기를 기다리며 잠시 수다를 떨다 나오니, 을지로 노가리 골목은 만선호프가 거의 장악한 듯 보였다. 여기저기 가게들이 모두 만선호프였다.
오구반점 주인이 한 말이 떠올랐다.
“만선호프는 대기업 맥주 직영점이에요.”
계산을 하면서 보니 만선호프 내부에 ‘골목을 지키자!’는 주장을 담은 포스터가 있었다. ‘골목을 지키는 일이 대기업 맥주 직영점을 지키는 일이 되겠군.’ 세상 일이 이처럼 보여지는 게 전부가 아님을 안다만. 그러니 진실의 옥석을 가리기도 어렵고, 애써 가려낸 다음 더 좋은 길로 가는 합리적 대안을 찾기도 그토록 어려운 것이겠지.
그날 택시 안에서 본 골목의 무엇이 그리 마음에 남은 걸까? 오랫동안 익숙했던 것이 단번에 사라져버린 일이 그뿐이랴만, 추억팔이 삼아 여전히 보이는 것도 많은데 그 골목의 정취는 달랐다. ‘응답하라’류의 추억이 정情을 기반으로 한 보편적인 것이라면, 이 골목의 역사는 좀 결이 다르다.
만선호프를 나와 골목을 잘 찾으려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금세 찾아냈다. 반색을 하며 골목에 들어서니 ‘금형, 절단’이란 글자들과 간판들이 보였다. ‘마찌꼬바’작은 공장이라는 뜻의 일본어다! 골목 안에 작은 공장이 빼곡했는데, 사실 공장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작은 가게들이었다. 이 풍광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를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 청년기의 중요한 한 부분. 이제는 너무나 까마득해서 나조차 잃어버린 그것을 소환했기 때문이다.
P는 완전히 어리둥절해했다. 처음 보는 광경이고, 심지어 한번도 본 적이 없으며,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현실감이 없다고 했다. 오래된 것이라는 건 알겠는데 너무 쇠락해 있고, 무언가 뒤죽박죽된 느낌이라고 했다. 그녀는 이번 여행을 시간여행이라 표현했다.
을지로는 제조업과 유통, 인쇄의 중심지였고, 그 골목은 60여년 된 제조업의 역사를 힘겹게 이어가고 있었다. 지금은 모든 공산품을 중소 혹은 대기업에서 대량으로 만들어내서 이런 영세한 제조업장이 별로 필요없지만 70년대, 80년대만 해도 달랐다. 동네마다 필요한 모든 것을 마찌꼬바라 부르는 작은 공장에서 일일이 주문을 받아서 제작했다.
쇠냄새와 뒤섞인 기름 냄새가 났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기름밥을 먹는다는 표현을 했었지. 용접을 하느라 뿜어내는 불꽃 때문에 잠시 걸음을 멈추기도 했다.
스물둘 대학생 때, 작은 교회를 기반으로 한 노동야학을 다녔다. 나와 동갑인 노동자 A는 얼굴이 좀 네모나고 키가 크지 않았고, 나보다 나이가 많은 또 다른 노동자 B는 키가 훤칠했다. 그들은 군포 인근의 마찌꼬바 노동자들이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있으면 세상물정 모르는 아이 같아서 부끄러웠다. 내가 그들 속에서 강학(노동야학에서는 서로 배운다는 의미로 선생 비슷한 신분을 강학이라고 부르고, 노동자 학생을 학강이라고 불렀다)이란 신분으로 있는 게 어색했다. 함께 야유회를 갔을 때 강학이라고 불리던 우리들을 바라보던 동갑내기 A의 표정이 쉽게 잊히지 않았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그 일을 하는 게 엉성해서 결국 오래 해내지도 못했다.
그날 그 골목에서 나는, 수십년 전의 나와 A와 B를 만났다. 오랫동안 잊고 지낸 내 삶의 한 귀퉁이, 우리들의 잊혀진 역사.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금 만나면 넉살도 부려볼 만해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때의 강학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잘 알고 있다. 나를 비롯해 대부분, 안락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마찌꼬바 현장은 서울 지역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있었다. 성수동, 영등포, 성남, 인천…. 작은 규모의 노동자 파업이 자주 일어났고, 연대 지원 시위가 있었으며, 새벽 가투(가두시위)가 벌어졌던 현장. 노동자가 되길 지향했던 내 친구들, 선후배들은 쉬운 듯 쉽지 않은 듯 그 삶을 아주 오래 전에 떠나왔다.
수많은 감정들이 복잡하게 오갔다. 일하는 그들 속을 구경꾼처럼 누비는 게 불편했다. 슬쩍슬쩍 몇 장면을 담고 인적 없는 빈 골목을 찍는 게 수월할 것 같아서 해 질 무렵 다시 오기로 하고 충무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가 기울려면 한두 시간은 더 걸려야 할 것 같아서 충무로 인쇄골목 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이번 여행에 대한 생각이 시작된 곳.
P는 이곳이 홍콩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을지로의 랜드마크나 지하철 역 주위, 명동, 백화점만 다녔는데, 이런 곳이 있는 게 놀라웠다고 했다.
을지로에서 길을 건너 충무로역 인근 인현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오른쪽으로 인쇄골목들이 잔가지처럼 연결돼 있다. 투명한 유리벽 너머에서 책 무더기가 보였다. 인쇄와 제본을 하는 곳이다. 젊은 시절, 필름 감수 하느라, 표지 인쇄 감리 하느라, 잘못된 책 다시 제본하느라, 광고용 수동 식자를 찍느라, 무던히도 걸음하던 곳이다.
인쇄된 종이 냄새가 내 코에 닿았다. 얼마만이던가. 하지만 이곳 인쇄골목과의 인연은 그보다도 더 오래됐다. 이십대 초반, 일명 불법 유인물을 인쇄하러 선배를 쫓아오던 곳이기도 했다.
인현시장 초입의 육회집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 정보도 없었는데 사람 발길이 잦아 보여 따라 들어갔다. 우리 둘은 육회 세트와 소주 한 병을 시켰다. P기자와는 지금은 함께 다녀도 전혀 어색하지 않지만 처음엔 조금 어색했다. 나이차가 웬만해야지. 하지만 이제는 나이 차가 많은지 적은지 별로 신경이 안 쓰인다. 내가 이렇게 말하니 그녀는, 자신도 그렇다며 혹시나 너무 버릇없어진 게 아닌가 걱정스러울 때가 있다고 했다. 우리는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그렇긴 해도, 그날 내가 느낀 것들을 그녀에게 모두 전할 수는 없었다. 개인적 소회란 게 얼마나 장황한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옆 테이블에서는 인쇄업 직장 동료로 보이는 이들이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이 쓰는 용어들이 귀에 들려와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일터 근처, 직장 동료들이 퇴근길에 들르는 좋은 술집이었다.
남은 숙제를 마저 하려고 육회집을 나섰다. 오른쪽으로는 새로 지은 호텔 건물이 근사하게 서 있는데 왼쪽으로는 낡고 오래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극단적인 대조. 도심의 이면을 애써 보자고 드는 일은 가볍고 유쾌한 일만은 아니다. 사는 일도 버겁고, 일상도 만만찮으니 화려하고 좋은 것 보고 맛있는 것 먹고 싶은 게 너무나 당연하다.
어둠이 깃든 골목이 어떨지, 아까 찍은 사진으로 충분할지, 이런저런 조바심을 안고 걷다보니 어느 결에 저 멀리 주황빛 노을이 곱게 하늘을 감싸왔다. 좁고 어두운 골목에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고, 색색의 네온사인이 불을 밝히자 도시의 하늘이 더욱 아름다워졌다.
다시 찾은 골목. 불 꺼진, 셔터를 내린, 빈 골목은 어둡고 스산했다. 푸르스름하게 물든 여름 하늘, 붉은 노을기, 도시의 네온사인이 어우러져 사진 속의 골목은 다른 정취를 발산했다. 골목을 돌아나오려니 붉은 플래카드가 큼지막하게 걸려 있었다.
“전통이 살아 숨쉬는 청계천 산업용재 시장, 우리모두 단결하여 지켜내자!!”
몇 년째 이 지역은 철거문제로 시끌시끌하다. 구경꾼이 함부로 얘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구경꾼의 몫도 있는 법. 전통과 역사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친근하게 소비되는 전통 혹은 역사가 있다. 왕조의 역사가 그렇고, 한옥이 그렇고, 서민들이 사는 골목이 그렇다. 그렇다면 ‘산업용재 시장’이라는 낯선 이름을 가진 이곳의 역사와 전통은 어떤가?
을지로의 이 골목은, 60여 년 제조업의 역사를 버텨온 곳이다. 한국전쟁 이후 폐허나 다름없는 곳에서 지금의 한국을 건설해낸 힘이기도 했다. 도면만 있으면 탱크도 만들어내는 곳이라고 했다. 지금도 예술작품을 만들기 위해, 작은 물건을 만들기 위해, 무대 장치를 만들기 위해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는다. 더 중요한 것은 5만여 명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일을 하고 돈을 벌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사람의 밥그릇을 위협하면 다섯 배, 열 배의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다는 걸 우리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이곳을 갈아엎고 흔히디흔한 주상복합 아파트를 세워야 속이 시원한가?
60년대, 70년대, 8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마찌꼬바 노동은 전통이 될 수 없는가? 우리가 살피고 되돌아봐야 할 역사적 가치는 없는가?
P기자와 같은 수많은 청년들이, 잘 정비된 을지로 제조업의 현장을 둘러보면서 이때의 산업과 노동에 대해 생각해보다가, ‘힙지로’에 가서 그들이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고, 디저트를 먹고, 독특한 술집에서 맥주도 한잔하면 좋겠다는, 나의 생각은 너무 안일하고 단순한가?
그래서 그날의 여행은 답답하고 속이 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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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도 식후경
시작하기 전에 ‘힙지로’(힙한 을지로)로 꼽히는 몇 곳을 인터넷으로 찾아봤다. 젊은 기자와 움직이니 이번엔 노포 말고 힙한 곳으로 갈까 했지만, 이번 여행과 영 안 어울릴 것 같아서 충무로로 향했다. 충무로 역 근방은 서민 음식이 유명하다. 특히 생선구이는 역사가 있는 메뉴다. 인근 직장인이 찾던.
01 뭉티기육회
푸짐하고, 가성비가 좋다. 특별한 맛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그럴 만한 음식은 많지 않다), 3만 원 세트메뉴는 육회와 육전과 새우전이 나오는데 세 명 안주로 거뜬하다. 서비스로 나온 홍합탕과 튀김도 괜찮다. 낙지가 추가된 세트메뉴는 조금 더 비싸다.
02 오구반점 너무나 유명한 중국집이다. 그런데 일부러 찾아갈 만한 집은 아닌듯도 하나. 중국집은 주위에 괜찮은 집들이 많아서일 수도 있다.그러나 역사가.. ! 튀김만두는 만두소에 고기가 꽉 차 있다. 한 접시 8000원. 그날 다른 메뉴는 먹지 않았지만, 그 전에 한 번 갔었는데 크게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03 만선호프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왕초. 대체 지점이 몇 개야? 그럼에도 천원짜리 노가리는 매력적이고 안주가 푸짐해서 주머니 가벼운 청년들과 퇴근길 한 잔 할 직장인의 걸음이 잦은 게 당연하다 싶다. (그런데 이 노가리의 원산지가 어디일까, 걱정이 되긴 함) 부추와 두부 안주도 좋아하는데, 그날은 그냥 노가리 세 마리와 맥주 한잔만 했다. 봄, 여름, 가을에 노천에 여는 그 풍광도 일품. 그러나 기사에서 썼듯, 만선호프는 대기업 맥주에서 직영으로 관리하는 곳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