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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나 Jan 15. 2020

우리는 모두
어리석은 파리고, 나방이다

걸음을 멈추고 변화에 주목하면 어느새 내 걸음이 물살에 휩쓸려 저만큼 가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고 어쩌고 하는 말은 너무 낡았다. 10년은 무슨? 너무 길다. 2~3년만 지나도 변해버린 게 얼마나 많은데. 친구들과 전화 수다를 떨어본 게 언제였더라. 두서너 해 전만 해도 통화량이 지금처럼 적지는 않았다. 일하다 속 끓는 일이 생기면 잠시 공원에 가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했더랬다. 동네 친구들과 카톡으로 약속을 정하다가 답답하다며 전화를 걸어 또 한참 수다를 떨기도 했고. 오로지 카톡 같은 걸로만 소통하는 자녀 세대들이 신기했다. 

그런데 지금 나도 그렇게 됐다. 자질구레한 통증은 혼자 앓고 처리해야 할 만큼 나이가 든 탓도 있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어느새 나도 타인의 음성을 듣는 일이, 그 음성에 조금이라도 실려 있는 타인의 생(生)의 무게를 알아채는 일이 부담스럽다. 음성에는 결도 있고 온도도 있어서 마음을 써서 듣고 반응해야 한다. 더 슬픈 건 이 타인의 범주 안에 친구도 들어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내가 각박해졌다니. 그런데 나만 그런 건 아닌 듯하다. 카톡이며 SNS으로 사람들과 하는 소통은 늘었는데 ‘관계의 아날로그’는 사라져간다. 기술이 촉발한 단순한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는 아닌 것 같고, 훨씬 강팍해진 사람살이 모양새 탓이려나.    

어젯밤 한밤중에 잠이 안 와 숨쉬기 운동이라도 할 양으로 베란다에 나가 밖을 내다봤다. 아까 보니 만월이 기울기 시작했는지 이지러져 있었다. 그 달이 앞동 맨꼭대기에 걸려 있는데, 안경을 안 낀 맨눈이어서 그런가, 달인지 다른 집에서 새나오는 불빛인지 가늠이 안 된다. 가짜 달들이 이렇게 많다니.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인지 점점 흐리멍덩해진다. 

조명등이 넘쳐나는 도시에서 달은 얼마나 외로울까. 그리고 우리도 달만큼 외로워졌다.    


휴일에 혼자 <빨강머리 앤>을 보다가 울컥 한 적이 있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아이들과 동네 사람들이 마을 페스티벌을 여는 장면이었다. 까마득한 기억이 소환됐다. 국민학교 때 성당 주일학교를 다녔다. 크리스마스 전야제엔 초중등 학생들이 성탄제를 준비한다. 그때 연극을 했었다. 삐걱거리던 무대, 천사로 분장하느라 흰 타이즈와 흰 티를 입고 어깨에 휴지로 촘촘하게 만든 날개를 달고 겅충대던 일들이 떠올랐다. 무대 장치며 조명이며 분장이며 모두 주일학교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일일이 손으로 준비했었다.    

그리웠다. 그런 어수선함들이. 눈가에 물기가 오를 만큼. 굉장히 중요한 것을 잊고 살고 있다는 뼈아픈 자각, 이게 사람 사는 거야, 라는 뿔난 소리가 울렸다.        


소소하지만 전면적인 기후변화가 두렵다

변화의 폭과 깊이, 속도가 무서울 정도다. 

한두 해 전쯤 월간 <유레카>에서 플라스틱 특집을 다룬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당시에 비해 훨씬 심각해졌다. 바다 동물들이 비닐봉지, 미세 플라스틱을 먹다 죽고, 쓰레기섬이 바다를 떠돌고, 제주의 쓰레기는 갈 데를 몰라 외국에 보냈다 다시 돌려받았다. 말해봐야 입만 아플 만큼의 사례가 넘친다. 그런데 지금 내 사는 꼴을 보면 극히 당연하다. 일하느라 바빠 미처 먹을 걸 챙겨두지 못하니, 시험이다 학회다 바쁜 딸아이는 배민(배달의민족)에 기대 산다. 널브러져 있는 플라스틱 용기를 치우는 게 일이다. 여름철 사무실 부근 카페의 넘쳐나는 일회용컵도 마찬가지다. 임계점이 코앞인 것 같다.  

기후변화가 심상치 않다. 올 겨울엔 장갑을 거의 챙기지 않는다. 사무실에 난데없는 초파리들이 극성스럽게 몰려든다. 드넓은 호주가 벌겋게 불타 5억여 마리의 가엾은 동물들이 타죽었다.

 주위에 감기 환자가 올해는 유독 극성이다. 감기를 안 앓는 사람이 거의 없어보일 정도다. 미세먼지는 이제 관성이 붙었는지 최악 경보인데도 사람들이 노마스크로 다닌다. 겨울 방한복과 호빵 판매가 저조하고, 날이 춥고 일교차가 커야 살이 부드럽고 맛과 향이 좋은 황태가 생산되는데, 날이 안 추워 황태 덕장은 애가 탄다. 눈축제, 얼음축제, 빙어축제 같은 겨울철 축제도 실종이다. 

환경 관련 테마는 오랫동안 핫이슈였다. 그러나 이젠 이슈가 아님을, 이미 자잘하고 소소하고 전면적인 변화들이 생겨나고 있음을 감지한다. 우리의 미래가, 내가 죽고 살아가야 할 내 아이들의 미래가 너무나 두렵다.      


어리석은 파리와 나방 얘기

늦은 퇴근길이다. 운전에 익숙해지려고 한달만 자동차 출퇴근을 해보기로 했다. 확실히 매일하니 운전 부담이 줄고 주차를 비롯한 여러 가지 상황들에 적응이 돼간다. 운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데다 집앞에 출근 버스노선이 충분히 많아서 종종 배터리가 방전될 정도였다. 걷기도 좋아해 차가 아주 성가셨다. 팔아 치울까 하다가 자동차 쓸 일이 종종 있는데 그때마다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기도 그래서 운전 기량을 좀 높이려 훈련 중이다. 그런데 예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차로 다니는 게 더 편해졌다! 훈련 한달만이라고 못박긴 했지만, 편리함이 아주 달콤한 꿀 같았다. 혼자 뭐 대단한 일을 한다고 이산화탄소를 써가며 차량 출퇴근을 하겠는가마는. 편리성이란 확실히 헤어나오기 어려운 중독성이 있음을 자각 중이다.  

며칠 전 영어 공부를 하다 우연히 본 글이다. 파리와 나방 에피소드.        

파리 한 마리가 꿀단지 주위를 돌다가 주변을 핥아먹기 시작한다. 너무 달콤하고 맛있어서 파리는 저도 모르게 단지 안쪽을 계속 핥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단지 안 꿀 속에 빠져버린다. 날아오르려 해도 소용이 없다. 끈적한 꿀에 발린 날개가 천근 무게다. 

한 마리 나방이 휘휘 돌다가 파리가 하는 양을 구경하다가 한마디 한다. 

“어리석은 파리야, 어쩜 그렇게 욕심스럽니. 너무 식욕이 과했어.”

파리는 할말이 없다.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고 램프의 불이 켜졌다. 나방이 램프 주위를 빙빙 돌더니 점점 불꽃 근처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급기야 불꽃 속으로 뛰어들어 죽는 게 아닌가. 파리는 황당했다. 자신에게 충고를 하던 나방이, 저렇게 어리석다니.          

이 우화의 테마는 충고에 관한 것인 듯한데 요즘의 내게 이 일화는 다르게 읽힌다.       


우리 모두의 일이라는 레토릭

나는 딸아이에게 지구환경 운운하며 배민 사용을 줄이라고 잔소리하지 않았다. (하고 싶기는 했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면 불필요한 잔소리가 돼버리니까. 또 하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이 엄청나고 전지구적이며 거대한 문제를 개인적 실천에만 기대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니까. 

딸 아이에게 ‘기후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면 파쇼적인 결단이 필요해 보여’라고 했더니, 어떤 사회문제든 그럴걸, 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만만하고 쉽게 동의해주지 않는 청년. 이것저것을 모두 고려하여 모두가 좋은 해법은 못 찾을 것 같다.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샤일록의 살 1파운드를 벨 수 없듯이.   

퇴근길 라디오에서 꽤 유명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며 아나운서가 들려준다. 막 라디오를 틀어서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기후변화는 심각하다. 우리는 미래 세대에 깨끗한 환경을 물려줘야 할 의무가 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일이다.’ 이 말을 듣다가 픽 웃음이 나왔다. 전형적인 레토릭이다. 귀에 듣기 미풍처럼 부드러운 말, 입안에 살살 녹는 아이스크림 같은 말. 그러나 아무런 뼈대가 없는, 하나마나한 말. ‘우리 모두의 일’이라는 레토릭은 아무데나 붙여도 잘 어울리는 포스트잇 같다. 

낮에 원고 교열 보느라 읽었던, 10대 스웨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의 날카로운 일침 덕에 그 말에 더 빈정이 상했던 것 같다. 모두의 일이란 말, 모두의 책임이란 말은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다는 말과 같다고 했다. 이산화탄소 배출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기업이 있다.  망가져가는 지구를 구하려면 이들 기업과 이들의 돈과 싸워야 한다고 했던 그 말이. 

한국은 이산화탄소 배출 증가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이고, 온실가스 배출량은 세계 7위에 달한다. 호주 산불에서 소방관이 구출한 코알라를 품에 안고 있는 사진을 여러 사람이 페북에 올렸다. 귀여운 코알라의 코와 귀, 몸 여기저기 화상을 입었다.   

우리가, 아니 내가 어리석은 파리나 나방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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