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종묘 #사직단
글 사진 김지나
어딘가를 구경하러 가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버린 요즘이다. 코로나 괴물한테 지고 싶지는 않은데 녀석의 힘이 너무 막강해서 우리를 한꺼번에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버렸으니. 그러던 어떤 날, 해가 정말 쨍하게 맑았다. 나들이 같은 한가한 걸음이 무색해진 시절이지만 쾌청한 봄햇살의 꼬임에 넘어갔다. 똑딱이 카메라를 챙겨들고 나섰다. 순라길을 에돌아 다니면서 정작 종묘 안으로 들어가본 기억이 까마득하다. 여고 때 사생대회 혹은 대학 때 친구랑 산책한 기억? 어찌 됐든 족히 30년은 넘었다. 그 종묘가 궁금했다.
광화문 사무실에서 종묘로 가려면 뒷길을 쭉 관통하면 된다. 세종문화회관에서 길을 건너 미국 대사관 옆을 지나 종로구청을 거쳐, 길 건너 인사동에서 직진하면, 종묘를 에두르고 있는 서순라길이 나온다. 성큼성큼 머릿속 ‘네비’를 따라걷다 문득 왼쪽 샛길을 봤다. 조계사 뒤쪽이다. 이쪽으로 걸어나온 적은 많지만, 뒤쪽에서 들어가본 적 없어 그런지 길의 모양새가 신선해 보인다.
방향이 바뀌면 보이는 게 달라지는 건 당연한 이치. 공원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작은 터가 눈에 들어왔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흡연가들 옆으로 호기심 가득, 기웃거린다. ‘사립보성학교’ ‘보성사’라고 새겨진 기념탑이 서 있다. 근처에 표석을 읽어보니 보성사는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이라고 한다. 돌아와 자료를 찾아 보니 독립의 기개가 서린, 역사 깊은 장소였다. 그러나 수없는 세월이 흘러, 지금은 그저 조계사 뒤편, 하릴없는 비둘기와 흡연가들이 모여 있는,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은 곳이 됐다. (혹시 조계사에 가면 꼭 뒤편에 있는 이 작은 공원도 들여다봐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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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학교와 보성사
1906년 이용익은 이곳에(당시 한성부 중부 박동, 현 서울 종로구 수송동) 사립 보성중학교를 개교했다. 현재 송파구 방이동에 있는 보성고등학교의 전신. 교명 보성(普成)은 고종이 내린 이름으로 ‘널리 사람다움을 열어 이루게 한다는 뜻’이다. 개교 때부터 보성학교는 시대의 고통을 함께 짊어졌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등을 했고, 3․1 운동 당시에는 교장과 졸업생, 재학생이 만세운동을 주동했다.
보성사는 이 학교 구내에 있는 인쇄소. 학교 교재를 출판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곳에서 1919년 3․1 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 3만 5천부, <조선독립신문> 1만부를 인쇄, 배포하는 등 중심역할을 했다. 일본 경찰은 1919년 2월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후 조선독립신문을 계속 발행한 보성사를 폐쇄했고, 같은 해 6월에는 불을 질러 없앴다. 1927년 종로구 혜화동을 학교는 이전했다. (사진 01)
쇠락한 역사를 엿본 것 같은 씁쓸함을 안고 조계사로 걸음을 옮긴다. 빼곡하게 들어찬 하얀 연등이 반겨준다. 석가탄신일이 다가오고 있구나, 그제야 생각이 난다. 대웅전 앞쪽으로 자리를 옮기니 형행색색의 연등이 해를 가릴 만큼 가득하다. 저만치서 누군가 기도를 올린다. 나도 따라 절박하게 부처님께 청을 드린다. 무릇 힘없고 가난하고 약한 중생들의 생명을 지켜주십사, 경제적 곤궁으로부터 구원해주십사, 코로나 괴물이 힘을 잃고 사라지게 힘을 써주십사….
매 순간 들고나는 숨. 들고나는 공기를 우리는 자각하지 않는다. 뜬금없는 표현이지만, 조계사가 그런 맥락을 가진 절이란 생각을 했다. 광화문, 경복궁, 인사동, 안국동을 구경 다니면서, 여기 늘 이렇게 조계사가 있다는 걸 알지만, 굳이 구경하는 이들은 적다. 혹여 구경 가본 적이 있다고 해도 별 느낌 없이 돌아섰을 공산이 크다. 도심의 거리 한쪽에 별다른 경계도 없이 스며들 듯 자리잡은데다 절이 웅장한 것도 아니요 특별히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품고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그 역사를 알고 보면, 참으로 친근하고 문턱이 낮은(문화 유적으로 봤을 때) 이 절이 꽤 당찬 절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불자가 아니니 한국 불교의 역사에 대해 까막눈이긴 하지만, 조계종이 한국 불교의 대세인 건 익히 알고 있다. 그만큼 불교계 비리의 온상이기도 하고. 조계사는 조계종의 총본산이다. 오늘은 여행자로서 그런 비판은 건너뛰련다.
다음날 사무실에 앉아 이런 생각을 해봤다. ‘4대문 안의 사찰이요 경복궁 코밑에 있으니 궐 안의 지체 높은 이들이 드나들었으려나?’자료를 찾아보니 상식 부재요, 택도 없는 공상이었다.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억불 정책을 펼쳤고, 승려의 도성 출입을 불허했다. 승려 도성 출입금지를 해제한 건 1895년 고종 때였다. 산속 깊이 은거하던 한국 불교는 비로소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조계사는 도성 안에 포교원을 짓고자 했던 오랜 꿈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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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의 전신, 각황사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불교계는 세상으로 나아갈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1908년 동대문 밖 창신초교 터에 있던 원흥사에 사찰 대표 64명이 모여 원종(圓宗) 종무원을 설치했다. 이들은 여러 가지 핵심 사업을 추진했는데 그 중 하나가 4대문 안에 각황사를 세우는 것이었다. 1895년까지 승려의 도성입성이 금지돼 왔으니 4대문 안에 절(각황사)을 창건한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 각황사는 당시로서는 4대문 안의 유일한 사찰이었다. 각황사는 종로구 수송동 82번지, 한국일보사와 연합뉴스 건물 근처에 있었다.
이 각황사를 1937년 현재의 조계사로 옮겨오는 공사를 시작했으며, 이듬해 삼각산에 있는 태고사(太古寺)를 이전해, 절 이름을 태고사로 했다. 태고사를 창건하면서 사찰의 중심인 대웅전은 정읍에 있었던 보천교(普天敎) 십일전(十一殿)을 이전, 개축했다. 1954년 일제의 잔재를 몰아내려는 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난 후 조계사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순라길, 서순라길을 돌고, 세운상가에 올라가 종묘의 전경도 구경했지만 굳이 가보지 않은 건, ‘가본 적이 있고, 우리의 건축물들이 다 거기서 거기겠거니’ 하는 짐작 탓이었다. 가끔 버스를 타고 출근하다 원남동에서 내려 종묘 앞을 지나 사무실로 걸어 오면서 언젠가 꼭 들어가 봐야지 했었다.
처음 종묘 앞을 지날 때 나의 오랜 기억과 달라 신기했다. 지금은 공원처럼 잘 조성돼 있지만 예전에는 특별한 꾸밈 없이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입장료를 낸 것 같지 않고(입장료 1천원), 나무 사이를 걷다가 몇 개의 옛 건물 사이를 누볐던 것 같다. 나무가 우거져서 조금 어둡고 그늘진 느낌이었다. 각설하고, 결과적으로 보면, 이날 나는 종묘를 처음 구경했다.
또 하나 재미난 건, 특별히 계획한 건 아닌데, 원고를 쓰다보니 그날의 나들이가 ‘언발란스한데 발란스’가 맞는 느낌이다. 조선왕조의 기운이 쇠하던 고종 때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를 해제하면서 조계사가 지어졌다고 했는데, 종묘는 반대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면서 가장 먼저 짓기 시작한 건축물이다. (1394년 10월 공사를 시작해서 다음 해 9월에 완성했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세웠으니 조상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를 지내는 일의 중요성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에는 공덕이 높은 19명의 왕과 왕비들이 모셔져 있다. (조선 왕조의 왕은 모두 27명이다.)
종묘라고 하면 두 가지가 떠오른다. 종묘제례약과 종묘사직. 그중에서 귀에 익는 말이 종묘사직이다. 역사극을 보면 충신들이 충성심과 근심을 가득 담아 길게 길게 목청을 뽑으며 왕에게 이르는, “전하~~ 종묘사직을 보존하시옵소서~~”같은 말이 자주 등장한다.
자, 그럼 여기서 퀴즈 하나? 종묘는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사직은?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다. ‘토지 신과 곡식 신’이다. 따라서 종묘사직을 보전한다는 말은 왕실과 나라의 근간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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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과 사직공원
광화문 서쪽 사직동에는 사직공원이 있다. 종로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느라 자주 가는 곳인데도 사직공원이 뭐하는 곳인지 알아볼 생각도 안 했다. 왜 사직동인지도.
사직공원에 사직단이 있다. 사직단은 나라의 발전과 백성들의 편안한 삶,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땅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한자로 사직단을 풀이하면 사(社)는 땅의 신을, 직(稷)은 곡식의 신을, 단(壇)은 제사를 올리는 제단을 말한다. 나라에 커다란 사건이나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또는 극심한 가뭄이나 홍수가 일어났을 때 사직단에서 제사를 지냈다. 알아야 더 사랑하게 되는 법이거늘.
사직단은 문화재 보호시설이라 가까이에서 볼 수 없다.
토지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사단(社壇)은 동쪽에, 곡식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직단(稷壇)은 서쪽에 배치했다. 일제는 조선의 사직을 끊기 위해 사직단의 격을 낮추어 공원으로 삼았다. 그 과정에서 크게 훼손됐고, 도시계획 등을 거치며 면적이 축소됐다. 이후 1980년대 말에 정비 사업을 별어 단과 그 주변, 일부를 복원했다. (사진 02)
드디어 표를 사서 입장했다. 날이 맑아 햇살과 그늘의 대비가 선명했다. 가본 적은 있었으나 눈만 뜨고 다녔을 뿐 본 건 하나도 없음을 새삼 자각했다. 코로나19로 사람이 없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참 고즈넉했다. 만일 동행이 있었다면 이 말을 연발했으리라. ‘와, 오길 너무 잘했어.’
궁궐과는 참 많이 다른 모습이다. 궁궐의 경우 건물 처마 끝마다 화려한 단청 장식이 있다. 하지만 종묘 건물들에는 단청이 없다.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제를 올리는 곳이니 당연하겠다. 하지만 스케일만큼은 궁궐에 버금가니 독특한 멋스러움을 자아낸다. 정갈하고 담백한, 그래서 더 기품이 넘치는.
건물의 쓰임새도 궐과는 많이 다르다. 위패를 모신 정전과 영녕전이 종묘의 중심건물이지만,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곳(전사청), 향과 축문 등을 보관하는 곳(향대청), 왕이 목욕재계하고 의복을 갖춰입고 세자와 함께 제를 올릴 준비를 하던 곳(어숙실) 등이 있다. 종묘 나들이 때는 미리 이런저런 것들을 알고 가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
두리번거리며 한발 한발 가다 보면 드디어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정전이 등장한다. 군더더기 없는 수평의 길고 긴 건물. 검소하되 위용으로 치면 결코 기세가 덜하지 않은, 그 단일한 기개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디서도 본 적 없고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건물이다. 19칸의 긴 건물이 반듯한 수평을 이루며 똑바로 앞을 응시한다. 자료를 보니 동시대 단일 목조건축물 중 연건평 규모가 세계에서 제일 크고, 세계에 유례가 없는 독특한 건축물이라고 서술돼 있다.
물론 문은 굳게 잠겨 있다. 각각의 칸마다 19위의 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꼽을 만큼 길어진 이유는 위패가 늘 때마다 감실을 증축해서란다. 그래서 정전을 받치고 있는 20개의 기둥 모양이 모두 같지 않다. 정전에는 19칸의 태실에 모두 49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19명의 왕과 30명의 왕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오늘, 그날의 여정을 돌아보며, 간절히 바랐다. 조상님이든, 부처님이든, 삼라만상 모든 좋은 기운들에게, 비록 우리가 탐욕스러우나 궁휼히 여겨 재난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제해주기를. 코앞의 봄이 무색한 요즈음이다.
조선왕 19위의 위패를 모신 정전.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곳이다. 꼭 찾아가 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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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정전, 영녕전
정전은 처음에 7칸짜리 건물로 지어졌다. 세종대왕 때 신주를 모실 공간이 부족해 정전 바로 옆 서쪽에 영녕전을 지었다. 영녕전은 총 16칸으로 정전에 비해 규모가 작지만, 그래서 그런지 조금 더 편안한 느낌이고, 짜임새의 아름다움이 도드라져 보인다. 모셔진 신주는 34위.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가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신주는 종묘에 모셔졌지만, 폐위된 왕인 연산군과 광해군은 정전은 물론이고 영녕전에도 신주가 없다. 유교에서 중시한 조상 공경을 실천하지 않았던 왕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_네이버 지식백과, ‘종묘’ 참조
인문교양 <유레카> 4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