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군인들을 위로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꼭 생각나는 장면과 동시에 흥얼거려지는 노랫말이 있다.
엄마가 보고플 때 엄마 사진 걸어놓고~~
오랜 세월부터 부모님의 효사상에 대한 예는 차고 넘쳐 지금까지도 한국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타이틀로 세계에서 가장 예의 바른 나라를 고수하고자 노력하는 나라이다. 하지만 한쪽에만 국한되어 어머니에 관한 효는 발에 치일만큼이지만 아버지를 향한 효는 눈을 씻고 봐도 없을만큼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들어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며느리에게 ‘효부상’을 주어 며느리의 애씀을 치하하기도 하지만 효부의 남편도 장모에게 그만큼 했을 터인데도 남자를 위한 상은 들어본 적이 없다.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엄마 사랑은 끝도 없는데 아빠를 사랑하는 내용은 가뭄에 콩 나듯 하니 엄마에 대한 효심은 넘치고 넘쳐 아빠 입장에서 보면 과히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3년상을 묘 옆에 천막을 치고 아침저녁 문안을 올리게 하는 강제적인 효만을 칭송했다.
책에서도 아빠는 자식을 버리고 혹은 다른 여자에게 가버려 엄마 혼자서 힘들게 자식을 기르는 글들로 넘쳐나고 아빠는 돈만 버는 기계로도 비치고 아빠의 폭력이나 술주정도 한몫을 한다. 이혼을 하는 대부분의 이유 또한 아빠의 부정으로 그려지는가 하면 아빠의 대화 단절로 인한 가족의 분리형태는 아빠의 권위의식에서 빚어진 문제로 부각되고 이는 가정 해체의 주범으로 타락한 내용들도 많다.
무지막지한 가부장적인 아버지상으로 그려져 있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따뜻한 아랫목에서 겸상을 하시고 엄마와 자식은 윗목에서 차가운 밥을 먹는 그림도 있다. 또한 아빠의 말 한마디가 곧 법으로 정해져 집안의 가훈으로 받들어야 하며 아버지의 이중생활도 묵인해야 하는 그런 때도 있었다. 그러려니 그런 엄하고도 이기적인 아버지를 그저 말없이 뒷바라지하며 참고 견디며 자식을 혼자 키워야 하는 몫은 엄마이고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자식이 있었으니..... 물론 이렇지 않은 가족도 많았겠지만 이런 모든 일들이 글로, 책으로, 또는 말로 고전처럼 전해 내려왔다.
글을 배우지 못한 여자가 썼을까? 아니다. 글을 잘 배운 남자들이 썼을 것이다. 남자들은 여자들에 비해 예리한 표현력이 부족하고 남자 자신들의 치적을 드러내지 못하는 겸손함이 여자보다 많다는 것이다. 특히 자식은 엄마와의 시간이 많고 어린 나이일수록 강자보다는 약자에게 더 마음이 가는 법! 자식이 부모를 보는 입장에서 강한 아빠보다는 약하게 보이는 엄마가 불쌍하고 큰소리 내는 아빠가 미운 법이다. 왜 아빠의 소리가 큰지 이유를 따지지 못하는 나이니까. 그러다 그 자식이 아이를 키우며 느껴지는 게 달라진다. 아빠의 소리가 왜 그리 컸었는지..., 그때쯤 대부분 이렇게 말한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엄마가 잘못했네'라고...
글을 쓸 수 있는 남자들이 어머니에 대한 불쌍함과 애틋함을 모성애로 부각하고 반대로 아버지의 부재와 권위를 상징적으로 더욱 가중시켜 부성애는 아예 없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한석봉의 어머니와의 일화는 유명하다. 한석봉의 글 쓰는 솜씨를 보기 위해 불을 끄고 '나는 떡을 썰을 테니, 너는 글을 쓰거라'라며 엄마의 가리킴이 그 누구보다 크다는 걸 만방에 알리는 일을 톡톡히 해냈다. 마치 그렇게 하는 분은 아버지가 아니고 오로지 어머니이고 어머니는 모든 희생을 감내하고 엄마는 여자가 아니라 자식의 엄마이고 아빠는 강한 남자로 자리 잡는 역할을 남자 스스로 만드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책뿐만 아니라 글을 모르는 시대에는 말에서 말로 전하는 구전 문화가 있었다.
아낙네들이 모여 수다 삼매경에 빠진다. 그런 말들을 자식이 듣는다. 억지 춘향이 같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어릴 때의 교육은 오로지 엄마와의 대화가 전부이고 엄마를 보면 그 자식이 보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는 엄마를 닮아 있다. 엄마의 입장에서만 흘러나온 말들이 세대를 거치고 거쳐 말에서 말로 내려오니 어찌 아빠의 ‘부성애’가 낄 틈이 있었겠는가? 구전동화가 있듯 구전된 엄마의 말들이 세월을 타고 흘러 지구상의 모든 엄마가 위대해졌음을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자식을 낳고 기르는 인간 사회에서는 엄마가 담당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이 세상의 모든 동물들이 모성애가 강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부성애’가 강한 동물들이 의외로 많다.
처음엔 사람들의 인파로 해안을 덮고 있는 줄 알았다. 추운 바닷가에 연미복을 입은 남자들이 차렷 자세를 하고 배가 너무나와 다리가 짧아 보이는구나 했는데 자세히 보니 펭귄들이 운집된 모습이었고 멀리서 앵글을 잡으니 사람이라 착각을 했던 것이다. 가슴 윗부분에 노란 털이 있고 보통 우리가 볼 수 있는 동물원의 일반 펭귄에 비해 덩치가 크고 키도 커 황제펭귄이라는 이름을 얻었나 보다. 가슴에 황금색 띠를 두른 펭귄들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그들은 단 하나의 목표만을 가진 세상에서 가장 길고 아름다운 행렬이 시작되었다.
그 목표는 다름 아닌 아기의 출산과 아기를 기르기 위한
그 장소에 도착해서부터의 기다림은 오로지 아빠의 몫이다. 엄마가 낳은 알을 엄마의 발등에서 나란히 놓은 아빠의 짧은 발등으로 조심히 위에 얹으면 일단 성공이다. 다리뿐만 아니라 손도 너무도 짧아 손을 이용할 수 없어서 슬픈 일이다. 특히 초짜 아빠의 서투름으로 아기를 행여나 놓치면 안 되므로 두터운 발등에 초집중해서 옮겨 받은 후 다리와 다리사이에 알을 집어넣어야 한다. 이게 또 관건인 게 알을 다리사이로 밀어 넣을 때 미끄러져 옆으로 빠져버릴 수도 있고 발등에서 배안으로 밀어 올려야 하는데 알이 크다 보니 힘 조절이 안되어 배 공간에 정확히 조준하지 못하면 깨져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알이 아빠의 둥지에서 따뜻하게 부화를 준비한다. 그 상태로 석 달 이상을 버텨야 한다. 아기가 열 달을 엄마 배안에 있다가 탄생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기에, 아빠의 품 안에서 석 달을 견뎌야 하는 아기와 아빠의 사투가 얼마나 길고 힘든 일인지 감히 상상이 안된다. 더구나 인간은 배안에 있으니 손과 발이 자유로워 어디든 가고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펭귄은 다르다. 오픈된 알을 그것도 둥지도 아닌 아빠의 품에서 성장의 과정을 거쳐야 하니 아빠는 사냥을 할 수도 움직일 수도 그렇다고 먹지도 못한다.
살아있는 생명이 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와 위대한 법칙이
아빠 펭귄의 숨을 견디게 한다
엄마도 두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고 아기를 위한 사냥을 나간다. 석 달 이상에 걸친 먹이사냥의 여정을 마다하지 않고 힘든 이별을 한다. 이제 엄마는 긴 사냥을 떠나고 아내를 떠나보내는 아빠는 그런 아내의 뒷모습을 보며 석 달 이상의 고통이 시작됨을 안다. 이제부터는 자연의 위대한 생명의 진리를 깨닫고 자연의 본능에 순응하는 숭고한 정신을 받아들여야 함을 몸과 가슴으로 느끼게 된다. 전율이 시작되는 바닷가의 겨울바람은 너무도 차갑고 세찬 눈보라를 이겨낼 수 없으리라 생각되지만 아빠 펭귄의 숨을 견디게 하는 것은, 자연의 절대적 진리와 위대한 법칙이 있다는 걸 우리가 이해해야만 알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된다.
아름다운 ‘부성애’고 아름다운 공동체 의식
움직일 수도 없고 먹을 수도 없어 서로가 서로에게 몸을 기대어 한 덩어리인 군집으로 함께 강추위를 견딘다. 알이 떨어질까 발등을 움직이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맨뒤에 있는 펭귄과 안쪽의 펭귄이 자리를 이동해 가며 공평한 온도를 유지한다. 철저한 공동생활의 원칙을 그들은 지키고 있는 셈이다. 아름다운 ‘부성애’고 아름다운 공동체 의식이다.
그 석 달 동안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이유는 다리사이에 있는 알을 내려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려놓으면 영하의 날씨 탓에 금세 얼어버려 아기를 잃어버릴 수 있고 실제로 여기저기 얼어버린 알들이 뒹군다. 시간이 지나 그렇게 어렵게 부화를 한 솜털로 뒤덮인 아기를 바닥에 내려놓을 수도 없는 게 펭귄의 군집생활로 인해 자칫 밟히기라도 하면 부화된 생명을 잃을 수도 있어서 엄마가 돌아오는 그날까지 거의 한 번도 아기를 발등에서 내려놓지 못한다. 부성애는 사랑도 중요하지만 힘도 좋아야 한다. 모성애보다 훨씬 말이다. 그래서 여자 펭귄이 남자 펭귄을 고르는 기준은 오로지 멧집이란다. 오랜 기간 먹지 않고 아기를 지켜야 하므로.... 우리의 기준도 그렇다면 참 좋을 텐데... 하하
엄마가 돌아와 따뜻한 가족의 재회를 맞이한다면 천만다행인 축제의 날이 되지만, 만약 엄마가 태풍에 쓸려갔거나 상어에게 먹히기라도 해서 돌아오지 못했다면 몇 달을 견딘 아빠와 아기의 절체절명의 위기가 온다. 이때 아빠의 눈물겨운 ‘부성애’가 또 한 번 발휘해야 한다. 아기 혼자만을 남겨둔 채 먹이사냥을 떠나야 하고 남겨진 아기는 밥 동냥 신세를 지게 된다. 아빠의 머나먼 고행길은 아기의 먹이만을 생각하며 그렇게도 먼 길을 짧은 다리의 짧은 보폭으로 걷고 또 걷는다. 힘들면 배를 바닥 얼음에 대고 헤엄치듯 밀며 찬 바다로 가서 먹이를 배에 채우고 다시 또 먼길을 뒤뚱뒤뚱 걷다 지친 배를 바닥에 대고 밀며 헤엄쳐 굶주린 아기를 찾아간다.
아빠의 ‘부성애’는 두텁게 주름진 발등에서
슬픔과 함께 밀려온다
드디어 굶주리고 더러운 털을 가진 아기를 만난다. 아기는 아빠를 만나 뒹글고 껴안고 습관대로 아빠의 짧은 다리 사이로 들어가려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도 아빠의 품이 그리워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다. 아빠의 발등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아빠의 부성애는 두텁게 주름진 발등에서 슬픔과 함께 밀려온다. 누가 ‘모성애’보다 못하다 했나 아빠의 ‘부성애’를 ....
책이나 드라마에서 나와 유명하게 된 가시고기는 가시가 많아 가시고기라 한건 아니고 등에 가시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엄마가 알을 낳으면 그 알을 지키기 위한 다른 물고기들로부터의 투쟁은 모두 아빠의 책임이고 막상 알에서 부화될 때쯤 아기들을 지키던 아빠는 굶주려 죽게 되고 부화된 아기들은 죽은 아빠의 몸을 먹고 자란다고 한다.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완벽한 ‘부성애’다.
모두가 남자일 거 같은 착각마저 하게 되는데 이런 멋진 몸매를 가진 아빠해마는 여자가 놓고 떠나버린 아기들을 자기의 배안에서 기르고 볼록해진 배로 산고를 겪고 아기를 부화한다. 그래서 우리가 보기에는 배가 불룩 튀어나온 에스자 형태가 되어 멋진 몸매로 보이나 보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고 얼마나 숭고한 ‘부성애’인가!
양육의 책임이 여자에서 조금씩 남자의 양육도 도움이 아닌 필수요건으로 전환되는 시점에 사람들의 관점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여자도 남자와 똑같은 교육을 받고 똑같은 사회생활을 하기 때문에 이제는 굳이 여자만 아이를 양육해야하는 책임도 없을 뿐 아니라 남자만 굳이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어깨의 무거운 눌림도 없는 사회가 되었다. 모든 일을 반반씩 나누어해야 하는 사회에서 마찬가지로 ‘모성애’가 ‘부성애’다를 따질 필요조차 없다.
여자의 사회적 위치가 높아져가면서 양육만 할 수 없는 입장이고 반대로 남자들의 양육은 힘을 얻어 가는 과정에서 예전의 ‘모성애’만 보이는 그림이 아니라 이제는 남자들의 ‘부성애’도 한몫하고 있어서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나는 여자가 쓰는 특히 엄마 입장에서 쓰는 ‘부성애’를 말하고 싶었다. 남자가 남자의 ‘부성애’를 말하는 게 자연스럽지 못하고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자기를 치적하는 일에 서툴어 손해를 보고있는 ‘부성애’를 말해주고 싶을 뿐이다.
흔히들 남자는 멀티플레이가 되지 않아 한번에 한 가지 일만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반면에 여자는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여자가 남자보다 사회적으로 뛰어난 게 사실이라고 한다. 살아보니 맞는 말이다 싶다. 하지만 여기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한 가지가 있다. 남자는 오직 한 가지 만을 할 수 있기에 하나에 집중할 수 있다는 역설이 된다.
여자에게도 하나이듯이 자식의 사랑도 하나만을 아는 듯하다. 사랑만 한다. 사랑은 하는데 여자처럼 자상하게 여러 가지 면을 골고루 줄 수는 없지만 오직 사랑만 한다. 묵직하고 진중하지만 말없이 사랑을 주기만 하니 우리가 알아차리기 어렵다. 우리는 거기까지만 이해하자. 좋은 점은 여자들은 하는 일이 많아 사랑을 놓치기 쉽고 사랑이 퍼져 있어 진득함이 결여될 수 있지만 남자들은 사랑할 땐 사랑만 하고 일을 할 땐 일만 하는 묵직함과 일편단심의 충성심을 여자가 따라갈 수 없다는 걸 한마디로 여자와 남자의 생리가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될듯하다.
‘부성애’로 살신성인하는 묵직한 메시지를
우리는 귀 기울이고 칭찬해야 한다
그렇다고 요즘 남자들이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 되어 모두가 ‘부성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여자 모두가 ‘모성애’가 있는 건 아니니 같은 맥락이고, 다만 말없이 묵묵히 자식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우리 멋진 아버지들의 어깨를 다독여주고 싶은 마음이다. 이런 황제펭귄이나 가시고기 그리고 해마와 같이 살신성인하는 ‘부성애’의 묵직한 메시지를 우리는 귀 기울이고 칭찬해야 한다. ‘부성애’를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아빠들과 아버님들 깊이 존경하고 감사합니다.
-아들의 운동만큼은 아빠가 책임진다며 손을 잡고 나가는 남편을 오늘은 칭찬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