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후, 2030년을 가상한 글이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 기억나는가? 처음엔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말이 얼마나 생소하고 희한한 말이었는지 오죽하면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라는 말이 나왔을까?
중국의 우한에서 처음 발생했다고 해서 트럼프가 중국 코로나라고 굳이 명명해서 부르고 중국에서는 웃기지 말라는 식으로 미국의 제약회사에서 그 진원지가 나왔다고 맞받아치고 유럽 어디에서 발생했다 하고... 결국엔 국제법정까지 서게 되어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었다. 뭐 말할 것도 없이 두 나라 간 무혐의로 어이없게 끝나버렸지만 서로 관계 유지는 하되 못 잡아먹어 안달 난 톰과 제리처럼 쫓고 쫓기는 관계가 되었다.
아무튼, 전 세계적으로 500만의 확진자가 발생했고 사망자만 30만이 넘었고 그중 미국이 거의 절반에 가까운 확진자에 사망자만 10만의 기록을 가지고 마감되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의 거리도 생겨 코로나 이후의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그 치료를 위한 각종 사이트가 생겨나고 정신과 의사가 폭발적인 인기를 불러 모았다. 정신과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치료한다는 치료사들이 성업을 이루었는데 특히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 스마트 로봇이 과학 기술을 한 발짝 앞당기는 신호탄이었다. 스마트 로봇은 방대한 양의 자료를 토대로 코로나바이러스를 극복하는 데에도 한몫했지만 우울증(Corona Blue)을 치료한 일들이 세상을 뜨겁게 달구었다.
로봇이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인간과 같이 생활한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겠다. 한 집에 한 개의 로봇이 있고 1인 1로봇이 되는 날도 머지않았다. 로봇을 한 개라고 하기에도 어색한 단위인 게 이제는 로봇이 인간 개념으로 봐도 무방하다. 스마트 로봇은 사람이 시키는 모든 일뿐 아니라 인간이 할 수 없는 일까지 한다. 청소며 음식이며 설거지며 내가 좋아하는 바닐라라테를 만드는 일까지 이제는 스마트 로봇 없는 집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요즘엔 집안일만 도와주는 로봇으로는 부족하고 정원과 바깥일만 전적으로 하는 아웃사이드 로봇이 새로 출시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자율주행차가 이젠 보편화되어 아무도 운전을 하지 않는다. 코로나로 운전 시험이 불가능하면서 부모의 동의만 있으면 운전면허증을 내주는 세상이 되었고 무엇보다 스마트 카는 운전자가 필요 없으니 운전면허증의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다. 운전하는 사람 위주였던 차의 기능이 이제는 목적지까지 얼마나 편히 가느냐에 초점이 맞춰지게 되었다.
마트에서 줄을 한없이 섰었던 건 옛일이 된 지 오래다. 모든 식료품은 온라인으로 쇼핑하고 꼭 필요한 옷을 구매하는 것도 온라인으로 아바타가 나 대신 옷을 입어보고 구매한다. 내 몸을 스캔해서 컴퓨터에 입력하면 내 아바타로 맘에 드는 옷을 입혀보고 360도 회전시키고 앉아보고 뛰어보고 해서 내 몸에 잘 맞는지 편안한지 소재는 무엇인지를 클릭 한 번으로 관찰하고 제일 맘에 드는 색상으로 오더 하면 순식간에 포장된 옷이 드론을 통해 집 앞에 놓인다.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집단으로 움직이는 대부분의 대형 공간은 점점 축소되어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대형에 걸맞은 쇼핑센터에서부터 극장, 짐, 스타디움이나 마트 등은 코로나 직후부터 직격탄을 맞아 모든 게 소규모로 바뀌었다. 대형 마트는 창고 식으로 바뀌어 물건을 쌓아놓고 인터넷으로 오더 받으면 드론이 배달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극장도 한 룸에 10명 이내의 소규모로 나뉘게 되면서 소규모 파티 장소로 대여하는 수준으로 바뀌었고 스타디움은 제일 골치 아픈 장소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올림픽 같은 세계적인 스포츠 정신을 잇는 축제는 계속 이어갈 거라는 발표가 나서 다행이다.
룸의 사이즈가 가격의 차이로 변했다. 내가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룸의 사이즈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고 그러면서 일어나는 폐해 또한 심각하다. 비대면이 필수가 되어버렸으니 음성적인 장소로 변하고 있다는 뉴스를 심심찮게 듣고 있다. 개인적으로 해야 하는 서비스업은 규모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 모든 식당에는 드라이브 스루를 필수적으로 설치해야 하고 예약이 모든 기관이나 상점에 필수가 되어버렸다.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일이 전체 경제수단의 50% 이상이 되었다.
학교 봉쇄령이 해제되면서 더 많은 코로나 확진자가 학생들에게까지 불어닥치며 다시 집에만 있게 되면서 본격적인 학교 교육 시행령이 내려졌다. 그러면서 학교의 기능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집이 학교가 되었다. 어느 집이 가장 학교다운 집이 되느냐가 관건인 관계로 집 사이즈가 예전의 두 배 이상이 되어버렸고 그렇게 되니 정말 모든 게 바뀌어 버렸다. 딱 그랬다. 학교의 기능이 사라지면서 세상이 바뀌었다.
'Home is everything'시대가 되었다
이제 집은 교육을 받는 학교가 되었고 집이 회사가 되었다. 집이 생산 장소이자 소비 장소가 되어버린 셈이다. 집에서 공부하고 집에서 일하고 집에서 돈을 벌고 집에서 휴식하고 집에서 모든 걸 해야 하는 'Home is everything' 시대가 되어버렸다. 결국, 접촉이 사라진 언택트(untact : 접촉하다는 contact에 -un이 붙어 untact )라는 신조어가 나오고 그에 걸맞게 접촉하면 안 되는 사람과 사람의 거리가 자연스럽게 생기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2020년 해까지의 사람은 쉼 없이 달려가기만 했다. 누가 누가 이기나. 누가 빨리 달려 고지를 점령하느냐에 목숨을 걸고 뛰고, 달리고, 안되면 남을 이기기 위해 날라야 했던 숨 막히는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인간 대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부축이고 나라가 등 떠밀고 나라 간 힘의 세력으로 국민은 진이 빠지게 달리기만 해야 했다. 인간 이외의 것들에 시선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인간 이외의 삶 즉, 기술의 발달로 인한 환경오염이나 그로 인한 생태계 파괴 등 사회가 발전되며 따라오는 지구를 해치는 인간 외적인 것들을 생각하지 못하고 달리기만 했다. 그러니 인간의 힘으로 과학의 발전을 대처할 수 없는 바이러스라는 녀석이 순식간에 다가와 무참히 그리고 무자비하게 인간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제야 인간 이외의 것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얻은 것이 있다면 지구 환경과 동식물에 대한 '돌봄과 연구'이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선 깨끗한 지구와 함께 공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제는 공장을 가동하기 전에 세계가 관장하는 기관에 먼저 승인을 받아야 한다. 나라마다 스케줄이 있어 동시에 가동하는 건 불가능하게 되었다. 갑자기 멈춰진 그 당시의 대기 탄산 배출이 25%까지 줄면서 미세먼지뿐 아니라 오존층까지 깨끗해지는 환경의 소중함을 다시는 깨고 싶지 않은 세계인의 열망을 반영한 조치였고 그 뒤로도 각종 데이터로 세계를 하나로 묶는 기관들이 속속 생겨났다.
지금도 미국과 중국의 막강한 힘으로 세계를 이끌고는 있지만, 선진국의 이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한국은 그 뒤로도 IT 기술이나 시민의 질서 의식은 어느 나라도 따라올 수 없는 수준으로 발돋움했다. 특히 한국은 미국, 중국과 함께 코로나로 국제적으로 한 방에 추락한 일본을 다독이며 지구를 위한 모든 국제회의에 빠짐없이 참가한다. 코로나를 박멸한 백신의 중요 핵심 부분을 한국이 개발했으니 당연하다.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대단한 한국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생활이 되어버리면서 집에만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집에만 있는 생활에 만족하며 훌륭히 잘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코로나 우울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넘치고 있다. 아무리 훌륭한 스마트 로봇이 있어도 사람 간의 관계를 로봇이 치료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원전과 기원후의 나뉨은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한 숫자의 바뀜이었지 일상생활에 갑작스러운 바뀜은 아니었다. 코로나는 일순간에 목숨을 앗아갔고 그 이후엔 사람 사이의 거리를 멀게 하는 재앙이었다. 사회적 거리를 두는 일이 처음엔 단순한 바이러스 확산에 도움이 되었지만, 그로 인해 일상생활이 바뀌고 사람 사이의 거리를 이처럼 멀게 해 질병에 이르게 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코로나 이전, 일상이었던 사람 만남의 허그나 작은 모임의 수다 그리고 여행, 학교를 다니며 쌓아가는 학창 시절의 추억들이 사라졌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나 동료와 그저 손을 들어 하이를 하거나 목례를 하는 것으로 반가움을 대신해야 한다. 장례식은 물론 결혼식도 온라인 축제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축하와 슬픔을 애도하는 행사 따위는 이젠 사진에서나 보는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사람을 만나는 게 이렇게 부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릴 줄이야...
라고 말했다.
결국, 언팩트한 세상이 주는 편리함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그 말은 아무리 사람 사이의 거리를 둔다 해도 결국은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야 사람이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죽을 때 옆을 지키는 사람이 세명만 있으면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나에게 남을 3인은 누구일까? 10년 후가 아니라 당장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할 정도로 사람 두기를 하고 있는 한심한 코로나 집콕 생활이다. 10년 후 사회 모습의 결론은 역시 사회보다는 사람 관계다. 나도 니체의 말에 한 표를 던져야겠다. 나의 가치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값이 나온다는 말은 값진 진리다. 전화라도 한통 해야겠다. 잘 살아있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