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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랜Jina May 28. 2020

신문사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한국일보 편집국에서 문자가 왔다.     


"안녕하세요, 한국일보가 창간 51주년을 맞아 독자 51명의 사진과 함께 그분의 짧은 글을 싣습니다. '나는 이래서 신문이 좋다'란 주제로 A4용지 1줄 정도로 압축적이고 재미있는 내용의 글귀를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진도 함께 부탁드립니다."     


우연한 기회에 독자란에 내 글이 실린 일이 있었고 그 일을 계기로 내 이름을 건 '김 지나의 살며 살아가며'라는 칼럼이 생겼다. 그래서 51명의 독자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번 신문이 왜 좋은지에 대한 질문은 나를 깊은 생각에 빠지게 했다.


그래, 왜 신문이 좋은 걸까?


어릴 때의 기억으로 소환되었다. 내가 어릴 때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8명이 한집에서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대가족이었다. 매일 아침 아이들 도시락을 준비하고 남편을 출근시키고 할머니를 노인정으로 보내드리고 본격적인 집안일을 하신다. 집안을 쓸고 닦고 하시다 바깥일을 하신다. 강아지에 많은 닭을 키우고 계셨으니 배설물을 청소하고 꽃밭에 물을 주시며 마지막으로 마당에 물을 뿌리며 빗질 하시는 걸로 아침나절에 해야 할 집안일을 마무리하셨다.


그다음 광경이 흥미롭다. 엄마는 일단 넣었던 밥상을 다시 꺼내신다. 돋보기를 끼시고 밥상에 신문을 크게 펼치신다. 한 자 한자 정독을 하시는 모양이었다. 그때는 글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세로형식이라 코에 걸린 안경 너머 엄마의 눈이 위아래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생생하다. 침을 발라가며 신문을 넘기시던 그 모습이 내 어릴 때 보았던 엄마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때 엄마의 나이가 이제 내 나이가 되어 아침마다 돋보기를 장착하고 이제는 가로로 신문을 읽는 나의 모습을, 내 아이들도 커서 내 나이쯤이 되면 내가 우리 엄마를 기억하듯 그렇게 나의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무한정 리필되는 공짜 뉴스를 돈 주고 살까?


매일 그렇게 읽으시는 모습이 그냥 일상처럼 되어버려서 내게도 신문은 그냥 매일 봐야 하는 습관적인 행동으로 각인 되었다. 아마 그 시절을 보낸 기성세대들은 경험치에서 오는 습관으로 지금껏 신문을 보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다 컴퓨터 세상이 서서히 우리 삶 속에 들어왔다. 인터넷 세상이 온지구를 점령하고부터는 실상 종이신문의 위상이 흔들릴 거라는 예상을 누구나 쉽게 내놓았다. 인터넷으로 보는 세상에선 뉴스가 누구에게나 무한정 리필 되는 공짜 정보인데 누가 돈을 지불 하고 신문을 구매할 것인가? 나 또한 의구심을 가졌다.     

하지만 그 의구심은 정확히 빗나갔다.


물론 많은 사람이 인터넷으로 돌아선 건 맞다. 젊은 세대들이 구태여 신문을 읽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어차피 신문의 독자는 나 같은 기성세대와 그 이전세대만의 전유물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세 줄 이상 넘어가면 책장을 덮는다는 말이 나오고 긴 문장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할까? 3초안에 결정하고 3초안에 바뀌는, 빠르게만 돌아가는 요즘 세대를 누가 탓할 것인가? 시대가 달라지고 그에 걸맞는 콘텐츠가 개발되어야 그들의 구미를 당길 수 있는 게 시장원리다. 신문으로 읽는 뉴스를 선호하는 확고부동한 계층이 있어 신문사의 존재가 흔들릴 정도는 아니라서 천만다행한 일이다. 여전히 신문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인쇄되고 이렇게 먼 이역만리에서도 한국일보를 볼 수있다니 감사할 뿐이다.


신문하면 고루하거나 꼰대가 보는 시시한 것이라 생각하는 요즘 세대들은,

신문이 주는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


하긴 종이가 귀했을 때는 다 읽은 신문지로 화장지 대용을 했다. 화장실뿐 아니라 책을 싸는 종이로도 활용했고 고깃간에서 고기를 포장하는 것은 의례히 신문지였다. 집에 가지고 와서 고기를 꺼내 보면 선명하게 검은 활자가 박힌 붉은 고기를 한 번쯤은 경험해 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도시락통을 싸고 아궁이 불을 지필 때도 그만한 것이 없었으며 아무도 단 한 장의 신문지를 허투루 쓰는 사람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종이가 귀한 시절이 지나간 후에는 지하철 선반에 다음 사람을 위해 보다만 신문을 올려두는 배려가 대부분 사람의 상식이 되었다.


한 집에 한 부의 신문은 우리 대중들의 마음의 안식처였고,

알 권리에 대한 확실한 답이었고 해결책이었다.     

 


인터넷 신문은 어떤가?


대표적으로 인터넷의 기사는 일단 저마다 자극적인 제목으로 시선을 끈다. 낚일 수 있는 기사에 우리는 막무가내로 노출되어 아무런 자기 판단 없이 그 내용을 접한다. 설사 좋은 글을 읽다가도 파도타기처럼 내 뜻과는 관계없이 떠도는 가짜뉴스로 넘어가는 일이 허다하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내가 지금 무슨 기사를 보고 있는지도 모른 채 읽지 말아야 할 쓰레기 기사를 접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젊은 세대 누구나 인터넷 정보에 빠져있는 현실


인터넷 기사는 워낙 방대해서 내가 선별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클 거 같지만, 너무 많아서 선택할 수 없다. 선택사항이 많으면 집중이 되지않아 중요한 이슈를 놓치는 것과 같다. 아무 예고 없이 툭툭 튀어나오는 단발성 기사들이 우리의 눈을 자극한다. 분별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그런 자극적인 기사가 마치 대중화된 시선으로 잘못 해석해 잘못된 사고로 인지해 버릴 수도 있다. 원치 않은 너저분하고 선정적인 광고가 무료로 접하는 활자 쓰레기로 인터넷 공간을 채운다. 공짜라서 불평할 수 없는 점을 이용하는 것이고, 무료 싸이트가 그런 광고로 운영이 되고 있으니 그 또한 할 말은 없다.     



그에비해 종이 신문이 좋은 점은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종이 신문은 일단 전체적인 글의 구성을 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서 전체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다. 즉 나무 하나하나를 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나무와 동물이 함께 사는 숲을 보는 관점이 중요한 일임을 리더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쓰는 문구이다. 숲을 보지 않고 나무 하나만을 관찰할 때 범할 수 있는 오류는 지식이 편협적이고 다양성의 오차범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지식 편향적인 사고로 객관적인 사실을 접했을 때 제한된 지식으로 전체를 수용하지 못하는 아마츄어적 지식인이 될 수밖에 없다.     


종이 신문은 공짜가 아니다. 지식을 사는 댓가를 치러야 한다. 한국의 신문값은 모르지만, 미국의 신문값은 직접 살 때는 한 부에 $.50(650원)이다. 매일 배달을 해서 보면 한 달에 $15(한 부에 930원)이다. 인터넷의 공짜에 비하면 비싼 값이지만 우리가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값을 치러야 한다. 변호사와 상담하며 지식을 사려면 시간당 몇십만 원을 내야 하고 교수의 강의를 들으려면 비싼 강의료를 지급해야 한다.


무료강의는 인기가 없을뿐더러 무료는 뭐든 비싼 거에 비해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게 시장원리이다. 여기에서도 한국일보 이외의 중앙일보나 동아일보 그리고 조선일보가 있지만, 그 신문들은 무료배포다. 집까지 배달해가며 읽는 독자가 없기 때문에 무료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나도 한국일보 이외의 신문 칼럼에 기고한다고 했다면 정중히 거절했을 것이다.  

   

정보를 파는 퀄러티의 내용이 신문의 값이 된다


이는 공짜신문이라서가 아니다. 신문은 정확한 근거를 가진 대중매체이고 그 정확성의 신뢰를 바탕으로 독자를 만날 수 있는데 그 신뢰가 없는 신문이라면 읽을 가치가 없다. 신문이라고 모두 인터넷보다 좋은 정보라고 할 수는 없다. 어떻게 보면 독자층이 제한되어 있고 편향적인 사고들의 기사들이 많아 그들만의 리그로 그들만의 의견수렴에 급급해 대중적인 인터넷에 비해 더욱 고립되고 빗나간 주관적 견해가 난무할 수 있다. 한번 뇌리에 박힌 정치적 견해 같은 사고는 쉽게 바뀌지 않는게 또 우리의 뇌가 가지고 있는 시신경 회로의 오류다.


가짜뉴스를 만들어내는 가짜 신문이 너무 많다.

정보를 파는 퀄러티의 내용이 신문의 값이 된다. 그런 신문이 '갑'이 되어야 한다. 


나에게 종이신문은 시간을 정지시키고 정지된 시간 동안 뇌 회전만 하는 한마디로 잡생각이 정지될 수 있는 정당화된 확실한 나만의 시간이다. 전문성을 요구하는 서적이라 머리 아프게 집중해서 읽는 책이 아니다. 잡다한 생활 이야기에서부터 정확한 사실을 근거한 기사를 읽으며 세상 돌아가는 판도 섭렵할 수 있다. 또한, 다른 나라의 정치, 사회 이야기를 천천히 내 속도에 맞추어 잡다한 광고의 홀릭 없이 그 기사 하나만을 정독하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지역뉴스를 제일 꼼꼼하게 보면서 내가 사는 지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게 된다.

특히 코로나 때문에 하루하루가 달라지는 정책을 아는 일은 내 생계와 직결되는 중요한 사안임으로 정독을 하고 중요한 정보는 사진을 찍어 기록을 남겨놓는다. 또한, 팬데믹이니 에피데믹이니 하는 코로나로 인해 생겨난 단어들도 잘 설명되어 있어서 시대의 흐름에 발맞출 수 있는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 바뀐 정책이 어떻게 하면 가정에 보탬이 되는지도 상세히 알려주는 일 또한 신문이 하는 일이다.  그러다 요리 섹션에서는 오늘의 요리로 무엇이 좋을까도 적용해서 만들어보고 여행 섹션에서는 내가 알지 못했던 미지 세계의 정보를 미리 습득하고 깨알정보를 스크렙 해두기도 한다.     


코로나로 인해 집에만 있는 시간이 늘고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에 정확한 정보를 신속하게 전달 받아야 하는 매체는 다름 아닌 신문이다. 그로인해 구독자가 이전보다 늘었고 정독률이 높아졌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특히 미국 사회에서 한국 신문은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가장 가까운 통신수단이자 길잡이 역할을 한다. 한국말로 속 시원히 전달되는 정확한 뉴스는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매개체이고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우리 민족의 자산이기도 하다. 나는 이렇게 한 줄을 내놓았다.     


신문은 지식의 기초체력을 다져주는 습관이고, 인터넷에 비해 퀄리티 높은 정보습득의 바다다


'김지나의 살며 사랑하며' 한국일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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