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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랜Jina Jul 06. 2020

이 시국에, 한국행이라니..

생각대로 인생이 흘러가지 않는다는 절대적 진리를    몸소 실천하는 중대한 일이 생겼다.


이렇게도 무서운 코로나 시대에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엄청나고도 중대한 절체절명의 순간이 아니고서는 이런 시국에 누가 바이러스 덩어리인 비행기에 몸을 실겠나 싶겠지만 그게 바로 내가 되었다. 매일 하루에 한 편씩 뜨던 대한항공 비행기마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델타 항공 그것도 디트로이트(Detroit)에서 6시간을 경유해야 하는 스케줄만 겨우 남아있었다. 그거라도....



아침 6시 비행기라 집에서 새벽 3시 반에 길을 나섰다.

그렇게나 북적였던 공항에는 나 포함 겨우 몇 명만이 체킹을 하고 디트로이트행 비행기를 탔다. 그나마 거리 두기로 세 자리 중 가운데 자리는 비워둔 채로 맨 앞자리에 앉았다. 생각 같아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을 완전히 덮는 방호복을 입어야지 싶었는데 모두가 달랑 마스크 한 장으로 무서운 바이러스 침투를 막고 있어서 혼자 방호복을 입었다면 하고 피식 웃었다. 아마 동물원 하얀 원숭이가 되어 모두의 웃음거리가 되었지 싶다.


1시간 반 비행 동안 보이지도 않은 바이러스 공포로 마음을 조리며 스튜어디스가 전하는 음료수마저 정중히 거절하고 상황을 살피느라 금세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거의 모든 비행기의 경유지인 디트로이트(Detroit) 공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6시간을 경유해야 하는 이유로 장시간 쉴 자리부터 찾았다. 거의 발 디딜 틈이 없이 붐벼야 하는 공항임에도 불구하고 나처럼 긴 장거리 여행자들은 뜨문뜨문하게 긴 의자에 누워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장시간의 자리를 위한 공간 확보에 돌입했다. 스벅은커녕 웬만한 면세점도 폐쇄되었고 모노레일로 유명한 공항이지만 정지 상태로 공중에 떠 있었다.  


디트로이트(Detroit) 미국 미시간주 안에 있는 가장  도시다.


미국의 관문으로 통하는 여러 국제공항 중 하나다. 델타항공이 노스웨스트 항공과 합병한 이후, 2020년 현재에도 델타항공의 메인 허브 중 한 곳이며, 인천공항으로 직접 가는 여객기가 있어서 한국에서의 인지도도 높은 편이고 공항 시설도 나쁘지 않은 편이다. 인종으로 보면 흑인의 비율이 높아 경제적 순위는 그리 높은 편이 아니고 경제적인 면으로도 몇  전에 최악의 도시  하나로 꼽혀 안전한 도시와는 거리가 멀고 점점 쇠퇴하는 도시 중의 하나다.      


그래서인지 공항의 모습이 코로나로부터 안전한 장치가 보이지 않았다. 열 명 중 다섯은 마스크조차 착용하지 않았고 손 세정제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고 그 누구도 안전에 대한 사고를 지닌 사람이 없는 듯 보였다. 그래도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는 의무적으로  체크를 해야 한다며 탑승 전에 온도를 재고 한국에서 2주간 필수로 격리를 해야 한다는 싸인을 요구하긴 했는데 그나마 한국 정부에서 요청하는 협약 기준이라는 단서가 붙었다. 다른 국내선 비행기에선 열 체크도 하나 없이 탑승을 했으니 내가 탄 첫 번째 비행기 안에 코로나 확진자가 없다는 보장이 어디 있었을까?     


디트로이트 공항 편의점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는 미국인들은 마스크를 한 명도 쓰지 않았다

6시간 동안 지루하고도 불안전한 바이러스의 위험 앞에 시간은 흐르고 한국행 비행을 위해 보딩을 하는데, 마스크도 쓰지 않은 경찰이 우리 모녀를 불러 세웠다. 적어도 10명 남짓한 경찰이 우리 앞에 있었고 먼저 우리 딸에게 물었다.


지금 얼마를 가지고 있나?” 우리 딸은 “$1,000”이라고 짧게 대답하고 이어 나에게 물었다. “둘이 가족이냐?” 먼저 묻고 “얼마를 가지고 가냐?” 물었다. 난 약간 애매하게 대답했다. “$8,500?” 경찰은 약간 떨떠름하게 “오케이”라며 통과를 시켰다. 그런데.... 약간 나이가 든 백인 경찰이 나를 불러 세웠다. “Mam....” 그때부터 나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상하게 나는 경찰이 너무 무섭다.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경찰이 다가오거나 말을 걸면 나의 가슴이 두 방망이질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디트로이트는 다양한 인종과 다른 나라로 나가는 국제선으로써의 규모가 큰 곳이라 특히 머니에 관한 검열이 심한 공항이라고 했다.      


만불 이상이면 1불에 한대
고등학생이 삥 뜯는 모습과 흡사


다른 승객은 모두 적은 액수를 말한 건지 쉽게 통과를 하는데 딱 우리만 잡고 늘어졌다. 옳거니 하고 잡은듯했다. 책상 위에 나와 내 딸의 가방과 작은 트렁크에 입고 있던 카디건까지 올려놓고 정말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한 가정에 $10,000 까지만 가지고 출국할 수 있다며 빠른 속도로 말을 했다. 딸이 1천 불, 엄마가 8천5백, 합해서 9천5백 불 이상이 나오면 1불에 1점씩 벌금을 물릴 기세였다. 한마디로 고등학생들이 삥을 뜯는 듯한 모습으로 ‘없다 했으니 만약 돈이 나오면 천 원에 한대야’ 하며 으름장을 놓는 장면을 연상하면 딱 맞을듯하다. 숫자에 워낙 약한 미국 사람들이 내 지갑에서부터 소지품 배낭에 들어있는 서류봉투 하나하나까지 뒤지고 손등에 돈을 적어가며 더딘 덧셈을 하고 있자니 시간이 한참 흘렀다. 이미 모든 탑승객이 우리 빼고 없었다.     


하... 왜 이리 속절없이 돈들이 나오는지... 두 달 동안 체류를 해야 하고 누군가에게 전달해야 하는 돈까지 포함되어 꽤 상당한 액수였다. 당장 써야 하는 돈은 지갑에 넣었고 은행으로 보내야 하는 돈은 조그만 파우치에 넣었고..... 비행기 안에서 자잘하게 써야 하는 돈은 호주머니에 넣었는데 이를 어째... 내가 말한 8천5백은 순전히 체류비용을 말한 건데.... 더 나올 텐데... 아 어쩌지? 지금이라도 말을 해야 하나... 딸도 딱 1천 불이 아니라 쓰다 남은 잔돈에서부터 비상금으로 쓸 돈은 깊숙이 다른 곳에 넣었는데.....     


한참을 뒤지더니 이래저래 몇 센트까지 끄집어 놓았다. 거의 천 불이 오버되었다. 우리를 불러 세운 경찰에서부터 10여 명의 경찰이 모여 우리를 어찌할 것인가 모의를 했다. 그사이 나와 딸은 열심히 해명을 했다. 한 사람 당 만 불로 알았지 가족당 만 불임을 몰랐다, 체류비용만 말한 거지 지금 당장 쓸 돈까지 세지 못했다, 면세점이 없어서 물건을 사지 못해 돈이 남은 거다.... 라불라라불라 열심히 변명을 했다. 드디어 제일 나이가 든 백인 경찰이 나에게 물었다.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 “아니다. 절대 그런 일이 없었다” 그랬더니 “전에도 그랬을 거”라며 단지 천 불만 오버했으니 이번엔 기회를 주고 다음에 다시 이런 일이 있으면 그때는 만 불을 제외한 남은 돈은 무조건 회수하고 블랙리스트에 올리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더니 서너 장에 달하는 페이퍼에 사인을 하라고 했다. 다시는 만불 이상 해외로 반출하지 않겠다고.... 그나마 다행이었다. 돈을 양손으로 들고 사진을 찍히는 수모도 겪는다고 들은 적이 있다. 무슨 범죄자도 아니고 말이다.


땡큐를 연발하며 가방을 챙겨 서둘러 기내로 들어갔는데 우리가 타자마자 비행기 문이 닫히고 바로 출발했다. 다리가 후들거려 털썩 의자에 앉았다. 딸은 젊긴 젊나 보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쿨하게 짐을 머리 위로 올리는데 나는 시작도 전에 방전이 되어버린 듯했다. 그사이 아끼던 블루투스도 사라지고 물도 흘리고.... 시작이 엉망이 되어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방호복은커녕 마스크만 겨우 쓰고 맥이 빠져 가방을 올리지도 못한 채 이륙하는 창문을 물끄러미 보았다. 아무튼, 비행기 안에서 마스크 착용이 의무라는 말에 기내식을 먹을 때도, 물을 마실 때도 최소한의 시간으로 마스크를 벗었고 잠을 잘 때도 벗지 못하고 화장실을 이용할 때도 장갑을 끼고.... 14시간이 넘는 비행 동안 코로나와 신경전을 벌이다 보니 비행 내내 잠도 못 자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유치환의 깃발에서 나오는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소리 없는 신경전을 치르며 드디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내리면서 창문에 비친 한국사람들은 이미 탑승객이 내리기도 전에 방역을 준비하는 모습이 내 눈에 포착되었다. 역시 한국의 방역은 대단해 보였다. 워낙 탑승객이 없다 보니 입국 심사까지 시간이 길진 않았지만 아주 까다로운 절차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맨 먼저 열 체크를 하고 핸드폰에 '자가격리 안전보호'라는 어플을 깔고 내가 격리해야 하는 주소가 맞는지 보호자가 누구인지를 전화를 걸어 확인하며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서 머무르는지 그리고 어떠한 절차로 매일 나의 몸 상태를 체크해야 하는지를 몇 단계의 절차를 걸쳐 확인했다. 철저한 검역이 실시되었고 앞으로 2주간의 동선추적에 만전을 기하는 일이었다.   


방역을 위해 승객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


검역을 위한 절차가 여러 군데 설치되어있고 시별로 나뉘어 진행하고 있다


친척분이 우리를 픽업 오셨다. 그렇지 않으면 따로 마련된 버스나 방역 택시를 이용해야 하는데 한없이 기다려야 하는 수고로움이 따르는듯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자차 운전으로 미국에서 온 위험한 사람을 자동차에 태우는 일이 보통일은 아니었다. 그나마 내가 한국 거소증이 있어서 시설 격리에 들어가지는 않고 자가격리 즉 내가 원하는 곳에서 격리를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딸도 나와 가족임을 증명하는 가족 증명서류를 미국에서 미리 준비해 왔기에 자가격리가 가능했다. 드디어 집으로 왔다. 언니 집에 머무르기로 해서 왔지만, 생각보다 까다로운 절차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함께 해야 하는 언니 가족 중 사회생활하는 사람은 나를 피해 어디론가 2주간 격리를 떠났고 언니는 나와 함께 격리에 들어갔다.


알아서 격리하게끔 만드는 사회인식이
법보다 무서운 규칙이 되었다


핸드폰에 자가격리 앱을 설치한 순간부터 나는 동선 추적이 가능하기 때문에 문밖을 돌아다닌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고 나와 함께 생활하는 언니 또한 외출할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물론 언니는 강제는 아니지만, 미국에서 온 사람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있는 한 언니를 만나주는 사람은 없고 주변에서 알아서 격리를 하게끔 만드는 사회 인식이, 절대 어길 수 없는 규칙이, 법보다 무섭게 되었다. 코로나 소굴에서 온 미국 원숭이가 된 기분이고 바이러스가 덕지덕지 붙어 돌아 뎅기는 기분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외국에서 오는 사람들이 많은 지역에서는 트렁크 끄는 바퀴 소리를 제일 무서워한다 말이 있을까?


실제로 나는 트렁크 대신 커다란 보스턴백을 들고 오느라 옮길 때마다 힘이 든 건 사실이다. 코로나 검사를 위한 보건소가 아침 9시에 오픈한다기에 제일 먼저 아무도 없을 때 해야지라는 마음에 일찍 나섰는데 웬걸 모두 나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내 앞으로 30여 명이 대기자로 줄을 서고 있었다. 보건소에는 해외 입국자 검사소가 따로 있을 만큼 외국에서  사람들로 북적였고 그 안에는 가족 단위로 여행을 온 외국 사람들로 붐볐다. 친절한 공무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서류 작성을 하고 기다렸다.     


미국에서 들은 코로나 검사에 관한 괴담이 있었다. 면봉이 코안 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거의 뇌 속까지 들어가는 기분이라 참을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던 바라 마음을 단단히 부여잡고 검사에 임했다. “많이 아파요?” 물으니 “많이 답답하실 거예요”라는 답까지 돌아와 정말 긴장을 했었다. 먼저 혀 안쪽 끝에서 살짝 면봉을 데더니 두 번째 면봉을 코안 쪽으로 집어넣었다. 순간 움찔 눈을 감고 숨을 멈추는데 아주 살짝 안쪽으로 넣더니 끝이란다. “어? 끝난 거예요?”라는 말을 나도 모르게 내뱉을 정도로 아주 간단하게 검사를 끝냈다. 이상했다. 아마 미국 간호사들의 손끝에 문제가 있었지 않았나 혼자 조용히 웃었다. 역시 우리 한국 간호사는 다르구나...  

    

해외 입국자 검사소가 따로 마련되어있는 강남보건소
작지만 강력한 꽃처럼 코로나를 반드시 이겨내라는
메시지 같은 작은 화분의 힘


심하게 걱정스러웠던 검사가 무사히 끝나고 집에 왔다. 빨간 꽃이 보리 꽃처럼 자그마하게 피어있고 상대적으로 잎은 크고 두꺼워 작지만 강력한 힘을 가진 꽃처럼 꼭 코로나를 이길 수 있다는 메시지 같은 작은 화분을 들고 하늘거리는 하얀 원피스를 입은 담당 공무원이라는 여자분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한국에 도착함과 동시에 나의 신분이 노출되고 나는 한국인도 아닌 미국 시민권자인데 무료로 검사를 해주고 거기에 꽃을 들고 집까지 와서 자세히 격리 기간에 지켜야 할 수칙과 필요한 물건을 주는 나라... 이런 나라가 한국이라니 너무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그래도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 사람이지만 내가 정말 노랑머리라면 이런 시스템 앞에서 경이로움을 금하지 못할 일이 될 것이다.     


작은 꽃화분과 함께 폐기물 봉투, 마스크, 온도계 등 필요한 물건을 손수 가지고 집까지 방문을 왔다


지금, 이 시점에서도 미국은 확진자가 하루에 5 7천명이라는 믿을 수 없는 숫자가 나오고 있고 모범이 되어야 할 대통령도 마스크를 쓰지 않고 코로나 검사를 위해 예약을 하기도 어렵고 몸이 아파도 검사를 하기까지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고 환자가 많아서 산소호흡기를 쓸 정도가 아닌 사람은 확진자라해도 병원에 입원도 못하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곳 한국은 자국민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나처럼 다른 나라 여권을 가진 사람에게조차 한국에 입국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검사를 무료로 해주고 격리 기간 동안 열심히 힘내서 하라며 이렇게 세세하게 신경을 쓴다는 자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음성으로 판명되어 다행이지만 2주간의 격리는 아직 한참 남았다. 지인 한 분이 내가 좋아하는 스벅 바닐라라테를 매일 문 앞에 가져다 놓고 가는 수고로움에 감동과 함께 웃음을 주고 있다. 제일 고마운 일은 물론 나 때문에 문밖출입을 못 하는 언니의 희생에 그저 감격하고 있다. 기나긴 인생을 살며 어찌 코로나 같은 바이러스로 집에만 머물러 있을 수 있었을 것이며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도 2주간의 완벽한 사회와의 격리로 이런 감동을 느낄 수 있었을까? 인생이  짜인 각본대로 움직이지 않기에 더욱 긴장하며 매일을 소중히 그리고 감사히 사는 이유인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은 항상 어려워 봐야지만  사람의 진가를 알아본다고 한다.


내 인생 최대로 느껴볼 수 있는 사람 간의 온도를   있는 시간이 바로 지금이다. 내가 돈이 있다고, 내가 건강하다고,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일이 단 하나도 없다. 내 팔과 다리가 굳어 버리고 머리조차 쓸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바로 지금이지 싶다. 미국에 남겨진 가족에게도 미안한 일이지만 여기는 한국이고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의 도움으로 이 시기를 견뎌야 하는데 오히려 지금 나는 그야말로 아주 편안한 시간을 만끽하고 있음에 감사한다. 어쩔수 없는 일이라면 즐기는 수밖에....어제는 갈비를 감사히 먹었고, 오늘은 고급지고 맛난 스시와 장국을 음미하며 후식으론 그 유명한 풍년제과 센베의 진한 땅콩맛까지 격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중이다.


언니는 말한다. ‘이런 격리라면 2주가 아니라  달도 가능하지 않을까?’ 언니와의 행복한 격리가 오랜 추억으로 남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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