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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랜Jina Oct 03. 2019

'시니어' 센터를 아시나요?

#02ㅣ미국의 시니어 센터에서 자원봉사하며 마음을 힐링하는 삶

나의 엄마는 13년째 치매로 계신다.

살고 계시는 게 아니고 살아계신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의 중증 상태이시지만, 당신의 자식마저 알아보지 못하시고 오로지 남편만을 알아보시는 처녀적 모습으로 살아계신다.

  

엄마는 그 시절에 아빠와 대학생과 고등학생의 관계로 처음 만나셔서 화려한 비밀 연애를 하셨고 결국 결혼까지 하신 그야말로 신여성에 속하시는 ‘배우신’분이다. 5명의 자녀와 홀시어머니를 모시면서도 손톱에 매니큐어 바르지 않은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고, 노래를 좋아하셨고, 하루 종일 신문을 섭렵하시고, 매일 마당 물청소와 닭을 키우시는 그야말로 현모양처셨다. 남편이 처음 우리 집에 가서 상다리 휘어지는 대접을 받고 장모님한테 반했다는 말이 빈말이 아님은 시어머님이 그걸로 며칠 볶이셨다는 말로 증명이 되었다. 아들은 물론 딸과도 내외를 하셨는지 당신의 속옷 입은 모습조차 보이지 않으신 깔끔한 분이셨다.

  

내 기억으로 단 한 차례, 초등학교 아마 저학년쯤 되었을 때 학교를 다녀와 엄마의 부재로 하늘이 무너 져라 울었다. 그만큼 엄마는 굳건히 엄마의 자리를 지키셨고 교육에 있어서만큼은 재정 상태를 고려치 않는 고집으로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예체능에 투자를 아끼지 않으셨고 한해에 세 명씩 대학 등록금을 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학은 꼭 가야 하는 필수코스로 여기게끔 하셨다.

 



그런 엄마가 70세 전에 치매에 걸리셨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그마저도 난 이 먼 미국 땅에서 전화로만 전해 들어야 하는 기막힌 불효녀가 되었다. 아이들과 한국에 가면 으레 엄마를 먼저 찾게 되는데 해마다 흐려져 가는 기억을 붙잡기에는 너무 먼 거리에 딸이 살고 있었다. 엄마는 요양원에서 얌전한 할머니로 통하셨다. 한마디 불평도 안 하시고 하라는 대로만 하시고 아주 먼 몇 해 전엔 오락시간에 노래 한 자락도 하시는 수준 높은 전직 선생님 포스가 나오셨다고 그곳에서 도움 주시는 분들이 전하신다.


그래도 다행인 건 엄마가 처녀 시절로 돌아가셨으니, 엄마는 아빠 곁에만 계시는걸 원하셨을텐데 긴 병에 효자없다는 걸 알턱이 없으신 엄마 입장에서는 성에 안 차시겠지만, 아빠가 요양원 딱 옆에서 매일 엄마를 보러 가시는 정성으로 치매의 평균 수명의 기록을 깨시고 계신다. 젊었을 때 잘못하셨던 부분이 많으셨는지 엄마에게 받은 만큼 돌려주는 실천을 몸소 하시고 계신다. 아빠의 건강도 좋지 않으신데, ‘엄마가 옆에 계시니 살 수 있는 희망이다’는 말로 진한 부부애를 느끼며 그 모습에 난 또 감사하다.


그 시절엔 아버지의 권위가 하늘을 찌를듯해서 뭐든 아빠가 자식보다 먼저였는지 아니면 엄마가 아빠를 자식보다 더 많이 사랑하셔서 그러셨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항상 아빠와 견주어 엄마의 사랑을 갈구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치매의 과거로의 시간이 어디로 멈추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지만, 그래도 자식 하나 알아보지 못하시고 오로지 당신의 남편만을 기억하는 엄마가 섭섭하다는 감정은 속일 수는 없나 보다.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에 내가 이렇게 묻는다.


'엄마 막내딸 왔어요. 이름이 뭐야?’
‘용암이’
‘아니, 용암이는 남편이고 막내딸 이름이 뭐야?
‘용암이가 오늘 안 왔어...’
‘엄마, 용암이 조금 이따 온 데’
‘온 데?’라며 그렇게 천진하게 웃으실 수가 없다. 그런 엄마의 모습에 난.. 너무 슬프다.


영어 공부도 할 겸 엄마를 돌보지 못하는 죄스러움에 조금이나마 위안받고자 집 근처 시니어 센터에서 자원봉사를 하기 위한 지원서를 제출했다. 한국의 요양원이 여기는 시니어 센터라는 말로 그럴듯하게 들린다. 우리 딸이 음악 하는 친구들과 쳄버로 바이올린을 켜드리고 봉사시간을 받는 곳이라 그리 낯설지 않은 곳이기도 하지만, 일단 아시안 노인이 단 한 명도 없어서 나의 영어 실력이 들통나지 않는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안도감이 우선순위였다. 절차가 복잡했다. 일단 나의 신분 조사와 건강검진 확인서와 몇 개의 추가 예방접종까지 약 한 달 동안 나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드디어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어려운 학교에 합격한 듯 기쁜 마음에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엄청난 규모에 일단 놀랐다. 호텔 수준의 일인실이 200여 개이고 로비 레스토랑 병원... 노인들이 편안하게 즐기면서 치료받을 수 있는 호텔에 의사들이 상주해 있는 작은 병원이 들어가 있는 셈이었다. 나는 레크리에이션을 맡는 부서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하루에 세 개의 프로그램으로 그림이나 빙고 게임, 인형 놀이, 아이들 쳄버, 개인 콘서트 등 일주일 동안 다양한 클래스를 운영하는 곳이었다. 일단 그림 그리기와 뜨개질 반에서 일하고 하루는 로비에서 피아노를 두 시간 쳐 주기로 했다.


내가 미국에서 미국 사람에게 도움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게 신기하고 보람된 일이 되는 게 내 부모님께 받은 재능과 노력에 다시 되갚음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신 셈이었다. 또한, 미국에 처음 와 그레이스 교회에서 받은 무료 영어 교실에서 그리 열심히 공부한 이유를 실천하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고 이민자로서 무한한 사랑을 받은 만큼 되돌려 줘야 한다는 소명 또한 아빠가 엄마에게 실천하시는 가르침이다.

  



 ‘코드니’는 손발이 자유롭지 않으셔서 휠체어에 의존해야 하는 덩치가 크신 할머니로, 존 홉킨스의 피바디 음대에서 피아노를 가르치셨던 교수님이셨다고 약간 어눌한 발음으로 자기를 소개하셨다. 개인 룸을 배정받지 못할 정도로 중증환자여서 병원 병동에 계신 분이다. 그분 병실에선 항상 클래식이 흘러나오고 악보를 보며 피아노를 치시는 듯 몸을 항상 흔드시며 감상에 젖어 계셨다. 내가 로비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면 힘들게 휠체어를 밀고 맨 앞에서 박수를 쳐 주시는 분이었다. 내가 한국 여행을 갔을 때 한국으로 음표가 그려진 엽서를 보내주신 유일한 할머니여서 나 또한, 붓으로 음표가 그려져 있는 한국 엽서를 선물해 드리니 눈물을 흘리시며 당신이 아기던 클래식 테이프를 선물로 주셨다.

 

모두가 백인인 그곳에 유일하게 흑인인 ‘제니퍼’는 자식을 9명이나 둔 너무도 행복한 분이셨다. 매일 한 자녀씩 돌아가며 병실을 찾았는데, 하나같이 친절하고 극진히 엄마를 보살피는 모습에 다른 분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단 한 번도 부모를 방문하지 않는 어떤 분은 매일 정문에 나가 창문만을 쳐다보며 자식을 기다리는데... 제니퍼는 누워만 있는데도 옷장에는 옷이 그득하고 매일매일 자식들이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 장신구도 바꿔드리니 누워 있는 인형 같았다. 내 엄마도 저렇게 해 드려야 하는데 라는 마음에 항상 부러웠고 대리만족을 하는 양 너무 이쁘시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픈 아내의 볼에 키스하며 사랑해라는 말을 하는 아름다운 노부부

    

경악을 금치 못하는 아름다운 장면도 있다. 그분 또한 전신 마비로 누워서만 지내는 중증환자인데, 그 옆엔 멋진 카우 보이 모자를 쓰고 화려한 넥타이를 맨 멋진 노신사가 늘 지키고 있었다. 어느 날 막 병실에 도착한 노신사가 실비아에게 자기의 모자를 정중히 벗고 눈을 힘없이 감고 있는 아내의 볼에 굿모닝 키스를 하며 활짝 웃는 게 아닌가? 사랑한다 말하며... 그 모습에 내가 빙긋 웃으니 멋쩍었는지 실비아가 너무 이쁘지 않냐며 젊었을 때보다 지금이 더 사랑스럽다고 말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노부부의 모습인가?

   

나랑 같이 일하는 팀의 팀장은 ‘마크’라고 파란 로렉스 시계를 차고 빨간 팬티를 입었다며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게이다. 나이가 좀 있어 보이지만 혼자 엄마랑만 살아서인지 젊은 옷과 운동으로 단련된 몸으로 할머니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멋쟁이다. 단지 한국 여행을 간다는데도 행여 다시 오지 않을까 걱정된다며 팀원들이 코스튬 복장으로 코믹 사진을 찍고 사인을 하고 액자까지 만들어 나를 화들짝 놀라게 하는 재주 많은 사람이기도 하다.

코스튬 복장을 하고 꼭 다시 돌아오라는 그들의 메시지에 난 감동을 받았다


또한 피부암 환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ED는 지금도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잊지 않고 연락이 와서 방문을 하면, 어제 만난 사람처럼 자랑스럽게 나를 다른 환자들에게 소개한다. ‘나의 유일한 한국 친구’라며... 난 또 거기에 맞춰 그분들께 그림 한 장이라도 같이 그려주고 오는, 재능 기부를 기꺼이 나눠주는, 그럴 때마다 가슴 뭉클한 관계에 대한 지속을 얼굴색이 달라도 마음은 똑같다는 동지애를 느끼게 해 주는 노랑머리 남자이다.

  치매는 보는 이에게는 거죽만 살아있다 생각되지만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행복한 삶이 될 수도..


거기 사람들은 항상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지만, 난 그들에게 진심 고마웠다. 내 엄마에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들을 그들이 있음으로 해 줄 수 있다는 대리만족과 나 자신에게도 치유할 수 있는 힐링의 시간이라는 걸 그들은 알 길이 없다. 치매가 보는 이에겐 삶이 없고 거죽만 있다고 생각되겠지만, 그들은 인생의 가장 찬란하고 행복한 순간으로 돌아가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셈이니 얼마나 행복한 삶인가? 지금 이 순간의 행복만이 존재한다면 치매라는 것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닌듯하다. 울 엄마가 그저 용암이만 있으면 활짝 웃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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